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왜!” 고개를 숙이고 소리를 질렀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또 먹혔다. 나는 호날두로 분해 플레이를 하고 있는데, 연달아 졌다. 이길 수가 없었다. 이상했다. 화면을 뚫어져라 봐도 나의 패스는 번번이 상대 수비수에게 끊겼 고, 친구 놈은 드리블로 나를 농락하며 골을 넣었다. 나는 지는 게 싫다. 너무 싫어서 화가 날 정도였다. 하지만 모두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특히 여자친구에게는 더더욱 그러기 어렵다. 그녀는 내가 화를 낼 수 없게 하니까.
그녀가 처음부터 어려웠던 건 아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1년 하고 한 계절 전 그녀는 어린 고양이 같았다. 쓰다듬어주길 기다리는 듯, 애처로운 눈빛과 소소한 애교로 내 마음을 녹였다. 수은처럼 녹아버린 내 마음은 그녀를 만날 때마다 온도가 높아졌다. 하지만 나는 달아오를수록 말수가 줄었다.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나이를 먹어도 쑥스러웠다. 나는 질문보다 대답을 많이 하는 남자친구였다. 그 대답도 매우 짧거나, 느리거나,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을 감았다 뜨는 것으로 대신했다. 왜냐하면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농담에 어떻게 반응해야 그녀가 웃을지 생각했다. 그렇다고 매끄러운 알고리즘을 거쳐 적당한 답변을 토해내는 건 아니었다. 생각할 마음만 먹을 뿐 머릿속은 재부팅되고 있었다. 가벼운 시사 이야기를 나눌 때도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며 내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빙빙 에둘러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의사 표현 방식을 선호하지는 않았다. 아니, 매우 싫어했다. 그녀는 직설적인 대답을 원했다. 내가 상황과 분위기, 30분 뒤 그녀의 감정 상태를 고려한 대답을 찾는 동안 그녀의 수은은 온도를 높였다. 그녀는 나의 다정함이 지루함으로 바뀌고 있다고 얘기했다. 내가 한숨을 쉬고, 내 마음을 선량하게 변호하기 위한 답변을 찾는 동안 그녀 역시 한숨을 쉬었다. 먼저 가겠다는 그녀를 지하철 개찰구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리고 나의 호날두는… 공격을 못 했다.
“착하면 안 돼.” 친구는 시소에 쭈그리고 앉아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 핥으며, 착하게 살면 바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 앞에만 서면 작아졌다. 그녀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게 됐다. 무엇을 먹을지, 먹고 나서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그녀의 의견을 구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점차 우리 관계에서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독단적으로 결정했다. 나는 그녀가 먹고 싶은 걸 먹었고, 초특급 SF 액션 블록버스터 에로 무비 대신 유럽 예술영화를 관람했다. 그녀의 회사 앞에서 그녀를 픽업하고, 집까지 모셔다드리는 것 역시 내 업무 중 하나였다. 카톡으로 데이트 신청을 하고, 밥은 먹었는지 물어보는 것 역시 내 중요한 일과였다. 카톡이 소홀해지면 그녀는 애정이 식었다고 했고, 그럼 나는 준비한 대답이 없어 머릿속에서 새로운 알고리즘을 짜야만 했다. 아기 고양이 같던 그녀는 너무 빨리 맹수가 되어버렸다. 내가 그녀의 눈치를 보는 동안, 그녀도 나를 생각할까? 더 좋아하는 사람이 ‘을’이라는데, 내가 더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연애는 그녀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나는 단지 수평적인 연애를 원했을 뿐이다. 드라마에서 말수 적은 남자는 묵직한 카리스마가 있는 존재인데, 왜 나는 가벼운 남자친구인가? 그녀 역시 내 눈치를 보게끔 만들고 싶었다. 갑과 을의 관계를 청산하고 동등한 연인의 관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저 솔직해지기로 했다. 이기적인 나쁜 남자가 되기로 말이다. 기분이 상하면 기분 나쁘다고 말하고, 운전대를 홱 꺾으며 짜증을 내기도 하고, 삐치면 말을 안하기도 했다. “그럴 필요 없어. 안 어울려.” 나의 치밀한 행동들은 모두 그녀에게 읽혔다. 이쯤에서 화를 내야 정상이겠지만, 나는 역시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녀가 다시 고양이로 돌아오기를, 머리를 들이밀며 사랑해달라고 애원하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엄숙히 콧김을 내뿜는 맹수였다. 그녀는 덧붙여 말했다. 솔직하라고, 감정을 표현하고, 말을 하라고. 그녀는 우리 관계의 기울기를 수평으로 되돌릴 방법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 기다렸던 것이다. 우리가 마음을 터놓을 관계에 이르기를 말이다.
나를 드러낸다고 해서 그녀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떠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나는 대단한 사람도 아닐뿐더러 솔직한 내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란다. 우리는 그동안 참고 억누르는 관계를 지속해왔다. 조금 더 감정을 드러내는 솔직한 사람이 갑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더 솔직해질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