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이 더 힘들어
업무도 나와 맞지 않고 사람들과도 잘 지내지 못해 회사를 관두기로 했다. 아무도 모르게 하반기 신입 공채 시험에 올인했고 몇 군데는 서류심사까지 통과했다. 이제 슬슬 면접도 보러 다녀야 하는데 이 회사가 날 놔주지 않는다. 그만두겠다고 얘기한 지가 벌써 한 달. 여전히 회사는 퇴직 절차에 따라 인사팀 면접, 팀장 면접, 임원 면접 등을 줄줄이 해야 한다는 원칙을 내세우고, 나는 아직 회사를 떠나지 못했다. 게다가 같은 팀 선배들은 툭하면 “너 지금 관둔다고 일을 이런 식으로 하는 거냐”며 비아냥거린다. 그깟 1년, 버렸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이력서에 적지도 않았다. 당장 내일이 면접인데, 그냥 휴가계 던지고 나가버릴 것이다. (L. 전자회사)
미래를 위한 선택
한 의류회사에 입사해 마케팅팀에 배정됐는데 업무가 내가 기대하던 것과 많이 달랐다. 회사에서 열심히 배운 다음에 서른 넘어서는 사업을 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좀 더 작은 회사에서 소비자와 직접 부딪치며 현장 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회사를 관둔 후에는 6개월간 회사에 다니며 모은 돈으로 여행도 다니고 제법 재미있게 지냈다. 그러다 작은 광고 관련 회사에 취업했다. 회사 규모가 크지 않아 이전 직장에서의 짧은 경력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시 나 자신이 기계의 부품처럼 느껴지던 대기업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A, 광고 에이전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경력
식품회사의 영업팀에 들어갔다. 마트의 시식 코너에서는 한 달간 손가락 마디마디 소시지 냄새가 배도록 열심히 일했고 매일 새벽 5시 반에 출근했다. 사무실로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영업을 배울 수 있으리라 기대했는데, 웬걸 아무도 나에게 업무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선배들을 부를 때 꼬박꼬박 ‘님’을 붙여야 하고 군대처럼 ‘다나까체’로 말해야 하는 이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에게 아무도 사수가 되어주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과연 내가 이 회사를 오래 다닐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대답은 No. 1년을 10년처럼 버틴 내 첫 직장을 관둔 건 지금 생각해도 정말 잘한 일이다. 어제 입사 동기한테 전화가 왔다. 내일은 동네 슈퍼와 마트를 돌아다니며 제품 스무 상자를 파는 미션을 받았단다. 관두길 백번 잘했다. (P, 물류회사)
버티면 변한다
입사하고 처음 발령받은 부서에서 배정받은 사수가 문제였다. 늘 아침 7시 30분이면 책상 앞에 앉아 있길 원했고, 팀장이 퇴근했는데도 사수가 자리를 지키고 있어 난 늘 하는 일 없이 야근을 해야 했다. 그런데 한번 싫다고 생각하니까 그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터졌다. 나와 다른 선배 한 명이 차를 타고 가다가, 선배가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받았는데 사수가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야, 걔는 좀 더 괴롭혀야 해.” 세상에. 지금보다 더 괴롭히겠다니. 결국 홧김에 사직서를 던졌다. 분명 금세 다른 곳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줄기차게 지원했지만 매번 낙방. 결국 지금의 회사에 입사했다. 연봉은 훨씬 깎였고, 복지 혜택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더 억울한 건, 내가 그토록 미워하던 사수가 회사를 옮겼다는 거다. 절이 싫어 떠난 게 아니라 같이 있는 중이 싫어 떠났다가 망했다. (M, IT 회사)
불안, 초조, 긴장
돌이켜 생각해보면 왜 첫 직장에서 버티지 못하고 박차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냥 재미가 없었다. 일단 관두고 여행도 다니면서 실컷 놀고 싶었다. 호기롭게 관뒀다. 그런데 대학에 다니면서 취업을 준비할 때와 또 다른 불안감이 들었다. 어느 곳에도 속해 있지 않다는 건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미생>에 장그래가 출근하는 사람들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장면이 나오지 않나. 딱 그런 기분이었다. 나만 다른 길을 가는 느낌. 여행을 가긴커녕 급하게 다시 구직 활동을 시작했다. 이것저것 따질 것도 없었다. 월급은 적어졌고, 회사 분위기도 이전 회사보다 훨씬 안 좋고, 동료들에게도 정이 안 가지만 벌써 2년 넘게 버티고 있다. 회사를 관둔 후의 불안함을 견딜 수 없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S, 출판사)
주홍글씨
첫 직장을 10개월 만에 관두고 나왔다. 그래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다른 회사에 취직했다. 그런데 두 번째 직장은 6개월 만에 관뒀다. 믿기지 않겠지만 결단코 내 잘못이 아니다. 처음 다닌 회사는 월급이 제때 나오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관뒀다. 두 번째 회사에서는 아주 이상한 상사를 만났다. 현장에서 뛰는 건 나인데 늘 나한테 의미 없는 지시만 내렸다. 그러고는 늘 이렇게 덧붙인다. “넌 왜 그걸 못하니? 내가 할 때는 안 그랬어.” 그럴 때마다 속으로 생각했다. “그랬겠지. 20년 전이니까.” 그래서 관뒀다. 그런데 다른 회사에 입사시험을 볼 때 채 1년도 되지 않는 경력이 연이어 두 개가 있으니까 나를 문제 있는 사람으로 보는 곳이 많았다. 이력서에는 경력과 근무 기간만 표시할 뿐 퇴사 이유는 적을 수 없으니, 난 그저 억울할 따름이다. (K, 무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