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평생 사라져버리지
H는 내 중학교 동창이자 전 남자친구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15년 만에 동창회에서 다시 만났다. 술에 좀 취한 우리는 ‘그때 나 너 좀 좋아했는데’ 하면서 어디서 백 번은 들은 것 같은 식상한 동창회 로맨스로 흘러갔고, 그렇게 가까워진 H와 재회한 지 2주 만에 연인이 됐다. H와 나는 장거리 연애를 했다. 그가 상하이에 살았기 때문이다. 거리는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씩 번갈아 상하이와 서울을 오가며 만났다. 볼 때마다 사이가 꽤 좋은 편이었는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H의 주특기는 뜬금없는 연락 두절. 잘나가다 한번씩 사라져버렸다. 카톡도 읽지 않고 전화도 안 받았다. 그러다 3~4일 후 갑자기 나타나서는 ‘많이 바빴다, 몸이 아팠다, 우울했다, 너 피곤할까 봐 그랬다’는 식의 변명을 구구절절 늘어놨다. 하루는 여느 때처럼 H가 휙 하고 사라져버렸다. 연락이 끊긴 지 8일째 되던 날 나는 이게 어쩌자는 건가 싶어 폭풍 카톡을 보냈다. ‘너 매번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나 너무 걱정되네.’ ‘괜찮은 거야?’ ‘카톡 읽기라도 좀 해.’ H의 회사 메일로 메일도 보냈다. 그건 분명 읽을 테니까. 근데 반응이 없었다. 열흘째 되던 날 또 카톡을 보냈다. ‘너 이번에 너무 심하다. 무슨 사고라도 있는지 많이 걱정돼. 오늘 퇴근길에 너희 어머니께 전화해볼 생각이야. 도대체 어디 있는 거니?’ 카톡 전송 완료. 3분쯤 지나자 H에게 전화가 왔다. “어이쿠, 미안해. 내가 너무 바빴어. 좀 우울하기도 하고. 혼자 있고 싶었어. 많이 걱정했어? 나 잘 있는데. 너도 잘 지냈어?” 나는 소름이 끼쳤다. 엄마한테 전화한다는 한 마디에 즉각 반응하다니.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날 퇴근길에 H의 어머니가 아니라 H에게 전화를 걸어 헤어지자고 말했다. N, 30세, 여
꼭꼭 숨겨라 머리카락 보일라
어제부로 B와의 연애를 끝냈다. 2년 넘게 만났지만 나는 B의 지인을 단 한 명도 만난 적이 없다. B가 유치원 다닐 때부터 친했다는 20년지기 친구 C도 본 적이 없고, 중학교 때부터 학원에 같이 다녔다는 여사친 P도 못 봤다. P는 종종 B를 만나는 자리에 자기 남자친구를 데려와 셋이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나는 그 자리에도 초대받지 못했다. 사귄 지 1년쯤 됐을 때까지만 해도 그냥 그러려니 했다. 아, 이 남자가 신중하고 싶구나 하고. 하지만 해도 너무한다 싶었다. 나는 심지어 B의 생일 파티에도 가지 못했다. “우리는 둘이 따로 파티 하자. 오붓하고 좋잖아.” B는 둘만의 시간이 더 좋다면서 헤헤거렸다. 그제는 B의 승진을 축하하는 술자리가 있었다. 나는 이번에도 함께하지 못했다. “진짜 친한 정예 멤버만 모이는 자리야. 남자끼리 노는 데 오면 너 너무 심심하잖아.” B의 설명은 그랬다. 나는 결국 폭발했다. “왜 자꾸 나는 안 데려가? 오빠 친구들 무슨 문제 있어? 우리 불륜 아니지? 유부남이 아닌 이상 나를 이렇게까지 감출 필요가 있어?” B가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우리 다 직장인이라 회사 얘기밖에 안 하는데 너 오면 소통도 잘 안 되고 솔직히 좀 그렇잖아. 너 취직하면 그때 가자. 너 취준생이라는 거 애들은 모른단 말이야. 너도 괜히 기죽고 싫지 않아? 이해하지?” 나는 멍해졌다. 실실거리는 B의 표정을 보니 욕지기가 치밀었다. 아, 그랬구나. 결국 너는 내가 창피한 거였어. 이제 모든 게 다 설명되네. 2년 동안의 연애가 한순간에 끔찍한 기억이 됐다. 취직이 안 돼 힘들어하던 내 모습이 B의 눈에는 그저 바보 같아 보였던 거다. 모든 위로는 가짜였고. 헤어지자는 말에 B는 도대체 이유가 뭐냐 물었지만 설명할 가치도 없었다. 자랑스러운 어엿한 직장인 여자 만나서 평생 비겁하게 살아라. A, 28세, 여
나는 잘못이 없소이다
관계가 좀 복잡했다. L은 내 전 남자친구고, T도 내 전 남자친구인데 둘은 친구다. L은 1년 전 헤어졌고, T는 최근에 만 었다. L 때문에 T를 알게 됐는데 L과 헤어진 후에도 T와 친구로 지냈다. 문제는 항상 술이다. T와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가 모텔에 갔다. 아무런 대화 없이 섹스만 했다. 다음 날 정신이 든 우리는 해장국도 같이 먹었다. 내가 우리 미친 거 아니냐고 물으니까 T가 이게 뭐 어때서 하고 쿨하게 굴었다. T가 괜찮게 느껴졌다. 연락을 자주 했다. 자주 만나 시간을 보내니까 그냥 이대로 연인이 되어도 좋겠다 싶어졌다. T에게 물었다. “우리 무슨 관계야? 너 L한테 나 보는 거 말했어? 계속 만날 거면 관계를 좀 정리하는 게 어때?” T는 대답했다. “우리 사귀는 거 아니야? 우선은 비밀로 하자. 내가 준비되면 알아서 정리할게.” 어딘가 믿음직스러웠다. 두 달 정도 비밀 연애를 지속하다가 자꾸 숨어 지내는 기분이 들어 이참에 L에게 고백해버리자고 T를 설득했다. T는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T와 손을 잡고 걸어가다가 L을 마주친 거다. T는 그 순간 내 손을 확 던지듯 놨다. L이 일단 앉아서 얘기하자며 T를 데려갔고 나는 뻘쭘하게 뒤따라 카페로 들어갔다. “둘이 뭐야? 사귀는 거야? 야, 내 전 여친 만나면 만난다고 말을 하지 왜 숨어 다니냐?” L이 따졌다. 내가 나서서 화를 냈다. “황당한 건 알겠는데, 내가 왜 네 허락을 받아야 되니? 누가 누굴 혼내 지금!” 나는 그렇게 쏘아붙이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T가 곧장 나를 따라와 불러 세웠다. 나를 붙잡는구나 싶었다. T에게 왜 그렇게 벙어리처럼 아무 말 못 하고 앉아 있느냐고, 우리가 좋아하는 게 죄냐고 따졌다. T가 울상이 되어 말했다. “진정 좀 해. 솔직히 우리 그냥 잠만 몇 번 잔 거잖아. 그냥 미안하다고 하고 넘어갈 일이지 우리 뭐 있는 것처럼 묘하게 굴고 그래. 괜히 나만 나쁜 놈 됐잖아. L한테 가서 말해. 사귀는 거 아니고 우리 그냥 실수했다고.” 치졸하고 비열한 놈. 대단한 우정 지키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J, 26세,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