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역에서 오른 농어촌 버스가 산을 넘었다. 전북 진안에 자리한 위빳사나 명상센터인 담마코리아로 향하는 길이다. 버스가 산길을 따라 굽이쳐 오를 때마다 차창에 나란히 매달린 인형이 힘없이 대롱거렸다. 맙소사, 내가 무슨 짓을 벌인 걸까. 명상의 길에 오르던 당시의 나는 회복이 불가능할 것만 같은 바닥을 찍던 참이었다. 무언가를 마시던 컵을 느닷없이 떨어뜨리고, 방바닥을 구르며 울다 아무렇지 않게 전화를 받고, 몸에 우물 같은 것이 있어 자꾸만 그 속에 빠지고 싶던 마음의 병이 없었다면 이 길을 나서지 않았으리라. 명상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는 수다스러운 미국 청년과 함께 센터로 향했다. 그는 자국에서 원하는 시기의 코스에 참여하려면 2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대체 이게 뭐라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라는 뜻을 지닌 위빳사나는 한마디로 붓다의 수행법이다. 미얀마의 사업가 고엥까 선생님이 미얀마의 불교 공동체에서 명맥을 겨우 유지하던 이 명상법을 인도와 전 세계를 돌며 지도하면서 많은 이들을 위빳사나의 세계로 이끌었다. 현재 2백여 개 도시에 자생적으로 세워진 명상센터는 100% 기부와 봉사로 운영된다. 다시 말해, 누구라도 전 세계의 센터를 찾아 무료로 명상 코스에 참여할 수 있다.
명상 기간의 규율은 다소 엄격하다. 새벽 4시 30분부터 오후 9시 30분까지, 매일 10시간 이상 명상이 이어지며 살생, 도둑질, 성적인 행위, 거짓말, 취하게 하는 물질을 금한다. 스마트폰은 센터에 맡기고 코스 내내 ‘거룩한 침묵(noble silence)’을 지킨다. 눈인사나 몸짓, 묵례 등을 삼가며, 요가나 노래, 읽기와 쓰기 등의 행위도 허용되지 않는다. 숙소는 1인 1실이지만, 개인 명상실과 다름없기에 깨어 있는 동안 5분 이상 누워 있지 말아야 하며, 운동도 지정된 산책길에서 걷기 운동만 할 수 있다. 서리가 소금꽃처럼 내려 앉은 안개 낀 새벽에 홀로 산책하던 시간이 지금도 종종 그립다. 정갈한 채식 밥상에는 언제나 맛깔스러운 전라도 찬과 매번 다른 죽이 올라왔다. 전주 튀각, 호박고구마는 단연코 최고의 맛이었고.
명상홀에 남녀 무리가 가운데 사이를 띄우고 양쪽으로 나뉘어 앉고, 외국인 지도사 두 분이 참가자들을 마주 보고 앉았다. 지도사들은 명상 프로그램이 이어지는 시간 동안 단체 명상을 이끌고 질의응답과 개인 면담을 통해 명상을 잘할 수 있도록 돕는다. 나는 명상에서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지정된 자리에 방석을 두툼하게 쌓고 최대한 편하게 자리를 잡았다. 침묵이 내려앉은 명상홀에 고엥까 선생님의 독송이 스피커에서 울리면서 본격적인 명상이 시작됐다. 그의 가이드에 따라 윗입술의 미세한 감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호흡을 쫓다가도 순식간에 온갖 망상과 쓸데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뒤죽박죽 헤집었다. 졸기 일쑤고, 내 몸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를 다른 사람들이 듣는 것 같아 신경이 곤두섰다. 매일 저녁 녹음된 고엥까 선생님의 법문을 듣지 않았더라면 일찌감치 명상을 포기하고 센터를 나왔을지도 모른다. 집중력을 기르는 사흘의 훈련 기간이 지나자 위빳사나 명상에 본격적으로 들어갔다. 고엥까 선생님의 가이드는 언제나 같았다. 머리에서 발끝으로 이동하며 주의를 집중해 몸에 일어나는 신체 감각을 느끼라는 것. 내 정수리, 눈썹, 정강이에 대체 어떤 감각이 있다는 것인지…. 나는 계속해서 실패하고 수차례 원점으로 돌아갔으며 여러 번 답답함을 토로했다.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계속 정진하세요”라는 대답만 돌아왔지만.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명상이 뭐 별건가. 멍때리며 시간을 보내는 건 내가 또 잘하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명상은 절대 쉽지 않으며, 뇌를 매 순간 열심히 사용해야 하는 ‘하드 코어 브레인 스포츠’라는 것을. 시간이 지날수록 열, 냉기, 무거움, 가벼움, 가려움, 두근거림, 수축, 확장, 압박감, 고통, 얼얼하고 쑤시는 느낌, 진동, 떨림 등의 육체적 감각을 알아 차리면서 나는 미세하고 미묘한 감각을 냉철하게 관찰하는 데 익숙해졌다. 그러는 동안 독특한 체험을 하기도 했는데, 주의 집중 상태가 몸을 따라 막힘없이 이어지다가 3년 전 수술했던 장기의 묵직한 감각에 한참 머무르거나, 불쾌한 통증이 시원하고 깨끗한 느낌으로 변했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법문에서는 인내심을 갖고 계속 명상을 하면 이러한 감각처럼 마음과 물질의 실제가 끊임없이 변화하며 무상하다는 ‘아닛짜(anicca)’를 이해하게 된다고 말한다. 명상을 한 지 정확히 7일째 되던 날 난 애쓰지 않아도 한 시간은 발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명상할 수 있게 되었다. 명상은 힘들었지만 신체의 고통이나 외부 환경의 불편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온몸에 폭포수가 쏟아져 내리는 느낌을 받기도 했는데, 다시 감각에 주의를 집중할 때마다 놀라울 만큼 청명한 평정을 누렸다. 이게 뭘까, 대체 뭘까.
수천 년간 이어온 위빳사나 명상의 심오한 진리를 10일 안에 깨닫기는 불가능하지만,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훨씬 빨리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명상이 마음속 깊은 상처에 고약을 바르고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것 같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깨닫게 만드는 삶의 기술 훈련을 받았다고 하면 좀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코스 마지막 날 침묵 수행이 끝나자 명상을 시작할 때만 해도 다크서클 짙고 의뭉스러워 보이던 사람들의 인상이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그들은 각자의 느낌을 나누고 직접 겪은 몸과 마음의 구체적 변화에 대해 소리 높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마치 이 순간의 감정을 절대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매년 두 달간 모든 소통을 차단하고 인도의 위빳사나 명상 프로그램에 참여한다고 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스웨덴 시골 마을의 명상 코스 일정을 알아보려고 인터넷을 뒤적거리는 중이다. 두 달은 좀 어려울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