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상을 지향하는 당신, 누군가로부터 ‘의외로 소녀 취향이 있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떤지 상상해보자. 핑크와 파스텔, 레이스와 꽃무늬, 글리터 등 소녀 취향이라는 표현이 함의하는 기표와 의미가 당신에게 부정적인 뉘앙스로 다가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진은 태생적으로 제1세계 국가의 중산층 비장애인 남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발전해왔다. 남성은 주로 찍는 존재로, 여성은 피사체가 돼 카메라 앞에 섰다. 대상화된 여성, 그중에서도 소녀라면 ‘자고로’ 순결과 순종을 상징하는 흰색이나 분홍색으로 대변되는 존재여야 했다. 일찍이 페미니스트들은 남성 중심적 미의식에 복무하는 연약하고 순진한 존재로 그려낸 소녀 판타지에 분노했고, 소녀의 성적 대상화와 이들을 가두는 순결 프레임에 저항했다. 그렇게 의식적으로 ‘소녀성(girlhood)’과 ‘여성성’을 거부했다. 이것이 소녀와 핑크를 주 소재로 삼는 밀레니얼 세대 여성 사진가들의 작업을 처음 봤을 때 어딘가 불편하게 느껴진 이유다. 이 젊은 작가들을 남성적 시선의 폭력을 인지하지 못하는 미계몽 상태의 어린 존재로 치부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이들은 외려 남성들에 의해 잃어버린, 자기 검열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포기했을지 모를 소녀성을 되찾고 복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녀 취향과 소녀성을 버려 마땅한 것으로, ‘예쁘지 않은 여성’이 되기를 강요했던 구시대의 페미니즘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2000년대 초까지 펼쳐진 여성운동과는 전혀 다른, 정반대의 논조를 지닌 이 현상을 두고 혹자 는 ‘제4차 페미니즘 물결’이라 말한다.
툭 던져놓은 브래지어, 핑크색 플라스틱 탐폰과 생리컵, 핫팬츠 사이로 보이는 끈 팬티, 레이스 블라우스 사이로 비치는 겨드랑이 털···. 밀레니얼 세대의 여성 사진가들은 파스텔색이 뒤덮은 소녀들의 방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사진에 담는다. 이 변화의 시작에는 ‘셀피’와 ‘인스타그램’이 있다. 여성 작가 40인의 작업물을 모은 사진집 <Girl on Girl>의 저자 샬로테 얀센(Charlotte Jansen)은 제4차 페미니즘의 시작점을 2010년이라 규정한다. “2010년은 애플이 아이폰 액정에 ‘셀피’가 가능한 카메라를 탑재한 해로 이때부터 소녀들은 더 이상 ‘찍히지’ 않고 본격적으로 자신을 직접 찍기 시작했다. 이들의 이미지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퍼져나갔고 이내 또래 소녀들의 워너비이자 롤모델이 됐다. 이 작가들은 인스타그램을 효과적인 홍보 매체로 활용할 줄 알았으며, 그 안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그 대표적인 사진가가 페트라 콜린스(Petra Collins @petracollins), 마얀 톨레다노(Mayan Toledano @thisismayan), 아르비다 뷔스트룀(Arvida Bystrom @arvidabystrom)이다. 이들의 인스타그램 계정 팔로어는 각각 65만, 10만, 25만 명에 이른다.
1990년생의 마얀 톨레다노는 미국 교외에서 살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담는다. 그의 사진은 부스스한 머리, 키치한 오브제, 롤리팝 등 과거 존 휴스와 소피아 코폴라가 제작한 1990년대 청소년 TV 시리즈의 분위기가 생생하다. “패션 스쿨을 다닐 때만 해도 여성적인 성향은 배제해주길 바라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좀 더 진지한 사람으로 비치도록 말이죠. 물론 전 동의하지 않았죠. 소녀적이고 여성적인 취향이 왜 가벼운 것이죠?” 그녀는 SNS를 이용한 연대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SNS의 장점은 스스로를 창의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거예요. 아무리 독특한 취향과 성향을 지녔다 해도 드넓은 SNS 세계에서라면 누구라도 자신과 비슷한 이들을 만나 연대하고 주체적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어요. 그러니 더 이상 매스미디어가 가르치는 획일화된 여성상을 좇을 필요가 없어요.” 혹자는 ‘feminist’라는 단어가 새겨진 속옷을 판매하는 그녀의 란제리 라인 ‘미앤유(Me and You)’를 들며 그녀가 페미니즘을 상업적으로 이용한다고 비난한다. 그렇다고 해도 톨레다노를 따르는 수십만 명의 여성에게 그녀가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더 많은 젊은 여성이 여성성이라는 편견에서 해방되길 바랍니다.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되찾고 자신과 더 친밀해지세요.”
