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당신의 신비로운 아몬드 눈에 반했어요.”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가 내 마음을 앗아갔어요.” “밤하늘의 별빛도 당신의 아름다움을 대신하진 못해요.” “오늘 아름다운 밤바다에서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을래요?” 할리퀸 문고 책에 나오는 문장이 아니다. 이탈리아 북서부에 위치한 리구리아(Liguria) 해변에서 들은 ‘작업 멘트’다.
여자 셋이 휴가지로 선택한 이탈리아 리구리아는 우리나라로 치면 속초 바닷가 정도 될 거다. 아시아인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내국인의 유명 휴양지로, 휴가철이면 길게 뻗은 해변에 선베드가 빼곡하게 늘어선다. 선베드 이용료 5유로를 내고 자리를 차지한 우리는 태양에 취해 스르르 잠이 들었다가 몸을 뒤집곤 했는데, 그때마다 이탈리아 청년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남자 중 한 명이 바짝 다가와 그가 그저 여자들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한량이 아니라는 점을 짧게 어필한 뒤 내 외모에 대한 칭찬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질문은 하지 않고 최대한 문학적인 단어를 사용해 본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열중했다. 그간 ‘꼬나본다’는 오해를 받았던 작고 찢어진 눈을 ‘신비로운 아몬드 눈’이라 말해주다니, 이 남자가 당장 키스를 시도했다면 눈을 질끈 감았으리라. 그가 이탈리아어(꼭 이탈리아어로 들어야 한다)로 온갖 미사여구를 쏟아내면, 동행한 이탈리아 친구가 통역을 해줬다. 그 남자가 내게 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 건 한참이 지난 뒤였다. 그들은 본래 그렇게 태어났다. 다섯 살 남자아이도 ‘레이디 퍼스트’를 외치며, 문을 열어주는 타고난 로맨티시스트이자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여성에게 지하철 좌석을 양보하며 일말의 연애 가능성을 기대하는 유전자.
그러니 여행지에서 운명의 로맨스 따위를 섣불리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일탈과 대리 만족은 가능하다. 관광청 홍보 대행을 하는 L대리는 매년 12월 31일에 맞춰 로마로 떠난다. 카운트다운과 함께 새해를 알리는 팡파르가 울리면, 조지 클루니를 닮은 이탈리아 남성 수십 명과 프리허그(?)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엔 새해 첫날 동양의 여인과 키스하면 행운이 온다는 속설이 있어, 키스 세례를 받기도 한다. 이 얼마나 양기 충만한 문화 체험인가.
휴가를 앞두고 불꽃 일탈을 선언한 선배가 있다. “매일 후리고 놀 거야”라고 부르짖으며 ‘오빠들’이 많은 스페인 남부나 이비사, 몰타 섬을 타깃으로 티케팅을 한다. 매일 펍과 클럽을 순회하며 알코올을 들이켜지만, 타고난 ‘비치(bitch)’가 아닌 그에게 남는 건 갖가지 영수증과 지독한 숙취인 경우가 대부분. 그런 언니들에게 권하는 건 취향의 공유다. 현지에서 서핑이나 클라이밍, 카약 등 액티비티를 함께 즐기다가 자연스럽게 로맨스로 이어지는 이들을 많이 봤기 때문이다.
실제로 휴가지에서 시작된 로맨스가 현실적인 결실로 이어진 커플도 많다. 발리로 여행을 간 지인 K는 발리의 서퍼를 촬영하는 다큐멘터리 감독과 사랑에 빠져 ‘발리 베이베’가 생겼다. 그 발리 베이비가 현재 유명한 유소년 서퍼가 되었으니 그 또한 해피 엔딩. 허나 일장춘몽이면 또 어떠한가. 해피 엔딩이 아니더라도 그 추억이 난로가 되어 평생을 따뜻하게 지펴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