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내면을 캔버스 위에 드러내는 것. 무의식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기예르모 로르카(Guillermo Lorca)의 첫 번째 아시아 개인전을 서울에서 만났다.


탕 컨템포러리 아트 서울에서 열린 한국 첫 전시를 축하한다. 과거 아시아에 진출하는 것이 목표라 말했던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나?

이제 세계적인 무대가 아시아에 있다고 느낀다. 한국을 포함한 많은 아시아 국가는 무한한 잠재력을 품고 있지 않나. 또한 예술에 대한 뜨거운 열기를 보여주고 있다. 전시 오프닝 전에는 문화 차이가 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우리가 그림을 통해 소통할 수 있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전시 제목 <The Shine in the Other Room>에는 어떤 의미를 담았나?

내 작업은 기본적으로 섬광처럼 반짝이는 순간에서 시작된 다. 마음 한구석에서 터져 나오는 불꽃 같은 게 있는 데, 그것을 계속 들여다보며 퍼즐을 맞춰나가고 있다. 또 이번 개인전에는 ‘방’이라는 공간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작품이 많다. 예를 들어 ‘The Boy’s Room’이나 ‘Her New Dress’는 벽에 난 구멍을 통해 숨겨진 방이 드러나고, 그것이 과거의 한 시대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다른 방’에서의 ‘빛’이라는 의미를 담아 <The Shine in the Other Room>이라고 이름 지었다.

어린 소녀와 동물이 지속적으로 작품에 등장한다. 그들이 작가에게 어떤 존재이기에 꾸준히 캔버스에 등장하나?

고대 신화를 보면 신이나 악마가 인간의 본능을 상징하는 존재로 드러나지 않나. 그와 비슷하게 내 그림 속 소녀와 동물도 깊은 내면의 충동을 의미한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들은 평화를 가져다주고, 희망을 상징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녀와 동물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사실 이들이 내 의도와 상관없이 저절로 생겨났다는 생각이 든다.

자주 사용하는 분홍색과 파란색에 대해서도 묻고 싶다. 두 색이 어우러졌을 때 나타나는 오묘한 분위기가 인상적인데, 이 조합을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두 색이 함께 있을 때 내 기분이 좋아진다.(웃음) 바로크 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황토색 과 대비된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The Kiss of Artemis’에서는 흙탕물 속에서 아이가 사슴에게 입맞춤을 하는 비극적이고도 서정적인 장면에서 두 색이 미묘한 단절감을 더한다. 이와 동시에 건조한 톤으로 표현된 나머지 부분과 대비를 이루기도 한다. 최근 내 작업에서 두 색을 많이 사용한 건 사실인데… 글쎄, 나도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웃음) 다만 미술계 전반에서 잊혔던 로코코 예술가들과 그들의 팔레트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는 변화의 흐름을 느낀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것을 지향하는 동시대 분위기와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당신의 작품 세계에는 여러 상반되는 요소가 공존한다. 아름다운 것과 그로테스크한 것, 초현실적 풍경과 사실주의적 화풍, 순수와 에로티시즘 같은 것 말이다. 이런 것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어떤 효과를 낼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내 작업은 서로 상반되는 요소, 방금 언급했듯이 아름다움과 그로테스크함, 순수와 에로티시즘 사이의 긴장을 다룬다. 이는 단순히 시각적 효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담긴 이중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애초에 인생 자체가 모순으로 가득하지 않나.(웃음) 양극단의 가운데에서 우리는 그 이면에 있는 것을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Guillermo Lorca, ‘The Encounter’, Oil on Canvas, 200×229cm, 2018~2019

작품이 동화 같은 신비하고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지닌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이전에 “작품을 통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보존하려 한다”라고 말했던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자라면서 많은 감정을 잃어버린다. 다양한 경험이 쌓이면 우리가 지니고 있던 원초적 감각들은 서서히 흐려지기 마련이다. 어릴 때만 느낄 수 있는 그 신비롭고 마법 같은 느낌이 점차 사라질 것을 알지만, 그림을 그리며 그것을 가능한 한 보존하려 한다.

어린 시절의 기억뿐만 아니라 무의식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탐구해왔다. 이 시간이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나? 억눌린 감정을 풀어내는 데 도움이 되었나?

일단 프로이트의 억압 이론(인간의 무의식이 고통스러운 기억이나 충격적 경험, 또는 사회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욕망과 감정을 억누르고 숨긴다는 개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좋든 나쁘든 자신에게 감정적으로 강렬했던 순간을 더 생생하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가장 흥미로운 건 작업을 하며 그런 기억을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강렬한 순간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그림 안에 담아내다 보니 세상을 들여다보는 관점도 사뭇 달라졌을 듯하다. 작가로서 삶을 살아내는 방법 자체도 대중과는 차이가 있을 듯한데 어떤가?

작업할 땐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 사이를 떠돌며 시간을 보낸다. 하루 종일 책을 읽거나 강의를 보며 공부하기도 하는데, 그 시간이 참 좋다.(웃음) 그리고 며칠간 아무도 만나지 않다가 갑자기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지내는 데도 익숙한데, 이 과정에서 친구나 가족과 이야기를 나눌 뿐만 아니라 나 자신과도 무수한 대화를 하게 된다. 다만 우리 모두가 깊고 풍부한 내면 세계를 지니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사회구조나 상황 때문에 그걸 말하거나 꺼내 보일 기회가 부족할 뿐.

전시 서문에 당신이 “그려져야 할 가치가 있는 그림을 탄생시킨다”라는 문장이 있다. 스스로 생각하는 ‘그려져야 할 가치가 있는’ 작품이란 무엇인가?

앞서 말한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마음 깊숙한 어떤 곳을 건드리는 낯선 느낌이 있어야 그림으로 그릴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 그게 내가 수많은 가능성과 다양한 화풍 사이에서 유일하게 의지하는 기준이다. 나는 항상 작업하기 전에 신중하게 계획을 세우는데, 작업하다가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예 그리지 않거나 수정한다. 이 과정을 무수히 반복하다 보면 결국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그려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그럼 스스로 예술가로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나는 야망이 크다. 죽기 전까지 꼭 아름다운 무언가를 남기고 싶고, 내 눈으로 직접 그것을 보고 싶다. 아주 솔직히 말하면,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 자체가… 꽤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고.(웃음)

마지막 질문이다. 만약 당신의 작품 속 세계가 실존한다면, 그곳에 살고 있는 여러 존재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싶나?

스스로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며, 때로는 현실의 고단함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자신을 외면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내면의 목소리를 듣거나, 다른 해석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것처럼 가벼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이 인간인지, 동물인지, 그도 아닌 그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이런 말을 전해주고 싶다.(웃음)

기예르모 로르카, <The Shine in the Other Room>
기간
| 2024년 8월 31일~10월 12일
장소 | 탕 컨템포러리 아트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