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상사가 내 마음을 뜨겁게 한다. 저녁 5시, 급하게 나를 부르더니 내일 오전까지 제출해야 할 보고서를 작성해 자기 책상 위에 올려놓고 퇴근하라는 말을 남기고 사무실을 나간다. 오늘도 야근이다. 텅 빈 사무실에 홀로 앉아 오늘의 숙제를 마치고 나면 내일 아침 내 상사는 그 보고서를 그대로 자신의 상사에게 제출할 것이다. 익숙한데도 매번 점점 분노 지수는 가파르게 올라간다. 그럴 때면 나는 열심히 메일을 쓴다. 보고서를 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키보드가 부서져라 두드린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내가 너 때문에 관둔다. 너나 다녀.’ 받는 이는 내 상사, 참조에 내 상사의 상사. 그러는 동안 화가 조금 가라앉고 나면 수신인을 모두 지우고 메일을 임시 보관함에 보관한다. 내일 출근하자마자 한 번 더 읽고 휴지통에 버릴 거다. 내 옆자리 동료 P는 키보드 아래 사직서라고 적힌 봉투를 마치 부적처럼 깔아둔다. 요즘 세상에 사표를 직접 적어 제출하는 경우는 없으니 진짜 사표는 될 수 없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사표를 내지 않기 위한 아날로그적 감성의 부적인 셈이다.
직장생활 5년 차에 접어든 K는 오늘도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린다. 오늘 퇴사할 경우 받을 수 있는 퇴직금을 계산하는 중이다. 시간이 남으면 실업급여도 계산해본다. 그럼 대충 한달에 놀고먹으면서 얼마 정도 쓸 수 있는지 딱 계산이 나온다. 그리고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아, 퇴직금이 딱 백만원만 더 쌓이면 관둬야지.’ 상상에 공상을 더해 망상으로 이어지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퇴직금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상상해본다. 이 의식은 매우 씁쓸하고 초라하게 끝난다. 미생의 퇴직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거창하지 않다. 평생의 꿈인 세계 일주를 떠나면 지구의 반 바퀴도 돌지 못한 채 돌아와야 하는 금액이고, 당장 다음 달이면 돌아오는 월세 재계약을 하기에도 모자라는 돈이다.
K의 이야기를 듣던 L이 돈을 모을 생각 하지 말고 먼저 써버리라고 조언한다. L은 대리 시절에 드림카 한 대를 뽑았다. 딱 매너리즘에 빠진 때였다. 직장 동료와도 잘 지냈고, 그동안 사표를 내던지고 싶을 때마다 자동차 할부 금액을 떠올리며 넘겼다. 팀장과 딱히 트러블도 없었다. 그냥 직장생활이 지루해졌을 뿐이다. 그래서 새 차를 뽑아 빚더미에 당당히 올랐다. 그렇게 월급 노예가 되어 계속 일을 하다 얼마 전에는 팀장까지 되었다. 팀장이 된 L은 후배가 좋은 차를 사면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다. ‘혹시 요즘 힘든 일이 있나’, ‘회사를 관두고 싶어서 저러나’ 싶어서다. 동시에 또 한 명의 월급 노예가 생겼다는 동질감도 든다.
한편 작은 그래픽디자인 회사에 다니는 C는 얼마 전 회사 주차장에서 발견한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사무실에서 키우는 중이다. 그 동네 캣맘이던 C는 엄마도, 형제도 없이 혼자 남겨진 새끼 고양이에게 밥을 주기 시작했는데, 이 녀석이 C를 무척 잘 따랐다. 야근이 많아 집은 잠만 자는 숙소일 뿐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던 그녀는 회사 사람들을 설득해 고양이를 사무실에서 키우기로 했다. 때는 잦은 야근에 지쳐 이직하기 위해 헤드헌터를 만나기로 한 전날이었다. C는 인터넷을 열어 고양이를 위한 이런저런 용품을 폭풍 주문한 후 헤드헌터에게 약속을 취소하는 문자를 보냈다. 꾹꾹이를 하는 그놈을 보며 오늘도 사무실에서 밤을 새운다.
당신만 그렇게 오늘 하루를 버티는 건 아니다. 많은 직장인이 야근을 하다 구인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경력직 채용 공고를 뒤져보기도 하고 대학원 입학 전형을 확인해보기도 한다. 화장실에 가서 친구랑 신나게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어마어마한 사업을 구상할 수도 있다. 퇴근길에 유학원에 상담을 하러 가서는 안내 책자만 잔뜩 들고 오기도 한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사표를 내던지지 않고 무사히 버틴다. 그러면 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