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커 버스커의 ‘벚꽃엔딩’이 슬슬 음원 차트에 복귀할 시기가 되니 문득 친구 B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수년 전 이맘때 그녀에게는 멋진 남자친구가 있었다. 둘은 피크닉을 가기로 약속했고 B는 도시락을 싸보기로 했다. 사실 그녀는 요리에 영 관심이 없었다. 주먹밥 정도면 애교 있고 좋았을 텐데, 육식주의자 남자친구의 입맛을 배려하겠다며 패기 있게 ‘삼겹살 김밥’에 도전한 게 그날의 패인이었다. 데이트 당일 아침 그녀는 프라이팬에 삼겹살을 굽기 시작했다. 문제는 사방으로 튀는 기름. 평소 거의 쓰지 않아 ‘깔끔할 수밖에 없는’ 주방 벽에 기름이 튀는 게 싫었던 B가 요리하기 전에 전단지를 붙인 게 화근이었다. 고기를 굽는데 전단지 끝이 떨어지면 서 순식간에 종이에 가스 불이 옮겨붙었다. 혼비백산한 B는 얼결에 싱크대에서 손으로 물을 받아 가스레인지에 마구 끼얹었다. 다행히 불은 바로 꺼졌지만, 그녀의 삼겹살은 물벼락을 맞고 구이와 수육 중간 즈음의 축축한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약속 시간이 다가오는데 도시락은 고사하고 남은 주말을 바쳐야 할 청소 거리만 잔뜩 남은 B는 허탈했다. 그녀가 원했던 건 그저 ‘#피크닉#벚꽃#도시락#데이트’의 해시태그가 붙은 도시락 SNS 사진이었을 뿐인데. 연애가 뭐라고, 팔자에도 없는 삼겹살 구이를 하다 초가삼간을 다 태워 먹을 뻔한 걸까 생각하니 문득 한숨이 절로 났다. 물론 도시락을 망친 일이야 일어날 수 있는 해프닝이다. 하지만 B의 연애는 늘 그녀가 남자의 취향이나 기호에 맞추려고 무리하다가 사달이 났다.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친구가 음식 잘하는 여자를 이상형으로 꼽을 때, B의 삼겹살 대참사는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었다. 애초에 요리를 즐기지 않는다고 하면 그만인데, 그녀는 연애를 할 때마다 줏대 없이 구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져 더 괴로웠다고 한다.
연애는 때로 사람을 참 작아지게 만든다. 부모님, 언니 동생, 절친, 그 누구에게도 바란 적 없는 일을, 알게 된 지 3개월도 안 된 상대가 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억장이 무너지는 설움을 느끼는 건 솔직히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혹시 남자친구가 먼저 연락할 때까지 기다려본 적이 있는지. 자기가 먼저 잘 잤느냐고 물어보면 될 것을 이 남자가 내 생각이 나서 아침 인사를 먼저 하나 안 하나 5분에 한 번씩 휴대폰을 확인하며 오전 시간을 흘려보낼 때, 그런 자신이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치밀해지기는 한다. 문자로 대화를 하던 남자친구가 특별한 일도 없이 중간에 갑자기 답이 뜸해지면 서운하다. 그래서 아쉬운 소리를 하다가 싸우기라도 하면 그때부터는 분 단위로 계산이 시작된다. ‘내가 7시 44분에 마지막으로 문자를 보냈는데 네가 8시 31분에 답을 했잖아. 넌 칼퇴 하면 집에 6시 반에는 돌아오니 그 시간엔 집에 와서 쉬고 있을 때고. 우리는 문자로 대화하던 중이었는데, 47분 동안 휴대폰 들여다볼 생각을 한 번도 안 했단 말이야? 알림음을 못 들었다고? 너 자취방 얼마나 작은지 내가 아는데?’ 실제로 친구 L이 예전 남자친구에게 따져 물은 내용이다.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어도 혼자서 채팅창 스크롤을 위로 아래로 굴려가며 그의 동선과 시간을 유추해 가상의 시나리오를 짜본 적, 분명 있을 거다. 답답한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L은 매번 옥신각신하다 그와 화해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은 후 돌이켜 보면 그렇게까지 상대를 분석하려 드는 자신이 참 못났다 싶어 많이 괴로웠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남자친구가 혹시 마음이 변하진 않았는지 눈치를 보았고, 더 예민하게 그의 연락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결국 L은 다툼에는 이겼지만 늘 지는 연애를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연애를 하다 보면 상대에 대한 넘치는 애정으로 반짝이는 순간만큼이나 부끄럽고 처절한 자신을 발견하는 괴로운 성찰의 시간도 넘치게 겪는다. 헤어진 남자친구를 잊지 못해 그와 그의 친구들의 인스타그램을 습관처럼 드나들다 결국 거나하게 취한 어느 밤 전 남자친구의 포스팅에 이모티콘 섞인 참회의 댓글을 달아 한동안 SNS를 끊어야 했던 K, 무신경한 남자친구에게 팜므 파탈의 치명적인 매력을 보여주겠다며 가죽 올인원을 뻗쳐 입고 데이트에 나섰다가 불타는 밤을 보내긴커녕 한동안 온몸에 땀띠가 나 고생했던 어느 여름날의 J 등 자다가도 이불을 걷어찰 모진 경험이 비단 이들만의 몫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런 자신을 지질하게 보는 대신 귀엽게 봐줄 남자, 취향을 맞추려고 노력하거나 목 빠지게 연락을 기다리지 않아도 모든 게 자연스레 흘러가는 인연을 만날 수 있다. 그도 나와 같은 한심한 연애를 겪어왔기에, 우리는 제법 괜찮은 커플일 수 있다. 괜찮다. 다음에 더 잘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