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간 과거의 어느 한때를 찬찬히 머릿속에 떠올려본다. 그 순간 들려오던 일상의 소리, 코끝에 감돌던 공기, 그리고 눈앞에 비치던 햇빛의 잔상이 조금씩 되살아나면서 당시에 느꼈던 감정까지 생생하게 그려진다. 사진가 사르커 프로틱 (Sarker Protick)의 사진을 마주하면 이처럼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둘 맞춰지는 듯한 묘한 감상이 든다. 방글라데시 출신의 젊은 사진가 사르커 프로틱 은 사라지기 직전의 것들을 사진에 담는다. 이제는 세상을 떠난 그의 조부모와 함께했던 시간과 그들의 흔적이 묻은 공간을 담은 작품 시리즈 ‘What Remains’, 전 세계 상업영화들의 틈에서 설 곳을 잃어가는 방글라데시 영화계의 모습을 그린 ‘Love me or Kill me’, 그리고 거대한 파드마 강(Padma River)의 물살에 침식되어 무너져버린 작은 마을과 그곳 사람들의 삶을 담은 ‘Of River and Lost Lands’. 사진가 사르커 프로틱 이 포착하는 사진 속 피사체들은 모두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거나, 서서히 사라져가는 것들이다. 하지만 흐릿한 빛을 고루 머금은 그의 사진에는 소멸하는 것들의 아련한 감성이 마치 시간을 멈춰놓은 듯 생생하게 살아 숨 쉰다.
사진가 사르커 프로틱(Sarker Protick)
2012년 국제 사진 예술계에 처음으로 등장한 사진가. 2014년 영국의 유서 깊은 사진 예술 매거진 에서 ‘주목해야 할 사진가’로 선정되고, 미국의 유명 매거진 <PDN(Photo District News)>에서 ‘올해의 사진가 30인’ 중 한 명으로 뽑히며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2014년과 2015년 두 해에 걸쳐 세계 보도사진 어워드(World Press Photo Award)에서 수상하며 현재 가장 주목받는 포토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그의 사진 작품은 <뉴욕타임스>, <리버레이션>, <내셔널 지오그래픽> 등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볼 수 있다. http://sarkerprotick.com/
사진가 사르커 프로틱 INTERVIEW
어떻게 사진가가 됐나? 대학에 다니던 어느 날, 카메라가 달린 휴대폰을 갖게 됐다. 그때가 내 생애 처음으로 카메라라는 도구를 접한 때다. 강의실에 앉아 있다가 커튼 사이로 햇빛이 반짝이는 모습을 찍었는데 그것이 내 첫 사진이다. 그날 이후로 사진의 매력에 푹 빠져 작업해오다 직업으로 삼게 됐다.
작품에 대한 영감은 주로 어디서 받는 편인가? 새로운 지역이나 낯선 공간을 찾았을 때 느끼는 감정이 가장 강력한 영감이 된다. 새로운 공간에서 사람들을 사귀고, 그곳의 분위기에 녹아들면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매 순간 느껴지는 감성에 푹 빠져 자연스럽게 작업을 시작하게 되는 과정을 즐긴다.
빛이 퍼지는 듯한 효과와 파스텔 톤의 색감이 돋보이는 사진들이다. 렌즈의 조리개를 최대한 조여 빛이 조금씩 서서히 스며들게 하고, 노출 시간을 늘리는 기법을 주로 사용한다.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는 쨍쨍한 날보다는 흐린 날에 작업하는 걸 선호한다. 구름과 안개가 잔뜩 낀 날의 하얗게 번지는 햇빛을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눈에 보이는 색을 그대로 옮기 기보다는 카메라 앞에 놓인 광경의 감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색감을 선택하고 사진에 담는다. 화가들이 자신만의 색으로 채운 팔레트의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듯, 사진가 또한 렌즈로 투영되는 빛을 통해 저마다의 색으로 팔레트를 채워 사진을 찍는다.
