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결혼해.” 친구가 결혼 소식을 알렸다.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 하고 공표하는 잔치, 가족으로서 책임과 의무가 명징하게 주어지는 사회적 관계의 시작이다. 홍신자의 춤을 동경하며 마흔 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겠다던 자유연애주의자 동창생 K는 30대 중반에 한 남자의 여자가 되었다. 결혼을 앞두고 모인 술자리에서 K가 “평생 한 남자만 사랑할 수 있을까?” 하고 주정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사랑을 쟁취한 승리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예비 신부였다.
결혼하면 가정을 유지하고 자녀를 양육할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는 면에서 결혼은 사랑의 결실인 동시에 끝이다. 모두가 인정하는 사랑의 지속성이 다시 회복되는 순간은 오로지 이혼뿐이다. 남편과 아내만을 평생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 부부도 있다. 하지만 기대수명 1백 세 시대에 한 사람과 60년 이상 산다는 것은 어쩌면 신화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더욱이 살면서 평균 서너 번의 ‘빅 러브’가 찾아온다고 하지 않는가.
미래 시대의 결혼 문화를 바라보는 흥미로운 전망이 있다. 전 세계 미래 학회장 파비엔 구 보디망에 따르면 인간의 기대수명 증가에 따라 미래에는 서너 번 결혼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 아이들의 공동 양육을 위해 전 배우자와 아이들이 모두 모여 사는 가정이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결혼 제도 자체가 미래의 흐름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1인 가구 비율이 40%가 넘는 북유럽을 보면 적어도 유럽에서만큼은 결혼의 의미가 점점 흐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혼을 권장하는 것은 아니다.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무의미해졌을 때, 결혼생활을 끝내지 않고 참고 버티는 과오를 범하지 않기를 바랄 뿐. ‘내가 누구 때문에 이렇게 참고 살았는데!’ ‘내가 너희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는 원망이 커질수록 그 화가 질병이 되어 몸을 망치는 경우를 참 많이 봤다. 자녀가 부모를 봉양하고, 부모가 육체적 에너지를 상실했을 때 돌보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고 여기던 시대는 지났다. 독립할 나이가 될 때까지 자녀를 잘 양육하는 것이 부모의 의무지만, 그 이후 개인의 행복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내 옆의 동반자,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파트너와의 관계가 중요한 이유다.
그것을 가장 잘 실천하는 내 친구가 비앙카다. 그녀는 멕시코 아카풀코 출신으로 독일에서 함께 공부했다. 남미 특유의 원초적 생기발랄함을 지닌 그녀가 8년 전 당시 열다섯 살 연상인 독일인 남자와 결혼했는데, 얼마 전 두 번째 결혼식 청첩장을 보내왔다. 일곱 살 된 아들을 둔 그녀는 이혼 사유를 묻는 질문에 “Move on and change your life”라고 답했다. 이제 열 살 연하의 남자와 결혼을 앞둔 그녀가 좇는 것은 ‘개인의 행복’이다. 불행한 상태에 머물러 있기보다 새로운 행복을 찾는 것이 아들에게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믿는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시나리오도 그와 흡사하다. 평생 격조 있는 연애만 반복할 수 없다면, 최소한 세 번 결혼하기. 자녀 계획을 함께 설계하고 양육의 책임을 성실하게 다할 수 있는 첫 번째 남편. 최소한 그는 가족을 건강하게 책임질 수 있는 경제적, 사회적 조건을 갖춰야 한다. 삶의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는 오롯이 순수한 사랑과 욕망에 행복을 걸 수 있는 두 번째 남편. 공동의 자녀를 가져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과 경제 문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상태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노년이 되어 병원에 입원할 때 대신 수속을 밟고 휠체어를 밀어주는 친구 같은 남편. 이때는 섹스보다는 취향과 대화가 통하는 동무로서 해야 할 역할이 더 강조된다.
결국, 더 사랑해야 하는 시대다. 인생에 찾아오는 ‘빅 러브’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스스로 행복을 찾는 진취적 결혼의 주인공이 되는 것. 분명한 것은 가면을 쓰고 현재의 고난을 견디는 고통보다 나의 컴포트 존(comfort zone)을 깨고 그 괴로움을 극복하는 시간이 훨씬 짧고 쉽다는 사실이다. 쿨한 이별은 없다. 하지만 이별이 있어야 사랑이 온다는 것은 진리다. 내가 그랬고, 수많은 여자가 증명하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