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언행불일치
이전 남자친구는 침대 위에서 지나치게 과묵한 타입이었다. 속궁합이 나쁘진 않았지만 그가 내는 소리라곤 마지막에 사정할 때의 짧은 신음 말고는 전혀 없는 터라 속을 알 수 없어 답답했다. 그와 헤어지고 나자 야한 말도 조금할 줄 알고, 섹스가 좋았는지 어땠는지 표현도 하는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새롭게 데이트를 하기 시작한 남자는 대화 나누는 것을 좋아하고, 첫 키스를 하고 나서도 정말 좋았다며 로맨틱한 말을 하길래 은근히 같이 보낼 밤을 기대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침대 위에서도 말하길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치 영화 관람 후 평을 하듯 매번 섹스가 끝난 후 리뷰를 잊지 않는 남자였다. 문제는 오늘의 성과를 묘사하는 그의 표현이 지나치게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내 춤사위 같은 현란한 허리 놀림에 너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내 거기는 얇지만 단단해서 너를 이렇게 만족시킬 수 있었다. 나는 노력하는 천재다” 등등.
그의 말마따나 그의 페니스는 참으로 실고추처럼 가늘어서 정작 나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나에게 좋았느냐고 한 번도 물어보지 않고 자신의 업적만 쉴 새 없이 치하했다. 그의 허세 덕분에(!) 나는 자기를 객관화할 줄 모르는 사람과는 연애는 물론 섹스조차 쉽지 않다는 교훈을 얻었다. _L, 30세, 프리랜서
세계로 뻗어나가는 섹스
이태원의 어느 클럽에서 놀고 있는데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인사만 나누었을 뿐인 그에게서 왠지 모를 섹슈얼한 긴장감이 전해졌다. 대화를 하면서 나눈 가벼운 터치에도 찌릿한 느낌이 들어 내심 그와 밤을 보내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도 나와 비슷하게 느꼈는지 우리는 결국 클럽을 나와 모텔로 직행했다. 섹스는 순조로웠다. 그가 흥분해 갑자기 내 엉덩이를 칭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오엠지 유 핫 애쓰! 뽀킹 덜티!” 아니 내가 지금 무엇을 들은 것인가. 당황스러움이 채 가시기 전 그의 난데없는 감탄사가 이어졌다. “핫 푸씨! 핫! 핫!”
단언하건대 그는 외모, 차림새, 행동, 영어 발음 어느 하나 전혀 유학파의 느낌이 아니었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나 또한 영어 울렁증에 시달리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하지만 그런 내가 들어도 그의 ‘더티 토크’는 조금 어색했다. 마치 온라인 쇼핑몰 운영자들이 신상 옷에 붙이는 정체 모를 영어 이름 같다고나 할까. 이후에도 그는 ‘얼라이브 버자이너’ 등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표현으로 나를 더 깊은 혼란에 빠뜨렸고, 그의 말에 압도당한 나머지 오르가슴을 느낄 새도 없이 우리의 섹스는 끝이 났다. 그후로 만나지 않아 물어보진 못했지만, 잠자리에서도 자신이 글로벌 인재임을 알리고픈 대한민국 청년의 현실을 엿본 듯한 기분이 들어 씁쓸했다. _M, 29세, 마케터
지저귀는 밤
얼마 전 소개팅으로 만난 그 남자는 목소리가 참 좋았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적당한 톤에 갈라지거나 새된 구석 없이 영롱한 느낌이 있었다. 봄에 열리는 어쿠스틱 뮤직 페스티벌에 가면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감성 뮤지션의 목소리랄까? 그런 이야기를 평소에도 주변에서 많이 들었는지 그는 내 칭찬에도 크게 신경 쓰지않는 눈치였다. 차분한 성격에 매너도 좋았고, 같은 말도 그가 하면 더 그럴듯하게 들렸다.
드디어 처음으로 함께 보낸 밤, 침대 위에서 분위기가 달아오르는데 어디선가 멜로디가 들려왔다. 이 남자 휴대전화 벨 소리인가? 우리가 음악을 틀었나?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애무하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허밍이었다. 얼핏 로맨틱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섹스를 하면서 자체적으로 배경음악을 생성하는 남자를 만난다는 건 지극히 뻘쭘한 일이다. 그게 당신이 아는 노래라면 더욱 말이다. 한번은 그가 애무를 하다 영화 <라라랜드>의 주제가를 불렀다. 음흐흠흠 음흐르 흐르흠… 한창 몸이 달아오르다가도 그가 허밍을 시작하면 왠지 몸 둘 바를 알 수 없는 어색함에 흥분한 몸도 마음도 차게 식어버렸다. 그렇게 한 달을 더 만났지만 차마 그에게 ‘너는 라이언 고슬링이 아니며, 우리는 LA에 살지도 않는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그의 연락을 피하게 되었다. _K, 31세, 디자이너
적당히 하지 못해 미안해
남자친구가 최근 웨이트트레이닝에 심취하면서 몸이 몰라보게 좋아졌다. 일주일에 너덧 번은 헬스장을 찾는 듯했다. 가는 팔다리에 술배 조금, 전형적인 운동 부족형 마른 비만이었던 그의 몸이 어깨도 벌어지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배에 미세하게나마 복근이 잡혔다. 내가 보아도 뿌듯할 정도인데 본인은 어땠을지. 전보다 더 자주 거울을 보며 피트니스 선수들의 대회 포즈를 흉내 내는 것도 여자친구인 내 눈에는 나름 귀여웠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섹스를 하다 분위기가 조금 거칠어지면서 흥분한 나는 나도 모르게 남자친구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쳤다. 사실 그리 세게 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소리가 찰싹 하고 야무지게 났고 나는 깜짝 놀라 숨을 삼켰다. 그러자 이 남자, 내 손찌검이 우습다는 듯 피식 웃더니 갑자기 복근에 힘을 빡 주면서 자기 배를 때리라고 소리를 쳤다. 얼결에 시키는대로 하니 더욱 거세지는 그의 요구. “더 세게! 주먹으로! 크헉!” 그렇게 나는 아닌 밤중에 느닷없이 스파링을 했다. 고등학교 시절 반 대항 팔씨름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던 나의 과거를 알 길이 없는 그는 내 핵주먹 세 방에 말을 잇지 못했고, 그날 밤 우리의 섹스 또한 계속되지 못했다. 적당히 분위기를 맞춰줄걸 그에게 미안했다. _P, 26세, 대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