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4mcmaliysn_thum

57개의 기둥이 공간을 가로질렀다. 미래를 연상케 하는 음악은 혁명적이다. 지난 3월 9일, 루이 비통의 2016 F/W 쇼는 루이 비통의 클래식한 유산을 발굴하는 작업처럼 연출됐다. 브랜드의 수장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시간을 넘나들며 진취적인 여성상과 우아함을 그려냈다. 이날 제스키에르는 루 리드의 1978년 곡 ‘Street Hassle’을 사용했는데, 베이스가 만들어내는 굵은 선율이 쇼의 무게를 더했다.

2월 25일, 모스키노의 쇼가 열린 건 눈 내리는 숲의 한복판이었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제레미 스캇은 거의 모든 컬러를 동원해 야생의 룩을 연출했다. 발목까지 올라오는 털 부츠, 동물의 꼬리를 액세서리로 활용한 스타일링 등은 자연 그대로의 패션이다.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Toxic’을 하이파이브가 다시 부른 트랙, 1970년대 펑크록의 대표 주자 조앤 제트의 ‘Bad Reputation’이 거칠지만 웅장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록의 에너지가 이끌어내는 드라마다.

디올의 2016 F/W 쇼는 장미 숲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에서 펼쳐졌다. 하얗게 둘러싼 울타리 안에 모델들이 등장하고 핀란드 출신의 일렉트로니카 뮤지션 AGF와 막스 리히터 등의 음악이 분위기를 잡는다.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는 속이 훤히 비치는 소재의 드레스로 바람 같은 옷을 만들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DJ이자 프로듀서인 도나토 도치(Donato Dozzy)의 ‘Vaporwave 07’이 흐르는 가운데 휘날리는 드레스는 깃털처럼 가벼워 보인다. 라프 시몬스의 드레이핑 테크닉이 돋보이는 룩이다.

https://youtu.be/UkZvJ3QgZEg

 

근래 쇼의 경향 중 하나는 런웨이와 공연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다. 김서룡은 2016 S/S 쇼에서 영국 출신 싱어송라이터이자 피아니스트인 벤자민 클레멘타인의 ‘Winston Churchill’s Boy’를 사용했고, 정원 한복판에 집을 지어놓고 시작된 버버리의 쇼에선 영국 뮤지션 로데스(Rhodes)가 피아노를 치며 ‘Vienna’, ‘Breathe’, ‘Close Your Eyes’ 등을 불렀다. 지난해 등장한 가장 주목받는 아티스트 벤자민 클레멘타인은 2015 S/S 버버리 쇼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켄싱턴 가든에 마련된 새하얀 무대에서 그는 특유의 깊은 울림으로 ‘Cornerstone’을 불렀다. 음악의 무드를 빌려 표현한 한 편의 우아한 이야기였다. 반면 생 로랑은 여전히 혈기왕성했다. 색색의 네온사인으로 쇼의 막을 연 에디 슬리먼은 전설적인 개라지 록 스타 존 드와이어의 음악을 반복해 틀었다. 레더와 메탈, 그리고 세라믹이 뒤엉킨 현란한 비주얼의 쇼였다.

2016 S/S 시즌 비주얼 면에서 가장 충격을 준 건 역시 꼼데가르송의 쇼였다. 성전에 불려 온 모델들은 자신의 몸보다 더 큰 의상을 짊어지고 걸었다. 담요를 두른 듯한 룩과 기묘하게 뒤틀린 화장, 그리고 붉은 가발은 과장된 앨리스의 세계를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인스타그램 시대에 저항이라도 하듯 극도의 볼륨과 규모로 새로운 룩의 형태를 제시했다. 공포영화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키아스모스의 미니멀한 사운드가 새로운 세계의 알림처럼 들렸다.

미국의 한 패션 매체는 2016 S/S 시즌쇼를 정리하며 1970년대 사운드의 사용을 언급했다. 롤링스톤스, 지미 헨드릭스 같은 록 밴드의 음악과 레게 뮤직이 많이 쓰였다는 말이다. 실제로 타미 힐피거는 밥 말리의 ‘Could You Be Loved’로 카리브 해 해변의 풍경을 연출했고, 시적인 연출을 시도한 토리 버치는 큐어의 ‘Just Like Heaven’을 배경음악으로 썼다. 옷은 모던해지고 쇼는 화려해졌다.

실험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한 요지 야마모토의 쇼는 파격의 장이었다. 기존의 패턴과 구성을 해체한 그는 수직의 프레임만으로 옷을 만들었다. 헐렁하게 떨어지는 라인이 기하학적 멋을 내는 룩이었다. 뮤직 디렉터인 지로 아미모토는 플립톤스(The Fliptones)와 플러그 앤 매직(Plug & Magic)등의 트랙을 짧게 끊어 쓰며 파티장 분위기를 연출해냈다.

뉴욕의 재간둥인 알렉산더 왕의 트랙 리스트는 유난히 볼륨이 풍성하다. 그는 힙합 뮤지션 포스트 말론, 페티 웹, 에이셉 라키 등의 음악을 골라가며 쓴다. 지난 S/S 시즌엔 레이디 가가, 니키 미나즈의 댄스음악을 사용했고, 위켄드의 쿨한 팝도 종종 캣워크로 불러온다. 지금의 뉴욕 감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디자이너다. 2014년 등장과 동시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디자이너 베트멍의 뎀나 즈바살리아 역시 그 누구보다 트렌디한 쇼를 만든다. 구겨진 티셔츠, 저지, 그리고 후디와 데님이 어우러진 그의 룩은 스트리트 패션의 한 장면이다. 음악은 파티장과 클럽을 오가고, 인스타그램에서 뛰쳐 나온 것 같은 모델들은 저항을 외친다. 힙합으로 선동하는 혁명이다.

리카르도 티시는 맨해튼에서 열린 2016 S/S 쇼에서 공연에 가까운 쇼를 펼쳤다. 느린 동작으로 등장한 퍼포머들은 서로를 끌어안으며 융화되는 자연을 표현했고, 리카르도 티시는 다양한 민족의 전통음악으로 조화와 화합의 순간을 만들어냈다. 그간 대립하던 남성성과 여성성, 턱시도와 란제리가 서로를 끌어안는 쇼였다. 리카르도 티시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모든 종교의 사랑을 축하하고 싶다. 패션이 다양한 종교에서 영감을 받는 이유다”라고 말했다. 다인종의 역사를 패션의 레퍼런스로 삼는 데 대한 설명일 터다. 민족과 국가, 인종과 성별이 충돌하는 세계에서 패션은 하나의 종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