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속박’의 사랑. 마스터와 노예라는 수직 관계로 시작하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영역. 여기에 본디지(bondage, 결박)와 디스플린(discipline, 규율)이 합세해 ‘BDSM’라는 용어로 압축되는 가학의 세계. 뭐, 상상은 했다. 죽음에 가까운 순간에 도달하는 성적 에너지에 취해 교통사고를 내거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크래쉬>), 질병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애인의 몸을 밧줄로 세게 묶는(이와이 슌지 감독의 <언두>) 영화를 보며 욕망과 결핍에 관해 열띤 토론을 하기도 했다. 단지 비정상의 세계라고 생각했을 뿐, 이해한 건 아니었다. 그러던 중에 S를 만났다.
우리는 열렬히 빠져들었고 지극히 평범하게 사랑을 나눴다. 그는 침대에서 섹시했다. 매끈하고 힘이 좋았다. 사적 갈등은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성격은 달랐지만 뜨거운 영혼을 가졌다는 점에서 공통분모가 있었다. 신뢰가 깊어지고 사랑이 강도를 더해가던 어느 밤에 그는 내 엉덩이를 때리기 시작했다. “아프면 말해, 바로 그만할게.” “괜찮아.” 진짜 괜찮았다. 나 자신에게 더 놀랐다. 절정의 순간에는 ‘간지럽히지 말고 제대로 때려주지’ 하는 생각도 했다. 꽤 관능적이었다. 끝나니 아쉬웠다. 엉덩이에 붉은 자국이 선명했지만 멍은 들지 않았다. 이 감정은 뭘까? 신사동 ‘홍미닭발’의 닭발을 눈물콧물 흘리면서도 구석구석 빨아 먹는 것과 같은 맥락일까.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는 고통으로 인한 쾌감을 절묘함이라고 했다. 고통에서 내 몸의 절묘한 유희를 발견한 것일까. 그렇게 30대 중반 ‘정상인’ 여자의 상상은 현실이 됐다.
‘그만’이라고 말하면 멈춘다. 말할 수 없는 상황이면 둘만의 신호로 플레이를 멈춘다. 그러니까 안전을 기본으로 쌍방이 합의한 가학이다. 하지만 언제나 제정신일 것,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한다. 내가 SM에 대한 생각을 재정립한 건 S 덕분이다. 유럽에서 성장한 그는 경험이 많았다. 그는 SM이 수많은 성적 취향 중 하나이며, 사회에서 받는 억압과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심리 치료 놀이라는 해석도 있다고 내게 설명했다. 서유럽에서는 SNS를 이용해 SM 파티를 공개적으로 공지하거나 이와 관련한 커뮤니티 활동을 하는 것이 흔한 일이다.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떠올랐다. “핵심은 절대 그레이를 거부할 수 없다는 거야.” K선배가 그 책을 빌려주면서 말했다. 책을 읽으며 그의 불친절한 손짓과 으르렁대는 행동을 받아들이는 주인공 아나스타샤에게 종종 빙의됐다. ‘아, 드디어 내가 미쳤구나’ 하고 자책했지만 호기심은 증폭했다. 그레이의 말처럼 “모든 쾌락을 흡수하는” 순간이 궁금했다. S는 그레이의 재력은 없었지만, 그만큼 능숙했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지름 6mm의 로프로 내 팔목을 양쪽 침대 모서리에 묶었다. 내게 괜찮은지 거듭 물었다. 단지 조금 부끄러웠을 뿐 나는 괜찮았다. 그런 감정이 호기심인지 욕망인지 모호했다. S는 부끄러움을 잊는 데 도움이 될 거라며 검은 안대를 내 눈에 씌웠다. 그리고 플레이를 하기 시작했다. 마스터(M)가 원하는 것을 노예(S)는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내게 벌을 줘야한다며 스팽(채찍질)을 하고, 강하게 밀고 들어왔다. 시각이 제거되니 수치심은 사라졌다. 어느새 야수 같은 남성성으로 휘두르는 권력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노예니까. 손목이 묶인 탓에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몸짓을 하게 되는데, 그 강약의 밀도가 신선했다. 나는 말해야 했다. “줄 풀렸어. 다시 세게 묶어줘.”
S의 말은 언제나 달콤하다. “네게 기쁨을 주는 놀이일 뿐이야. 정상적인 사랑도 좋아.” 정상과 비정상 사이에 혼란이 생겼다. 재력 대신 사랑을 선택한 가난한 연인을 비정상으로 취급하는 시대에 정상과 비정상을 규정하는 기준이 과연 있기나 할까? 결국 나의 성적 취향을 인정하는 것, 한마디로 내 욕망의 주인이 되는 것이 정상이라고 믿고 싶다.
수잔 손택은 에세이 <매혹적인 파시즘>에서 SM 플레이의 시나리오에 대해 정확한 공식을 제시한다. “색채는 검은색, 소재는 가죽, 유혹은 아름다움, 정당성은 정직, 목표는 황홀경, 판타지는 죽음이다.” 섹슈얼리티의 본질을 끝까지 파헤쳐보고자 하는 이들의 사적 취향이자 위험한 놀이. 그 끝이 황홀경이라면 기꺼이 가겠다. 보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여러 검은 도구를 휘두르며 연기하는 그의 퍼포먼스가 실은 애인에게 극적인 성취감를 안기기 위한 노력이라는 것을 안다. 그는 사랑을 주기 위해 플레이한다. 내 몸에 상처는 없다. 강렬하게 지속되는 기쁨만 존재할 뿐이다. 이걸 평생 모르고 사는 여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