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용 비커에 심은 선인장, 삼각 플라스크에 수경재배하 는 테이블야자, 유리 병 속 이끼와 다육이로 세렝게티를 꾸며놓은 작은 테라리움. ‘슬로우파마씨’의 식물들은 과학 기구와 밀폐된 유리그릇 속에서 숨 쉬고 있다. “과학 기구를 모으는 취미가 있어요. 실험을 하는 건 아니고 오브제로 두고 봤는데, 여기에 키우던 식물을 매치하고 SNS에 사진을 올린 것이 슬로우파마씨의 시작이었어요.” 이구름과 정우성 부부는 식물로 할 수 있는 일에 경계를 두지 않고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실내·외 조경과 식물 스타일링, 식물 아트워크까지 식물 처방이 필요한 이들에게 환경에 적합한 식물을 제안한다. “무엇보다 식물을 의뢰한 사람이 잘 키울 수 있는 종으로 추천하고 있어요. 자기 환경에 맞지 않는 식물을 욕심내는 분들께는 단호하게 말씀드려요. 그런데도 키운다고 가져가시곤 하는데 그러면 어김없이 얼마 못 가 죽습니다.” 미세먼지 때문에 텁텁한 공기로 숨 쉬어야 하는 봄, 슬로우파마씨의 처방은 공기 정화 식물이다. 공기 정화 능력이 탁월한 틸란드시아는 이오난사, 수염틸란드시아, 세로그라 피카 등 종류도 다양한데, 입문자에게는 이오난사를 추천한다. 일주일에 한 번 물에 1분 정도 담가주고 통풍이 잘되는 곳에 놓아두면 부지런히 먼지를 먹고 신선한 산소를 만들어낸다.
식물을 처음 키우려는 사람들에게 부부는 먼저 하나만 들인 후 친해지는 과정에 공을 들이라고 조언한다. 식물을 들이는 일은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는 일과 비슷해 나와 내 공간에 잘 맞는 식구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제 가족을 찾아간 식물들이 간혹 병들어 돌아올 때도 있다. “어떻게 다루면 이 지경이 됐을까 싶을 만큼 처참한 모습으로 돌아온 셀로움 나무가 있었어요. 줄기가 몇 가닥 남아 있지 않았는데 좋은 흙을 마련해주고 영양제도 듬뿍 주며 1년 동안 정성으로 간호했더니 다시 살아나더라고요. 지금은 우리 집에 있는 여느 나무보다도 멋지게 가지를 뻗고 있답니다.”
요즘 슬로우파마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제품은 살아 있는 식물이 아니다. 뿌리 없이 나뭇잎과 나뭇가지, 가는 잎 식물을 특수 보존액에 담아 오래두고 볼 수 있는 식물 표본이다. “겨울에 마른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꽃봉오리가 참 멋있거든요. 마른 이파리나 보존된 꽃이 담긴 유리관을 사면 식물이 품고 있는 계절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갖게 되는 거예요.” 상수동에 쇼룸 오픈을 앞둔 슬로우파마씨는 가드닝 제품과 함께 그동안 전시할 공간이 없어 간직해 온 새로운 디자인의 식물들을 선보인다. “요즘은 술병처럼 두툼한 뿌리를 내린 덕구리난이나 두꺼운 이파리 사이로 선홍빛 꽃을 틔우는 군자란처럼 시골 할머니 집에서 봤을 법한 복고풍 식물들이 눈에 들어와요. 근래 유행하는 여린 식물이 아니라 튼튼하고 굳센 녀석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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