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디어 아트, 사진, 설치미술 등 다양한 예술 장르를 넘나드는 뉴욕 출신의 아티스트 맥시 코언(Maxi Cohen)은 작품에서 주로 문화, 인종, 성 정체성과 관련한 사회문제를 다룬다. 현시대를 보는 날카로운 시각을 독특한 예술적 감각으로 녹여낸 작품이 주를 이룬다.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다룬 장편 다큐멘터리 <Joe and Maxi>(1978)와 1992년 벌어진 로스 앤젤레스 폭동(1992 Los Angeles Riots)을 겪은 유색인종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South Central Los Angeles: Inside Voices>(1994)는 당시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주목받으며 감독으로서 입지를 확고히 다질 수 있게 해준 작업이다. 현재 맥시 코언은 물의 장엄하고 우아한 움직임을 표현해내는 거대한 멀티미디어 설치미술 작업 ‘A Movement in Water’를 진행하고 있다. 이처럼 다채로운 영역을 아우르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쌓아 온 맥시 코언의 대표 작품은 그녀가 약 30년간 이어온 사진 작업인 ‘Ladies Rooms around the World’다.
맥시 코언은 지루한 대화가 이어질 때면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하고 자리를 피한다. 그녀는 아주 어릴 적부터 화장실에서 명상에 잠기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사춘기를 겪으면서는 자신감을 잃을 때마다 화장실에 가서 생각하는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추스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코언은 여자 화장실의 모습을 우연히 카메라에 담게 된다. 1978년, 그녀는 첫 다큐멘터리 장편영화인 <Joe and Maxi>로 마이애미 영화제에 참가했다. 시상식 만찬은 화려한 마이애미 비치 호텔에서 진행되었다. 복잡한 행사 분위기에 지친 코언은 습관처럼 화장실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80대 노부인들이 코르셋을 조이고 가짜 속눈썹을 정리하면서 흥에 겨워 춤을 추는 광경을 목격한다. 그녀는 이내 그 분위기에 동화되어 여자 화장실이라는 여자들만의 은밀한 공간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는다. 코언은 손에 들고 있던 카메라로 눈앞에 펼쳐진 순간을 포착했다. 그 찰나의 결과물이 바로 30년간 세계 곳곳을 다니며 이어온 사진 작업 ‘Ladies Rooms around the World’의 첫 이미지다.
미국, 호주, 잠비아, 이스라엘, 브라질, 프랑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일본 등 세계 어디서든 여자 화장실에 있는 여성들은 비슷한 행동을 한다. 화장을 고치고 머리와 옷을 매만지는가 하면 처음 만난 사이에도 거리낌없이 대화를 나눈다. 화장실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낯선 여성들이 만드는 뜻 밖의 친밀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코언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찍어 스스로 피사체의 일부가 되는 작가다. 그녀의 모습과 어우러지는 여자들의 표정과 몸짓은 꾸밈없이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이는 한편, 각 나라의 문화에 따라 이 작업 세계를 받아들이는 생각이 조금씩 달랐다. 일본 여성들은 비교적 조심스럽고 내성적인 반응을 보이며 촬영에 참여했다. 프랑스 여성들은 화장실을 매우 비밀스러운 사생활의 영역으로 여겨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싶어 했다.
