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하지 않은 가능성 속에서 김신록 배우는 자신을 실험한다. 이 실험의 주체이자, 도구이자, 관찰자로서 다양한 가설 앞에 투신한다. 역동적이고, 강렬하고, 의미심장한 한 배우의 찰나.

이어링 Portrait Report.
롱 코트 Dolce & Gabbana, 이어링 Portrait Report.

10월 2일부터 열리는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에 개막작 <전,란>과 온 스크린 섹션 의 <지옥 시즌2>로 함께한다. 영화를 매개로 열린 장소에서 관객을 만나는 즐거움과 설렘이 있을 것 같다.

얼마 전 열린 서울국제도서전에 <배우와 배우가>(2023년에 발간한 김신록 배우의 인터뷰집) 사인회를 하러 갔었다. 도서 인구가 감소하 고, 출판계가 어렵다고 하는데 이번 도서전에 15만 명이 넘는 사람이 다녀갔다 고 하더라. 하도 붐벼 마치 흥겨운 장터 축제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독자’라고만 총칭되던 개인들이 한 명 한 명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지 않나. 영화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3년 전 <지옥>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갔을 때는 아무도 나를 모르니 그저 담담하고 편안한 마음이었는데, 지금은 그래도 영상 매체에 발을 더 깊이 담근 사람으로 참석하려 하니 전보다 더 떨리고, 설렌다.

2021년 <지옥> 공개 당시 ‘지옥의 최대 수혜자’로 큰 대중적 관심을 받았다. 이 작품에 대한 애정도 남다를 것 같다. <지옥 시즌2> 스틸 이미지를 봤는데 헤어스타일부터 외형적 변화가 꽤 있더라. 지금 떠오르는 장면 하나가 있다면 무엇인가?

‘박정자’가 힙해져서 혼란이 일지 않을까….(웃음) 의상과 분장도 범상치가 않았고, 지옥에 다녀온 설정이니 평범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접근했다. 떠오른 한 장면은 ‘김정칠’ 의장이 박정자에게 지옥은 어떤 곳이냐고 물어보는 신이 있다. 이에 ‘지옥은 이런 곳이다’라고 대답하는데, 첫 테이크 후 한참 뒤에 ‘오케이’가 났다. 나중에 들었는데 감독님이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다르게 연기해서 모니터 앞이 술렁였다고 한다. 감독님께서 배우가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셨다. 감사하다. 그 장면을 잘 봐주기 바란다.(웃음)

개막작인 <전,란>에서는 굳센 의지를 지닌 의병 ‘범동’으로 등장한다. 비슷한 시기에 만나게 될 두 캐릭터가 극명히 다르다. 김신록 배우가 펼쳐낼 연기 차력쇼를 보게 될 것 같아 기대가 크다.

나 역시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품고 있다. 장르와 시대부터 너무나 다른 세계관을 가진 작품이라.

<마리끌레르> 10월호와 <마리끌레르 BIFF 특별판>에 <전,란>의 김상만 감독도 함께한다. 범동은 세상을 보는 관점에 차이를 주는 사람이라고 들었다. 배우에게는 범동이라는 인물이 어떤 이로 다가왔나. 모든 과정이 지난 지금, 범동에게 새롭게 보이는 것도 있나?

연기하기 전에는 범동을 무식하고 단순해서 오히려 눈이 밝은 사람이라고 봤다. 시나리오상에서는 글로 세상을 배운 이들과는 다른 통찰을 지닌 사람이라는 게 중요한 부분이었다. 한데 시사를 보고 나니 통찰이 있고, 눈이 밝다는 것 보다는 선하고 용감한 보통 사람으로 더 다가온다. 사상이나 사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입고, 먹고, 자고, 삶을 살아내는 데서 축적한 앎에 기대는 사람인 것이다. 왜 과거 금 모으기 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을 두고 국가주의나 전체주의에 선동된 우매한 대중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범동을 통해 자신의 금을 내어놓아서라도 소중한 것을 지키려 했던 시민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해보려고 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순수하고 깨끗하고 용감한 마음을 그려보려 했던 것 같다. 할 수 있는 것이 이것 밖에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 그냥 앞뒤 없이 몸을 바치는 사람. 범동은 정말 계속 발을 동동 구른다.(웃음)

<지옥 시즌2>와 <전,란>을 지나오며 영상 매체가 지닌 즐거움을 새삼 충분히 느꼈는가?

