“매일매일 조금씩 오는 작은 행복감으로 살아가요.”
고아성의 삶에 켜켜이 쌓여가는 매일의 조각들.
아주 오랜만의 화보와 인터뷰예요. 몸은 괜찮아졌나요? 지난가을에 꽤 큰 부상을 입었잖아요.
뼈가 부러진 게 처음이라 조금 놀라긴 했는데요(웃음), 이후로는 계속 회복하는 데만 집중하면서 시간을 보낸 것 같아요. 다시 연기를 해야 하고 약속된 작품들도 있으니까요. 지금은 다 나았어요. 괜찮아요.
영화 <한국이 싫어서>가 드디어 개봉해요. 누구보다 이 영화가 세상 밖으로 나오길 기다렸을 것 같아요. 영화도 고아성 배우를 기다렸을 테고요. 부상으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과 오픈 토크에 함께하지 못했잖아요.
맞아요.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너무 좋다, 꼭 참석하고 싶다’ 그랬는데 못 가서 많이 아쉬웠어요. 그러지 않은 작품이 있겠냐마는 <한국이 싫어서>는 정말 너어어무 열심히 한 작품이거든요. 개봉 날만 기다리는 중이에요.(웃음)
꽤 오래전에 만난 작품이죠?
2019년이었어요. 어느 날 <한국이 싫어서>라는 제목의 시나리오가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았는데, 그때 배우 친구랑 같이 있었어요. 옆에서 듣더니 친구가 “너 유관순인데 한국이 싫으면 어떡하냐” 이러는 거예요.(웃음)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 상영이 마무리될 무렵이었거든요. 배우의 인생은 하나의 길로 규정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받은 기억이 나요.
이 영화의 첫인상이 기억나나요?
첫 대본 리딩을 하러 상암동으로 가던 길도 생각나요. 강변북로인지 올림픽대로인지 어느 구간에 커다란 태극기가 펄럭이는 데가 있어요. 그곳을 지나가면서 내 인생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항거: 유관순 이야기> 직후에는 태극기만 봐도 마음이 이상하게 일렁였는데, 이제는 한국이 싫다고 말하는 인물이 되어야 하는구나.’ 큰 태극기가 펄럭이는 장면을 보면서 아주 복잡한 마음이 들었고, 이 마음을 가지고 촬영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던 것 같아요.
이제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서, ‘계나’라는 인물의 인상은 어땠나요?
무척 반가웠어요. 일단 그간 안 해본 역할이고, 무엇보다 여주인공은 착하고 이타적이고 공감 능력이 높아야 한다는 오랜 편견을 깨는 인물이라는 점에서요. 그건 원작 소설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래서 이 시니컬하고 이기적이며 솔직하고 자존심도 센 인물을 그대로 가져가보자 했어요. 책에서 영화로 옮겨질 때 조금이라도 착해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맞아요. 계나는 자신에게 솔직한 인물이에요. 그런 점에서 고아성 배우와 연결되는 지점이 보이기도 해요. 어떤 선택을 할 때, 자신에게 가장 솔직한 답을 구하는 것 같거든요.
검색하다가 우연히 본 글이 있어요. 어떤 분이 제가 나오는 작품을 믿고 꼭 본대요. 그 이유가 고아성이란 배우를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고아성이 귀신같이 내 취향의 영화를 골라서’이기도 하다는 거예요. 그 말 자체가 너무 재미있으면서 동시에 왠지 만난 적도 없는 그분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럼 그분과 내가 좋아하는 그건 뭘까 고민해보면, 어쨌든 맡는 캐릭터가 유의미한 인간상이라는 것, 그거 하나만은 분명한 것 같아요. 풍경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유하는 사람이길 바라는 거죠. 제가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작품 활동을 하는 건 아니지만, 그런 인물을 만날 때 행복하거든요.
자존심 세고 솔직한 계나를 표현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무엇이었나요?