촬영을 진행하며 뜻밖의 상황을 맞닥뜨리기도 했다. 지난 2000년대 초반에 열린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촬영할 때였다. 넓은 행사장의 여자 화장실은 화려하게 꾸민 배우와 스태프로 북적거렸다. 큰 행사를 앞두고 북새통을 이룬 사람들은 작가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시고니 위버, 르네 젤위거, 페넬로페 크루즈, 셜리 맥클레인은 코언의 촬영에 기꺼이 응했다. 아네트 베닝은 활짝 웃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코언의 작업이 매번 이처럼 환영받은 건 아니다. 하루는 셔터를 누르는 그녀에게 한 여자가 다가와 사적인 공간의 사진을 찍는 작업을 이해할 수 없다며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호주로 떠났던 1990년대의 어느 날, 코언은 한 외곽 지역에 있는 호주 원주민 바를 찾았다. 남자들은 모두 바 테이블의 옆쪽에 서 있었고, 여자들은 반대편 창가에 모여 앉아 있었다. 원주민 여자들은 언에게 그녀들의 모임에 합류하기를 권했다. 잔을 기울이며 친밀한 분위기가 형성될 무렵 몇몇 여자들과 코언은 함께 화장실로 향했다. 좁고 폐쇄된 술집 화장실에서 원주민 여자들은 코언에게 조용히 그들 마을에서 벌어지는 비밀스러운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 오래전부터 암묵적으로 행해진 강간과 어린 청소년들의 근친상간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토록 끔찍한 불법적인 관습에 반대해 사회에 널리 알리고자 한 원주민 여자들은 여성 포토 저널리스트인 코언이 여성 원주민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되어주길 바란다며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설명했다. 다양한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해온 코언은 그녀들과 함께 분노했고, 이를 세상에 알려 바로잡아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혔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맥시 코언의 프로젝트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그녀가 처음으로 영상 작업을 기획하게 된 것이다. 여성들을 피사체로 페미니즘이라는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담아내는 대신, 직접 만난 여성들의 모습을 비디오에 담아 그녀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전하는 작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브루클린의 엘리자베스 새클러 페미니스트 아트 센터(Elizabeth A. Sackler Center for Feminist Art)에서 행사가 열린 날, 맥시 코언은 우연히 미국의 유명 언론인이자 페미니즘 운동가인 글로리아 스타이넘(Gloria Steinem)을 화장실에서 마주쳤다. 스타이넘은 평소 코언의 작품 세계에 관심이 많았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화장실에서 시간을 보내며 여성의 자유와 화장실이라는 공간의 상관관계와 세계 곳곳에서 화장실에 접근하는 데 제약을 받는 여성들의 실태, 그리고 공중 보건이 인권에 미치는 중대한 영향을 주제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눴다.
화장실은 여성의 자유와 독립에 관한 상징적인 요소가 묻어나는 공간이다. 여성의 공중 보건과 위생에 관한 유엔(UN)* 조사에서는 전 세계 여성 3명 중 1명이 적절한 환경의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여러 문화권에서는 여전히 여성이 가장 취약하고 위태로운 계층으로 취급받으며, 이러한 여성 차별로 여성 질병에 감염되기도 하고, 성폭행이나 성희롱 심지어 살인 사건까지 벌어지기도 한다. 지난 2001년에는 세계화장실기구(WTO)가 여성의 공중 보건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11월 19일을 ‘세계 화장실의 날(World Toilet Day)’로 선포했고, 2013년 유엔에서 이를 세계 기념일로 공식 채택했다.
*물 공급 및 위생 협의회(WSSCC), 여성과 소녀를 위한 공중 보건과 위생 위기, 2013
맥시 코언의 사진 프로젝트 ‘Ladies Rooms around the World’의 초기 단계이던 30년 전에는 단순한 예술적 영감을 표현하는 의미의 작업이었다. 여성만의 독립적인 공간에서 풍기는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친밀한 유대감에 집중했고, 순간의 무드를 포착하는 것이 주된 작업 방식이었다. 하지만 많은 예술가가 그러하듯, 코언 또한 사진을 찍으며 쌓여가는 결과물의 양만큼 작업 세계를 넓고 깊게 확장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품고 있던 현시대를 고발하는 메시지가 작품에 점차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세계를 여행하며 수많은 여성과 교감하면서 페미니즘에 대한 열정을 확연히 깨달은 것이다. 무심코 스쳐 지나는 여자 화장실이라는 일상적인 공간이 코언의 사진에서는 여성 인권을 상징하는 특별한 소재로 재조명되고, 거울에 비친 여성들은 성차별에서 자유로워지려는 욕구와 여성들만의 특별한 유대감을 표현하는 피사체로 녹아들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완성되어가는 맥시 코언의 사진 시리즈는 평범한 일상에서 문제의식을 날카롭게 이끌어내는 동시에 페미니즘에 대한 수많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