시기별로 연기에 대한 생각이 변화하는 편인데 비슷한 생각을 하던 시기에 두 작품을 촬영했었다. ‘무엇이 연기다’, 혹은 ‘세계와 이렇게 만나는 것이 지금의 나에게 유효한 연기다’ 하는 생각이 때마다 달라지는데 두 작품을 찍던 시기에 유사한 생각을 했던 거다. 두 작품은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고, 다 른 릭터로 인해 그 발화 역시 다르지만 기본적으로는 같은 태도와 방식으로 접근한 것이다. 그래서 궁금하다. 같은 태도로 임한 완전히 다른 두 역할이 어떻 받아들여질지 이 결과를 나도 지켜보고 싶다. 나라는 인간이 어떻게 작동했고, 앞으로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런 면에서 중요한 시기다. 테스트 보드 같다.

연기에도 시절이 있다는 말인가?

나는 그렇다. 그래서 영상 매체에서는 촬영 당시의 나와 공개 당시의 내가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거다. 지금의 나라면 두 역할을 또 다르게 연기할 수도 있겠지만, 이 시차를 바라보는 것도 흥미롭다. 영상 매체는 이 시간차를 실감하는 일 같다.

두 작품에 임하던 때에 연기에 대한 생각과 태도는 어떠했던 것 같은가?

과거 <지옥>을 촬영할 때는 감각에 의해 되어지는 몸에 꽂혀 있었다. 내가 주도적으로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에 의해 연기가 ‘되어’지는 것이라 생각 했었다. 그 반면에 <지옥 시즌2>와 <전,란>을 촬영할 때에는 적극적으로 ‘하기’ 에 집중해 내 쪽에서 활력을 가지고 무언가를 해본 시기다. 이 태도가 영화라는 매체성, 두 작품 각각의 장르성, 구조와 세계관이 극명한 이야기 안에서 어떻게 담길지 궁금하다.

연기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재정립하는 과정에서도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인터뷰 집 <배우와 배우가>를 출간하고, 일인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로 무대에 오르 고, 지난 8월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직접 연출을 맡고 연기까지 한 <없는 시간>도 공연했다. 지금은 드라마 <언더커버 하이스쿨>을 촬영 중이지 않나. 가능한 일인가 싶다.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 건가?

음… 어제 친척 한 분이 돌아가셔서 일정을 마치고 밤에 장례식장에 갔었다. 막냇동생과 제부는 직장 생활을 하는데 본인들은 야근이라 밤 10시 30분이 돼야 도착한다고 했다. 동생은 중간에 컵라면을 먹었는데 제부는 그때까지 밥도 못 먹고 일을 해 손을 떨면서 육개장 두 그릇을 먹더라. 이렇듯 성실하게 삶을 꾸리는 사람들이 해나가는 일에 비하면 나의 일은 그에 못 미친다는 생각이 든다. 일의 종류는 다를 수 있지만 특별히 내가 그들보다 일이 많고 바쁜 게 아닌 거다. 다종다양하게 일을 하고 있지만 절대적인 일의 양, 투신하는 시간은 평범하다. 그러므로 더 해야겠다?(일동 웃음)

다종다양함을 추구하며 새로운 곳에 자신을 보내는 일이 동반하는 긴장과 피로에서는 자유로운 편인가 보다.

근데 나는 되레 두 번 보는 걸 못 한다. 두 번 본 영화도 두 번 읽은 책도 거의 없다. 새로운 것을 알고,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강하다. 깊이 없이 계속 앞으로 가보는 건데…(웃음) 다행히 연기가 인생의 큰 주제로 자리 잡은 덕분에 연기라는 스펙트럼 안에서 많은 것을 바라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어떤 깊이가 생긴다면 다행일 테고. 다양한 세계를 만나고 겪는 걸 기질적으로 좋아하고, 크게 어렵지 않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긴장이나 피로가 있기도 하지만 이를 감당하는 것 또한 성정에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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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도가 연기에 대한 생각과 태도에도 영향을 준다고 믿는가?

완전히 주고받는 것 같다. 연기에 대한 생각이 이런 다종다양한 삶을 만들어내고, 동시에 이런 삶의 태도가 연기에 어떤 통찰을 주기도 한다. 접점을 넓히는 일이 결국 연기와도 연결된다. 왜 구겨진 종이가 접촉면이 훨씬 많지 않나. 삶의 접촉면이 넓을 수록 연기적으로 작품, 인물을 만날 수 있는 면적 또한 넓어진다. 이 효용을 믿기 때문에 어떤 일이 들어오면 해보는 거다. 한편 이런 생각도 든다. 최근 넷플릭스 시리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의 윤계상 배우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인물의 감정에 내가, 나의 마음으로 진실되게 가닿아보려 하는, 연기의 부산물들을 다 걷어내고 ‘가장 나종 지니인’ 순수한 핵심에 다가가고자 하는 연기를 그를 통해 봤다. 다양한 일을 접하고 휩쓸려 다니다가도 이 모든 다종다양함을 걷어 냈을 때 나 역시 그 안이 빛났으면 한다.