페트라 콜린스를 구찌의 뮤즈이자 얼굴로 떠올릴 이들이 더 많을지 모르지만 그녀는 모델 이전에 사진, 퍼포먼스 영상 및 설치미술을 아우르는 아티스트다. 1992년생의 캐나다 출신 아티스트로 열다섯 살에 사진 작업을 시작한 그녀는 아메리칸 어패럴의 ‘생리혈 티셔츠’를 선보이며 이름을 알렸다. 생리하는 성기를 자위하는 스케치를 프린트한 그녀의 티셔츠는 출시와 동시에 ‘완판’됐다. 콜린스는 지방, 머리카락, 피 등 통념적인 소녀 이미지와 먼 대상들을 핑크 톤 위에 결합시킨다. 그는 페미니즘을 중심으로 하는 메시지 강한 작업을 해왔지만 그러한 작업이 자신의 상업적 활동에 전혀 장애가 되지 않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구찌를 비롯해 코스, 리바이스, 반스 등 패션 브랜드의 잇단 러브콜이 이를 증명한다. 사진집 <Petra Collins: Coming of Age>(Rizzoli New York)에서 그녀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아르비다 뷔스트룀은 독창적이고 반어적으로 자신의 몸을 탐구하는 스웨덴 아티스트다. 여성이 어떻게 성장하고 변화하고 늙는지 보여주기 위해 자극적인 셀피를 활용하는 그녀에게 여성의 몸은 유혹하는 수단이 아닌 살아 있는 존재 그 자체다. 높은 수위의 이미지들 때문에 인스타그램 운영팀이 정기적으로 그녀의 계정을 검열할 정도. 그녀가 지금까지 작업해 온 작품들은 동료 몰리 소다(Molly Soda)와 함께 낸 책 <Pics or it Didn’t Happen>(Prestel)에 담겨 있다. 최근 아르비다 뷔스트룀은 종아리 털을 제모하지 않은 채 아디다스 화보를 촬영해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녀를 향한 케케묵은 비난과 논쟁이 지금 21세기에 현재 진행 중이다.
이 과감한 여성 사진가들은 제도적인 문화계와 패션계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미쏘니의 2017 F/W 컬렉션에서 안젤라 미쏘니는 초청자들에게 ‘핑크 푸시 햇(pink pussy hats,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면서 고양이를 의미하기도 하는 단어 ‘pussy’를 상기하고자 만든 핑크색 모자)’을 선물했다. 패션 브랜드의 열렬한 러브콜에 조응하듯 세계 미술을 움직이는 모마(MoMa)와 아트 바젤이 이 여성 작가들을 초청하고 있다. 콜럼버스 아트 앤 디자인 대학의 비주얼학부 교수인 카르멘 위넌트(Carmen Winant)는 웹사이트 ‘애퍼처(Aperture)’에 ‘우리의 몸, 온라인: 인스타그램 시대의 페미니스트 이미지(Our Bodies, Online: Feminist Images in the Age of Instagram)’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게시했다. “소녀들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이들 스스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시선을 통제하고 검열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들의 작업은 의미가 크다. 그렇게 핑크색은 오늘날의 ‘임파워먼트(empowerment, 일반적으로 ‘힘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지만 여성운동과 여성학에서는 여성의 사회·경제·정치적 지위 향상을 위한 전략적 개념으로 1980년대부터 사용되었다.)’의 수단이 되고 있다. 이들의 ‘핑크 메시지’가 SNS와 매스미디어, 예술과 패션에서 퍼졌다면 앞으로는 이 땅의 소녀들이 사용하는 모든 핑크색 물건들, 머리핀과 펜, 아이폰 케이스가 임파워먼트 오브제로 그 역할을 다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