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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TV를 틀면 온통 설레는 장면뿐이다. 추리극에 버금가는 전개로 범인이, 아니 남편이 누군지 마지막까지 궁금하게 한 <응답하라 1988>의 동네 로맨스도 그렇고, 웹툰의 주인공 ‘유정’을 똑 닮은 박해진을 캐스팅하는 신의 한 수로 다른 청춘 드라마들을 기선 제압중인 <치즈 인 더 트랩>의 캠퍼스 연애 또한 연일 ‘심쿵’을 유발하고 있다.

심쿵을 부르는 일등 공신은 역시 반전미에 있다. 안 그래 보이는 남자가 의외의 행동을 할 때 여심은 사정없이 요동친다. 역시 심장을 멎게 하는 다양한 설렘 코드가 여자들의 마음에 불꽃슛을 사정없이 날린 <응답하라 1988>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호텔 방에 들어갈 수가 없어 프런트 직원을 기다리고 있다는 덕선의 말에 ‘내 방에서 자’라는 대답으로 응수한 택이의 깜짝 도발을 덕선이는 짐작이나 했을까? 그렇게나 한결같이 바르고 단정한 택이가 말이다. 이날, 케이블채널 역사상 최고의 시청률이 경신됨과 동시에 여자들의 심쿵 지수도 겉잡을 수 없이 치솟았음은 물론이다. ‘츤데레’의 아이콘의 신흥 강자로 떠오른 류준열, 정환이는 또 어떤가. 맨날 실없는 장난이나 치는 줄 알았던 동네 남자애가, 만원 버스에서 내 옆에 굳게 버티고 서서 주변 남자들과 부대끼던 나를 지켜준 그 순간에 아무런 감흥도 생기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소주는커녕 소주잔에 담긴 물만 마셔도 취하는 주제에 나 대신 들입다 벌주를 들이켜던 흑기사 선배, 남사스럽다고 길에서 손 한번 안 잡아주더니 장마철 길거리에서 물벼락 맞게 생긴 나의 허리춤을 확 끌어안던 옛 남친 등 별것도 아닌 남자의 행동에 새삼 두근거렸던 지난 연애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꼭 의외의 남자다운 모습을 발견할 때만 가슴이 뛰는 것도 아니다. 서툰 모습도 때로는 여자의 마음을 간질인다. 덩치가 산적만 한 운동선수 남자친구를 둔 L은 그에게 가장 심쿵했던 순간으로 운동하는 모습도, 경기하는 모습도 아닌 남자친구가 갓난 아이를 안고 있던 때를 꼽았다. 태어난 지 갓 백 일이 지난 조카를 두 손으로 받아 들고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남자친구의 엉거주춤한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괜히 보기 좋았단다. 그 와중에 꼬물거리는 아기는 너무 작고, 남자친구의 손은 너무 큰 게 뜬금없이 설레었다는 게 그녀의 말이다. 한편 무수한 후기 중에서도 하필 <응답하라 1988>의 심쿵 장면으로 정환이가 인사할 때를 꼽는 이도 있었다. 아버지 생신상 앞에 앉아 있다가도 인사차 집을 찾아온 덕선이 부모님에게 벌떡 일어서며 ‘안녕하세요’를 외치고, 콘서트장 포토월 앞에서 덕선이와 아웅다웅하다가도 사진을 찍어주겠다는 커플에게 순간 꾸벅 인사를 하는 정환이의 모습은 무뚝뚝해 보여도 예의 바르고 속 깊은 정환이의 내면을 은근슬쩍 내비친다. 그런 사소한 찰나가, 친구가 남자로 보이게 하는 결정적인 순간이 되기도 한다.

연애에서 불현듯 찾아오는 설렘 중 제일은 아무래도 몰랐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이 아닐까. 그래서 고백하는 남자의 모습은 종종 여자들의 마음을 뒤흔든다. 썸남과 데이트를 마치고 헤어지는 길, 작별 인사를 하려는데 돌아서지 않고 자꾸 우물쭈물하는 모양새에 ‘올 것이 왔구나’ 찌릿한 감을 느끼기도 하고, 나만 혼자 이 남자와 잘 안 될까 안달복달한 게 아니구나 하는 반가운 깨달음에 마음이 두근거리기도 한다. 때로는 정말 아무런 연애 감정도 없다가도, 이 고백의 순간에 찾아오는 마법과 같은 심쿵 효과 때문에 상대가 제법 멋진 남자로 보이는 일이 종종 생긴다. 이 경우 이 남자에게 심쿵한 건지, 아니면 그 상황에 심쿵한 건지는 보통 다음번 만남에서 자연스레 판가름 난다.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찰나의 설렘과는 별개로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직감 또한 불현듯 찾아온다.

사실 누군가에게 설렌다는 건 상대가 마음에 든다는 것, 내 취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잘생기고 돌발 행동을 해도 도저히 설레지 않는 상대가 있는 반면, 다시 생각해도 의아한 타이밍에 상대에게 마음을 빼앗기기도 한다. 후배 N은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친 남자의 눈 흰자에 가슴이 대차게 요동친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퇴근길이라 발 디딜 틈 없는 정류장에서 N은 옆에 선 남자와 잠시 눈이 마주쳤는데, 그녀의 표현으로는 남자의 눈 흰자가 흡사 유리알처럼 맑고 영롱했다고 한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매력 포인트에 순간 마음을 빼앗긴 N은 남자를 힐끔거리다가 급기야 얼떨결에 그가 타는 광역버스를 쫓아 타기까지 했단다. 이야기가 좀 멀리 가긴 했지만, 불현듯 찾아오는 심쿵의 순간이 없는 연애는 참 재미없을 것 같다. 올해도 부디 더 많이 설레는 한 해였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