관객이 계나를 응원하는 마음이 반만 들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계나는 ‘나는 진짜 한국에서 못 살겠어서 떠나는 거다, 외국 병이 든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더 이상 못 견디겠다’고 하고, 남자친구는 ‘그래도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다른 데 가서 다시 시작하는 것보다 여기서 잘해나가는 게 좋다’고 하잖아요. 저는 이 의견이 팽팽하면 좋겠다는 입장이었고, 그래서 두 가지 상반된 의견을 가진 관객을 상상하며 계나를 연기했어요. 한편으로 계나를 연기하는 저로서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컸어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처럼 내내 같이 가는 배우들이 없잖아요. 계나의 흐름이 굉장히 중요한데, 순서대로 찍는 게 아니니까 매번 어떤 감정인지 정해놓고 그걸 끌어올리는 게 중요했어요. 아까 너어어무 열심히 했다고 말했잖아요. 한국과 뉴질랜드, 겨울과 여름을 지나면서도 촬영 내내 그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엄 청 애쓴 작품이에요.
작품을 할 때마다 품는 책이 있다고 들었어요. 애독가로도 알려져 있고요. <한국이 싫어서>에 출연하면서는 어떤 책을 읽었어요?
꽤 오래전이라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감독님께 두 권을 추천해주셔서 읽었어요. 모두 한국을 떠난 사람들이 쓴 이야기예요. 계속 품고 있던 건 영화의 원작인 소설이었고요. 소설에서 계나의 성격이 드러나는 문장들은 따로 써서 늘 가지고 다녔어요. 심지어 뉴질랜드 촬영 갈 때도요. 그 문장들을 계속 품고 연기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여러 매체 중 유독 책을 품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지 궁금해요.
제가 문장에 많이 기대는 것 같은데요. 시나리오는 지극히 특정 범주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위로를 받긴 힘들지 않나 싶어요. 그건 연구와 분석의 대상이니까요. 그래서 뜻밖의 영감을 주는 것을 찾으려고 노력을 많이 하는데, 저에겐 그게 항상 책이더라고요.
그와 반대로 작품 밖으로 나왔을 때는요?
작품을 안 할 때는 익스트림한 걸 좋아해요. 스카이다이빙 같은. 간극이 좀 크죠?(웃음)
‘싫어서’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결국 각자의 행복을 정의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요. 계나의 행복을 고민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도 생각했을 것 같아요.
저는 <한국이 싫어서> 찍기 전에 이미 행복에 관한 개인적인 정의는 내린 것 같아요. 이 영화에서 제시하는 행복은 크게 두 가지인데요. 하나는 남자친구인 ‘지명’ 같은 사람의 행복, 좋은 대학을 나오거나 좋은 곳에 취직하는 그 한 가지 큰 성취만으로 계속 뿌듯한 거죠. 그런데 계나 같은 사람은 그런 것에 영향을 별로 안 받고, 매일매일 조금씩 오는 작은 행복감으로 살아가요. 저는 확실히 계나 같은 사람인 것 같아요.
그럼 계나처럼 나의 행복을 위해서, 혹은 견딜 수 없는 무언가로부터 과감히 떠날 수도 있을까요?
아직 해본 적은 없지만 저 자신이 그런 사람에 가까울 거라 생각해요.(웃음) 지금보다 더 어릴 때는 매일 새로운 일도 생기고 예기치 못한 행복이 찾아올 때도 있었는데요. 그 시간을 지나 30대가 되면서는 발견하는 게 아니라, 행복을 잘 설계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으니,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조금씩 삶을 채우면서 자신을 만들어가야 하는 것 같다고요. 그런데 그 삶이 꽤 멀리에 있다면?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요.
큰 성취가 아닌 매일의 작은 행복감, 그게 생각보다 큰 삶의 동력이 될 때가 있죠.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질문으로 오늘의 행복이 뭔지 물어볼게요.
오늘 촬영이요, 도무지 자신이 없었어요.(웃음) 오랜만이기도 하고, 지금 촬영하는 작품에 맞춰 살을 좀 찌워둔 상태라 걱정을 많이 했어요.
이 유행어를 쓰게 되는 순간이 오는군요. 뭐가 살쪄!(웃음)
아하하. 저도 별로 티가 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사진 찍어보니까 확실히 느껴져요. 영화 촬영장에서 모니터 볼 때도 그랬어요. 제 눈에 유독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웃음) 아무튼 그래서 내내 근심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좋더라고요. ‘있는 그대로 임해도 괜찮구나, 어쩌면 그럴 때 더 즐거운 거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결론은 이 촬영이 오늘의 행복입니다. 확실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