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비정규’ 혹은 ‘불법’ 음반으로 치부되던 믹스테이프가 최근 들어 메이저 음악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믹스테이프란 뭘까? 힙합 신에서 자주 등장하는 믹스테이프의 기원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레게와 R&B, 힙합 DJ들의 사운드 혹은 리믹스 트랙을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믹스테이프라 칭했다. 누군가에게 선물하기 위해 몇몇 곡을 담아 녹음한 것 역시 믹스테이프라 부르곤 했다. 1980~9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아마 기억할 것이다.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 스타로드(크리스 프랫)가 워크맨을 들고 다니며 듣는 ‘Awesome Mix Vol. 1’ 또한 믹스테이프다. 영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의 주인공 롭(존 쿠색) 역시 믹스테이프 즐겨 들었다.
10여 년 전 힙합 뮤지션들은 클럽에서 사용하는 믹스 사운드나 집에서 만든 트랙을 녹음해 팔았다. 이렇게 제작, 유통된 수많은 믹스테이프는 대중적인 음악 시장과 별개로 래퍼, 힙합 DJ들이 기반을 다지는 데 훌륭한 자양분이 됐다. 트렌드의 흐름을 빠르게 파악하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매체로 작용했고, 생소한 신인 뮤지션들의 다양한 음악까지 두루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믹스테이프를 시리즈로 발표하며 유명해진 일본 DJ 무로(Muro)는 상업적인 음악 시장에서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신선한 그루브와 소울 사운드를 엮어내면서 자신의 컬렉션을 완성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테이프가 CD로, 이후 CD는 사운드클라우드(SoundCloud), 스포티파이(Spotify) 등의 스트리밍 서비스로 진화했다. 온라인에서 쉽게 음원을 공유할 수 있게 되면서 언더그라운드 아티스트들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메이저 뮤지션은 재미 삼아 혹은 정규 앨범보다 자유로운 결과물을 내놓기 위해 믹스테이프 문화를 활용했다. 미국의 소울싱어송라이터 에리카 바두(Erykah Badu)와 래퍼 드레이크(Drake)가 호흡을 맞춘 곡 ‘Hotline Bling’은 오직 믹스테이프, 즉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던 사운드의 대표적인 예다. 홍보용 데모이자 비정규 작업물로 쓰이던 믹스테이프가 최근에는 EP의 역할까지 소화해내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국내 힙합계에서 주목받는 대부분의 MC들은 물론, 랩몬스터를 비롯한 아이돌 뮤지션까지 믹스테이프를 마치 개인의 이력서처럼 활용해 음악적 커리어를 쌓아간다.
몇몇 메이저 아티스트의 믹스테이프를 들어보면, 화려한 피처링과 탄탄한 트랙 구성 등 정규 앨범에 뒤지지 않는 퀄리티의 사운드라는 걸 알 수 있다. 네덜란드 DJ 아프로잭(Afrojack)이나 크리스 브라운처럼 자신의 새 앨범을 발표하기 직전에 믹스테이프로 미리 공개하며 팬들의 호응을 얻은 사례도 있다. 최근에는 에리카 바두의 앨범 <But You Caint Use My Phone>,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에 올라 공연을 펼친 위켄드(The Weekend)의 <Madness>, 그리고 힙합 뮤지션 퓨처(Future)의 <Purple Reign>이 모두 믹스테이프 형태로 발표되어 음악계를 술렁이게 했다.
에리카 바두의 믹스테이프에는 드레이크의 사운드는 물론 아웃캐스트(Outkast)의 멤버 안드레3000이 피처링한 트랙 또한 수록되어 있다. 위켄드는 2015년 빌보드 차트를 휩쓴 앨범 <Beauty Behind the Madness>를 재해석한 사운드를 담아 익숙한 노래를 신선한 구성으로 다시 듣는 재미를 선사한다. 퓨처의 믹스테이프는 현재 힙합 신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MC의 음악성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결과물이다. 웹사이트 datpiff.com에 가면 크리스 브라운과 스눕독, 니키 미나즈의 믹스테이프 음악부터 날것 그대로의 사운드가 오히려 더욱 예술적으로 느껴지는 당찬 신예들의 트랙까지 두루 접할 수 있다.
시카고 출신의 MC 챈스 더 래퍼(Chance the Rapper)는 믹스테이프 문화의 수혜를 입어 탄생한 슈퍼스타라 할 만하다. 아직 단 한 장의 정규 앨범도 내지 않은 그가 발표한 두 번째 믹스테이프 <Acid Rap>은 약 60만 회의 다운로드 기록을 세웠다. 그가 선보이는 음악은 어딘가 야생적이면서도 통통 튀는 사운드인데, 정제되지 않아 한결 거친 느낌을 안기는 각각의 트랙에서 뮤지션의 독특한 음악 세계가 드러난다. 믹스테이프만 선보였을 뿐인데 벌써 저스틴 비버, 스크릴렉스, 마돈나 등 세계적인 뮤지션의 앨범 제작에까지 참여하게 된 그를 보면, 점차 침체되는 음악 시장에서 벗어나 또 다른 루트로 자신만의 음악적 방향을 견고히 다지는 것 또한 탁월한 방법인 듯싶다.
힙합 음악 팬들의 상상을 그대로 실현해낸 믹스테이프 트랙도 있다. 이를테면 이미 세상을 떠난 힙합 아티스트 투팍(2Pac)과 노토리어스 비아이지(The Notorious B.I.G)의 사운드를 조합한 것처럼 세대가 다른 뮤지션의 곡을 잘라 이어 붙이는 형태의 작업이 시도된 것이다. 유명 프로듀서 데인저 마우스(Danger Mouse) 역시 비틀스의 <The White Album> 속의 비트와 제이지의 앨범 <The Black Album>에 담긴 보컬 사운드를 결합한 믹스테이프 <The Grey Album>을 선보이며 비로소 메인스트림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믹스테이프는 이제 레이블 관계자와 음악업계 종사자뿐만 아니라 인터넷만 있다면 전 세계 누구든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악 문화로 자리잡았다. 여러 사례로 미루어 볼 때, 믹스테이프라는 문화가 음악 감상의 폭과 창작자가 펼칠 수 있는 표현의 스펙트럼을 넓혀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음지에서 시작된 마니아들의 움직임이 거대한 음악 시장의 흐름을 바꾸다니, 비주류 문화의 통쾌한 역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