예술적인 영감은 물론, 철학적인 메시지까지 담아낸 사진들을 선보인다. 또한 환경과 사회에 대한 이슈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도 느껴진다. 나는 사진을 찍는 사진가이기 이전에 나만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과 현실에 대해 소신 있게 표현하는 작가이고 싶다. 사진이란 작가가 메시지와 의도를 표현하는 하나의 매개체일 뿐이다. 문학이나 음악, 미술처럼 말이다.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이미지보다는 작가의 고민을 거쳐 찾은 예술적 요소를 더해 감상의 여지를 두는 사진 작품을 선호한다.
당신의 조부모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사진 시리즈 ‘What Remains’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나? 작업을 진행하면서 어떤 기분이 들었을지 궁금하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시작한 작업이다. 그들의 집에 머물며 작업을 시작했는데 막상 함께 지내다 보니 공유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별로 없었다. 오랜 시간 떨어져 있기도 했고, 세대 차이가 느껴지기도 했다. 근사한 사진을 찍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들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 일 또한 중요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나이 들어가는 것, 그리고 죽음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을 기록해 작품으로 남길 수 있다는 것, 사진가로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이 아닐까 싶다.
‘Of River and Lost Lands’의 배경이 된 곳은 어디인가? 지난 2011년 말에 파드마 강을 기점으로 그 주변에 자리한 여러 지역을 여행하던 중 마주친 마을이다. 파드마 강의 유수량이 급격히 많아지면서 강과 맞닿은 땅이 빠르게 침식됐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집이 하나둘 땅과 함께 무너져갔다. 지금 사진 속 마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마을의 마지막 모습이 담긴 작품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표현하고자 했나? 마을로 범람하는 강은 대자연을 의미하고, 갈곳을 잃어가는 마을 주민들은 인류를 상징한다. 자연은 모든 것을 내어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모든 것을 앗아가기도 하는 거대한 존재다. 한때 생존에 필요한 식량과 물을 내어주던 강은 어느새 사람들의 터전을 무너뜨렸다. 자연과 인류의 관계를 조명해보고자 진행한 작업이다.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과 지역을 담아낸 두 시리즈에 비해 작품 ‘Love me or Kill me’의 분위기는 비교적 밝아 보인다.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환상적인 세계를 담아내고 싶었다. <Big Brother>라는 제목의 영화를 촬영 중인 한 세트장에 찾아가 작업한 결과물인데, 영화는 사랑과 증오, 복수심 등의 감정을 극적으로 그려내는 스토리다. 나는 영화 촬영 현장의 모습을 더욱 선명한 색감과 구도로 연출해 사진에 담았다. 점차 쇠퇴하는 방글라데시 영화계의 현실을 비현실적인 분위기와 과장된 설정을 담은 사진을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해보고 싶었다.
주로 방글라데시에서만 사진 작업을 해온 것 같다. 앞으로도 방글라데시 곳곳을 다니며 더욱 다양한 작업을 진행할 생각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를 새로운 시각으로 관찰하고, 또 겪어보지 않은 낯선 면면을 발견하는 일이 좋다. 이미 익숙한 문화를 더욱 깊게 파헤쳐 볼 수 있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방글라데시에서의 작업을 끝내고 또 다른 목적지로 향하게 된다면 어디로 가고 싶은가? 아이슬란드. 혹은 눈이 아주 많이 내려 온통 하얗게 뒤덮인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좋다.
대부분의 작품 시리즈가 소멸에 관한 이야기다. 사라지는 것들을 주제로 삼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하다. 사실 나도 놀랐다. 모든 시리즈를 완성한 후에야 그것들이 모두 우연히 ‘소멸’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매번 작업을 진행할 때마다 그 순간 떠오르는 감정에 휩쓸려 사진을 찍었는데, 결과물을 모아보니 모두 사라지는 것들이었다. 사진 작업은 잃어버리고, 소멸하고, 지속되지 않는 것들에 유난히 마음이 끌리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사라진 것들 중 당신에게 가장 큰 아쉬움을 남긴 것은 무엇인가? 나는 늘 친구와 가족처럼 가까운 사람들을 잃을 때, 그들의 존재와 관계가 흐려질 때 가장 큰 아쉬움을 느낀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그만큼 삶의 매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