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남는다
< 해가 지는 곳으로>
특유의 박력 있는 서사와 긴 여운을 남기는 서정으로 ‘사랑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꾸준히 그려온 최진영 작가의 다섯 번째 장편소설. 정체 모를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뒤덮은 대혼란의 시기. 감염된 사람들은 순식간에 죽어가고, 살아남은 이들은 안전한 곳을 찾아 끝 모를 여정을 떠난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동생 ‘미소’를 지키며 맨몸으로 러시아를 걸어온 ‘도리’는 밤을 보내기 위해 머문 어느 마을에서 일가친척과 함께 세계를 떠돌던 ‘지나’를 만난다. 타인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하고, 모든 감정이 죽어버렸다고 믿은 폐허 속에서도 두 여성은 사랑한다. 도리와 지나 커플 외에도 가난에 치여 사랑을 미뤄왔던 연인 ‘류’와 ‘딘’이 서로를 다시 바라보는 과정도 담겨 있다. 최진영 작가는 이 지난하고 아름다운 과정을 함께 통과하며 아래 몇 줄을 남겼다. “언젠가 인류가 멸망하고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이 한 줌 재로 돌아갈 그날에도 사람들은, 당신은, 우리는 사랑을 할 것이다. 아주 많은 이들이 남긴 사랑의 말은 고요해진 지구를 유령처럼, 바람처럼 떠돌 것이다. 사랑은 남는다. 사라지고 사라져도 여기 있을 우주처럼.” 민음사
기억하는 힘과 잊는 힘
< 히로시마 내 사랑>
시작부터 강렬하다.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로 생긴 버섯구름, 그리고 그 너머 벗은 두 어깨가 나란히 모습을 드러낸다. 독자는 서로를 끌어안은 두 어깨가 섹스에 몰두하는 몸인지 죽음을 앞에 두고 고통에 사로잡힌 몸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때는 2차 세계대전, 평화를 주제로 한 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히로시마에 온 프랑스 여성 ‘엘르’가 우연히 일본 건축가 ‘루이’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종종 현재의 사랑은 과거의 사랑이 남긴 비극을 상기시키곤 하는데 엘르 역시 찬란한 순간에 옛사랑을 떠올린다. 그녀가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를 점령했던 독일군과 사랑에 빠지며 겪었던 참극이 동시 교차하며 이야기가 흐른다. 영화 <연인>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원작을 쓴 프랑스 현대문학의 거장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1959년에 완성한 시나리오 <히로시마 내 사랑>에 소설적인 요소를 포함한 새로운 형식의 이야기가 마침내 국내에 번역되었다. 작가 특유의 낭독하는 듯한 어조, 문장의 독특한 리듬감을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을 고전이다. 민음사
사랑의 소강
< 홀딩, 턴>
4월의 어느 일요일 오후, 결혼 5년 차의 ‘지원’과 ‘영진’이 테이블에 앉아 헤어짐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하루 치의 시름을 함께 덜어내던 그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서. 사랑의 소강과 소멸의 과정을 현실적으로 써내려간 장편소설 <홀딩, 턴>. 애써 고른 테이블에 생활의 얼룩이 지듯 사랑은 쉽게 변형되고, 감정 앞에서 자주 초라해지며, 관계에 대한 회의가 퍼지는 그 일련의 이별 단계를 작가는 차분히 밟아간다. <판타스틱 개미지옥>으로 문학수첩 작가상(2007)을, 같은 해 <쿨하게 한걸음>으로 창비장편소설상을 받으며 한 시대에 담긴 인간 군상을 세밀히 그려온 서유미 작가의 신작이다. <홀딩, 턴> 속 섬세하고 아프게 파고드는 묘사를 두고 소설가 정이현은 이런 문장을 남겼다. “파국을 앞둔 부부에게도 사랑으로 반짝이던 순간들이 존재했음을, 사랑으로 지었던 건축물이 무너졌다고 해서 오직 폐허만이 남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이제 알게 되었다”라고. 위즈덤하우스
좀처럼 찾기 어려운
<연애의 행방>
추리소설의 대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연애소설이라니. 심지어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다. <백야행>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등을 펴낸 히가시노 게이고가 데뷔 20년 만에 첫 연애소설을 완성했다. 스노보드를 즐기는 겨울 스포츠 마니아답게 <백은의 잭> <질풍론도> <눈보라 체이스> 등 설원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유독 많았던 히가시노는 첫 연애소설의 배경 역시 스키장으로 설정했다. 의문의 살인, 추격이 펼쳐지는 백색의 공간을 복잡다단하고 지질한 연애의 무대로 옮긴 것. 숨겨둔 애인과 스키장에 놀러 왔다가 곤돌라 안에서 약혼녀를 맞닥뜨린다거나 최고의 프러포즈를 하기 위해 애써 스키장까지 왔는데 의외의 상황에 봉착한다거나 스키장 단체 미팅에서 인연을 만난다거나 하는 저마다의 웃기고 곤란한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평범한 사람들의 흔한 연애 소동담을 계속 읽게 되는 건 작가가 그 속에서 한심하고 이기적이며 때로 과감한 인간 군상을 유쾌하게 포착했기 때문이다. 속절없이 꼬여버린 연애 전선을 풀어내는 히가시노 특유의 입담도 여전하다. “사랑하는 데는 연애보다 더 큰 각오와 배짱이 필요하다, 이 소설을 쓰면서 다시 한번 생각했습니다”라고 소회를 밝힌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음 연애소설을 기다린다. 소미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