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금요일 새벽이었다. 나는 맥주를 마시며 TV 속 축구 경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여자친구 J가 이불을 뒤집어쓰며 소리 좀 낮추라고 말했다. 나는 재빨리 볼륨을 낮추고 그녀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 “미안, 좋은 꿈 꿔.” 그러자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나 정말 피곤해.” J는 요즘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연애 초기의 J는 씩씩하고 발랄했다. 둘 다 취준생이던 우리는 가난한 만큼 적게 먹고, 튼튼한 만큼 많이 걷는 데이트를 즐겼다. 당시의 그녀는 결코 지치지 않았다. 영화는 조조로 봤고, 오후엔 무료 전시회를 다녔으며 밤이면 숙박 대신 대실을 선택하곤 했다.
몇 개월 뒤, J가 취업에 성공했다. 그녀는 내게 성공의 노하우를 전수하고 싶어 했다. 이력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무언지 짚어줬고, 내가 쓴 자기소개서를 상세히 검토했다. 가끔은 답답해하면서 내가 쓴 문장들을 지우고 직접 써주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난 자존심이 상했다. 신입사원 J는 나를 만날 때마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한 것까지 이야기했다. 팀장의 꼰대 마인드를 비난했고, 과장이 무책임하게 일을 떠넘긴다며 분노했다. 학교에서 돌아와 엄마에게 모든 일을 털어놓는 어린아이처럼 사소한 것부터 디테일한 업무까지 이야기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그녀의 고충을 묵묵히 들어줬다. 그런데 어느 날, J가 내게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더 이상 힘든 일을 내게 털어놓을 수가 없다고 덧붙이면서 말이다. 이유가 무어냐고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너는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이 더 많으니까.” 그녀의 말이 맞다. 나는 사내 정치가 얼마나 힘든지, 회식 스트레스가 얼마나 큰지 알 수가 없었다. J는 회사생활의 고충은 회사원들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담담한 목소리로 그런 얘길 꺼내는 그녀의 모습에 불쑥 화가 치밀었다. 아니, 억울했다. 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밥풀 묻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이날 저녁 밥값은 J가 계산했다. 내게 다 잘될 테니 걱정 말라며 많이 먹고 힘내라고 했다. 여자친구가 밥값을 내는 날이 잦아질수록 나는 점점 더 작아졌다. 내가 투정 부릴 때면 J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토라진 날 두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나는 J를 사랑했지만 철이 없었다. 남자의 경제력은 곧 그 남자의 미래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나는 미래가 없다. J를 만나는 일이 점점 더 괴로워졌다. ‘그녀도 다른 여자들처럼 애인의 차를 타고 집에 가고, 근사한 호텔 레스토랑에도 다니고 싶겠지? 든든하게 결혼 자금을 마련해둔, 아파트 청약통장을 준비해둔 남자를 만나야 더 행복해질 거야’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녀에게 짐이 되진 않을까 걱정됐다. 한편으로는 내게 이런 자괴감을 느끼게 하는 J가 미웠다. 혼란스럽고 슬펐다.
어느 날 J는 내가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회사들, 도전해볼 법한 자리들을 추천해줬다. 화가 났다. 나는 그녀의 친절한 권유를 강요로 받아들였다. 결국 그녀에게 짜증을 부렸다. 몇 시간 뒤 J는 기다리다 보면 다 잘 풀릴 거라며 나를 다독거렸다. 나는 현실적인 조언을 하는 J에게 허황된 이야기로 답했다. “취업은 힘들 것 같아. 그런 전쟁터에 뛰어들고 싶지 않다고. 대학원에 갈까? 이참에 공부를 더 하지 뭐. 아니면 다시 소설을 써볼까? 영화 시나리오를 써서 잘되면 평범한 월급쟁이보다 훨씬 더 많이 벌 수 있다던데. 어차피 취직해도 다들 금세 뛰쳐나오더만.” J는 내 허무맹랑한 투정을 경청했다. 웃어주고 공감해줬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내게 회사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대신 J는 회사 사람들과 자주 술을 마셨다. 거래처 사람을 만나는 날도 있었고, 불금에 회식을 할 때도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내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
J가 회사생활에 익숙해지고 나는 백수 생활이 무감각해질 때쯤, 내 생활 패턴은 온전히 J의 스케줄에 맞춰져 있었다. 그녀의 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 앞 카페로 찾아가 그녀를 기다리면서 이력서를 쓰기도 하고, 책을 읽거나 휴대폰 게임을 하기도 했다. J가 약속이 있어서 만날 수 없는 날에는 방학 맞은 학생처럼 모든 일을 제쳐두고 친구들을 만났다. 혹은 집에 틀어박혀 게임만 하는 날도 있었다. 매일이 일요일이었다. 내가 무책임해서 백수가 된 건지, 백수여서 무책임해진 건지 헷갈렸다. 그렇게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다 보면 J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는 회식이나 모임을 끝내고 술에 취한 채로 내 자취방에 찾아오곤 했다. 다음 날 출근하기 가깝다는 이유에서였다. J와 익숙한 섹스를 하고 나서는 나는 다시 게임을 하고 그녀는 피곤하다는 말을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그렇게 우리의 설레고 뜨거웠던 시절이 지나갔다.
J가 대리로 승진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내 취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내가 이해를 하건 못 하건 상관없이 그녀는 다시 회사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매우 피곤하다는 불평과 함께. 난 공감할 수 없어 지루하지만 그냥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는 J의 월급날마다 고급진 데이트를 하고, 그녀가 늦게까지 회식을 하고 내 방에 온 날엔 섹스를 한다. 무능력한 남자친구라는 열등감은 사라졌다. 아니, 익숙해졌다. 현재 그녀의 마음이 어떤지는 모르겠다. 나는 돈 버는 여자친구를 둔 백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