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로 물든 세상

소개팅으로 만난 Y는 첫인상이 무척 귀여웠다. 아담한 키에 단발머리, 느릿한 말투까지 꼭 내 스타일이었다. 우리의 연애는 첫 만남을 포함해 세 번의 데이트를 거쳐 시작됐다. 서로 잘 모르는 상 태에서 연인이 된 만큼 자주 만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Y와 만난 지 세 달쯤 된 지금 나는 Y와의 이별을 코앞에 두고 있다. 이건 모두 나를 지치게 하는 그녀의 취향 때문이다. 그녀는 홍대 근처에서 만나기로 하면 꼭 키티 카페에 들르자며 내 손을 잡아끌고, 액세서리 가게나 문구점은 그냥 지나치는 법 없이 들어가 온갖 핑크색 물건들을 사 모은다. 데이트 횟수가 늘어갈수록 Y의 지나친 핑크 사랑 때문에 내 각막에는 핑크색 필터가 낄 지경인데, 지난주에는 심지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핑크색으로 치장하고 나타나 성수동 일대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신발도 핑크, 치 마도 핑크, 지갑도 핑크, 양말도 핑크, 심지어 비상시를 대비해 챙긴 반창고도 핑크색이었다. 어제는 처음으로 Y의 자취방에 갔다. 말해 뭐하겠나. 주방 도구며 이불 커버, 커튼까지 하여간 눈에 보이는 건 죄 핑크였다. 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그러나 Y의 화장실에 들어간 나는 그야말로 경악했다. 변기 커버와 ‘뚫어뻥’까지 핑크색이라니! Y의 화장실에서 넋이 나간 나는 이 핑크 왕국을 서둘러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Y야, 핑크에 무슨 한이 그렇게 맺혔니. K, 32세, 남

 

우주 같은 너의 관심사

내 여자친구 T는 하루하루가 너무 바쁘다. 갓 태어난 아기처럼 온 세상 모든 것에 호기심이 생기는 건지, 새로 본 것이라면 도통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없다. 최근 그녀의 관심사는 대략 이러하다. <쇼미더머니 6> <하트시그널>의 러브 라인, 영화 <택시운전사>, 양양에서 즐기는 서핑, 디톡스, 직장 상사의 연애사, 후배의 새 여자친구 인스타그램, 아이돌 그룹 워너원, 집 앞에 개업한 백반집 사장님의 손맛 비결 등등이다. 일일이 꼽으려면 한도 끝도 없으니 이쯤 해두겠다. 누군가는 매번 축 처져 우울해하는 것보다 T처럼 매일이 새롭고 밝은 편이 낫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그 옆에 있는 내가 너무 고단하다는 것이다. 24시간 내내 자신이 관심을 두는 대상을 열심히 설명하는 그녀 덕분에 나는 정작 단 한 회도 본 적 없는 <쇼미더머니>의 경쟁 구도와 래핑 스타일을 모두 외웠으며, 가보지도 않은 양양의 맛집 리스트도 마스터했고, 얼굴도 모르는 T의 직장 상사의 마음 상태까지 알게 됐다. 이렇게 매일이 바쁜 T와 연인이 된 지 어느덧 10개월째다. 바람 잘 날 없이 휘몰아치는 T의 관심사 때문에 머릿속이 너무 시끄럽다. 하루라도 제발 아무 생각 없이 조용히 좀 누워 있고 싶다. T가 아주 잠깐이라도 세상에 관심을 끄고, 휴대 전화도 내려놓고 곁에 가만히 있어주었으면 좋겠다. H, 33세, 남

 

박사님의 강의 시간

6개월 전 한 데이트 앱에서 N을 처음 만났다. 명문대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똑똑하고 차분한 남자다. 우리는 한동안 썸을 타다가 자연스럽게 연인이 됐다. 그런데 요즘 나는 남자친구 N때문에 마음이 좀처럼 편할 날이 없다. 이건 뭐 남자친구가 아니라 교수님이다. 영화관 데이트를 예로 들어보자. 요즘은 또 왜 하필 역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많은지! <박 열>과 <덩케르크>를 봤는데, 우리 박사님은 그걸 분석해서 해설까지 해주신다. 영화 보는 내내 귓속말로 ‘일본 제국주의가 정확히 뭐냐면~’ ‘저건 영화에서 과장됐네. 실제로는 어떠냐 하면~’ ‘덩케르크라는 지역은 역사적으로 ~’…. 영화관에서 나와 저녁을 먹고 집에 갈 때까지 학자님의 역사 고증은 계속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N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을 꼼꼼히 기록하고 기억한다. 내 머릿속에서는 이미 증발되어버린, 2주 전에 가볍게 뱉은 말도 모두 기억해두었다가 말다툼이 시작되면 내 말문을 막아버리는 무기로 사용하곤 한다. “너 2일 오후에 나한테 보낸 카톡 기억 안 나니? 네 입으로 말했잖아” 하는 식이다. 우리의 연애 스토리로 무슨 역사 논문을 쓸 것도 아닌데 자꾸만 내 감정보다는 사실 관계를 확인하는 데 급급한 N에게 서운할 때가 점점 많아진다. 게다가 나도 모르게 전에 했던 말과 다르게 행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매사 신경 쓰여 미치겠다. 이대로 계속 만날 수 있을까? 뭐가 잘못된 건지 설명하기도 피곤하다. L, 28세, 여

 

럽스타그램의 악몽

그놈의 지긋지긋한 럽스타그램 때문에 B와 헤어졌다. 다시 생각해도 나는 그저 인증샷용 남자친구였던 것 같다. 만날 때마다 하루에 포스팅 7~8개는 기본인데, 그 많은 해시태그를 매번 열심히 다는 B도 참 부지런도 했다. #데이트 #사랑 #배려 #소통 #주말 #우리영원해 #연애스타그램 #신혼스타그램. 결혼도 안 했는데 신혼스타그램이 도대체 왜 등장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두 달간 연애하는 동안 그녀의 인스타그램 피드에는 내 사진만 줄잡아 2백 장은 올라간 것 같다. 우리가 뭘 하는지, 어디에 갔는지, 얼마나 사랑했는지(?) 매일 만천하에 공개됐고, 나는 종종 ‘요즘 행복해 보이더라? 연애에 푹 빠졌더만’ 하는 친구들의 조롱 섞인 메시지를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B를 꽤 좋아했는데, 이틀 전 밥을 먹던 도중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홧김에 이별을 고해버렸다. 식당에서 주문한 파스타가 나와서 포크로 면을 돌돌 말고 있는 내게 B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걸 왜 먹어! 사진 찍어야지 왜 먹냐고! 아, 짜증나!” 소스가 뚝뚝 떨어지는 포크를 든 채 무안해진 나는 순간 열이 확 나서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제발 작작 좀 해라. 야, 연락하지 마. 진짜 피곤하다.” 왜 그렇게 남들에게 못 보여줘 안달인지. 충격이 좀 컸는지 어제부터 B의 인스타그램 피드의 시간이 멈춰 있다. 그나저나 인스타그램 사람 태그는 어떻게 지우는 건지 모르겠네. 오늘은 B가 올린 럽스타그램에서 내 모든 기록을 말끔히 삭제해버릴 참이다. C, 25세,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