되레 나는 방금 이야기한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순수한 핵심’을 지난 겨울 연극 <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에서 목격했다. 김신록 배우가 배우로서 끝내 놓지 않으려는 것 이 무엇인지 고스란히 전해지더라.

순수한 핵심에 다다르는 연기가 반드시 무대를 통해서만 성취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연기가 무엇일까’ 계속 자문하는 이유도 연기에 대한 생각도 접근법도 자주 변화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때는 좀 붕 뜨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포장과 기술, 온갖 미사여구를 다 걷어냈을 때 가장 나중에 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싶고 붙들고 싶어진다. 그래서 계속해서 질문하는 거다.

1백 분 동안 홀로 16개 배역을 소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배우가 벼랑 끝까지 자신을 보내는 결연한 마음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다.

내 기준에 좋은 공연이란, 앉아 있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공연이다. 무대에서 배우가 얼마만큼 심신으로 힘을 쓰고 있는지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래서 연습이 잘 안 될 때마다 다른 공연을 보러 간다. 좋은 공연을 보고 나면 ‘그래, 저 정도 해야 무대를 일으켜 세울 수 있지’ 하고 새삼 느낀다. 그렇게 담금질을 하고 연습실로 돌아와 다시 연습을 한다. 봄으로써 할 수 있게 되는 거다. 예술의 힘은 그걸 접촉한 사람에게 그 활력이 전이되는 데 있다. 다가오는 10월, 그런 전이가 일어날 부산국제영화제에서….(일동 폭소)

오는 9월 말에는 한 문화 프로그램의 연사로 대중을 만난다. 타이틀이 ‘미싱 하프-세컨즈’라고?

‘잃어버린 혹은 도래할 0.5초’라고 캐나다 철학자 브라이언 마수미(Brian Massumi)가 주창한 개념을 담은 용어를 타이틀로 삼았다. 자극과 반응 사이 유예된 0.5초의 시간을 말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전구에 불이 들어오면 박수를 치세요’ 하고 대뇌피질에 전기 자극을 주는 실험을 했을 때 전구에 불이 켜지면 0.3초 만에 뇌가 활성화되고, 박수를 치기까지는 0.2초가 더 소요된다고 한다. 이때 뇌파를 보면 ‘번쩍’ 하고 신호가 켜지는 게 아니라 짧은 시간 동안 자극이 좌악 하고 뻗어나가고 펼쳐지며 뇌가 활성화되는 거다. 연기로 치면 자극과 반응 사이에 일어나는 시간인 거다. 이는 곧 어떤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곧이곧대로 박수를 칠 수도, 완전히 다른 리액션을 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결정이 내려지기 직전, 모든 것이 유예돼 있는 가능성의 시간인 거다. 모든 선택의 순간들, 아주 미시적인 선택의 순간들에 대한 좋은 통찰인 것 같아서 타이틀로 잡았다. 아마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될 것 같다.

가능성이 유예된 순간이라는 관점에서 요즘 김신록 배우의 다종다양과도 연결되는 것 같다.

‘그렇게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면 그런 일들이 막 일어나지 않나. 좋은 마음 먹기가 얼마나 힘이 드는가. 좋은 마음 먹어야겠지.(웃음) (인터뷰에 동석 한 매니지먼트 관계자가 덧붙인다) 그래서 <SNL 코리아>에도 출연하시고.

심사숙고해야 하는 거 아닌가.(웃음) 그렇지만 너무 잘할 것 같다. 벌써 모습이 그려진다.

톤을 잘 찾아야 하는데.(웃음) 근데 왜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보는가?


밈이 만들어지니까. 그 밈이 배우를 귀엽고, 재미있고, 친근하게 느껴지게 하지만… 그렇지만… 그 당사자가 김신록 배우라면 ‘내 배우 지켜’ 하는 마음이 먼저 든다.(웃음)

그건 우리 팬들의 마음인데. 자주 ‘내 배우 자중해’ 하고.(웃음). 그래도 나는 늘 새로운 곳으로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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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와 힐 모두 Ferragamo,큐빅 드롭 이어링 Mati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