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VEL 1 침대 위의 밀당

우리는 꽤 로맨틱한 밤을 보내는 편이다. 미디엄 템포의 음악을 배경으로 향초를 켜고 와인을 홀짝이며 눈빛을 교환하다 침대에 슬로모션으로 포개지는 뭐 그런 전개. 하지만 와인이 한두 잔이 아니라 병 단위로 넘어가는 밤이면 간혹 그와 나 사이에 밀당의 신호가 켜진다. 사실 크게 특별한 건 없다. 평소 같으면 내 뒤통수를 손으로 받치며 침대에 곱게 뉘일 남자친구가 이런 날엔 이불 위로 나를 던지듯 넘어뜨리거나 정상위 상태에서 내가 예고 없이 그의 팔을 한쪽으로 있는 힘껏 끌어당기며 여성상위로 포지션을 홱 바꾸는 식이다. 취기가 약간 오른 상태에서 우리는 마치 주도권을 잡으려는 경쟁자들처럼 눈에 불을 켜고 서로 밀치고 당긴다. 그런 승부욕 섞인 에너지 때문일까, 오르가슴의 쾌감도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다. 물론 휘몰아치듯 섹스가 끝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우리는 세상 다정한 연인으로 돌아간다. 우리의 섹스가 위험하다고 느낀 적은 없지만 딱 한 번 나를 밀치던 그가 탁자 위의 긴 촛대를 넘어뜨리면서 탁상용 캘린더 모서리에 불이 붙은 적이 있다. 초가삼간, 아니 8평 원룸을 태울 뻔한 그날 이래로 밀당의 밤에는 절대 촛불을 켜지 않는다. K, 대학생(23세)

 

 

SAFETY RULES

– 둘 중 한 명이 더 이상 원하지 않으면 즉시 멈춘다. 욕심을 부리는 순간 섹스가 아니라 폭력이 된다.
– 특정 단어를 외치거나 특정 부위를 두드리는 식으로 둘만의 정지신호를 정한다.
– 약간의 술기운은 거침없는 밤을 보내는 데 약이 되지만, 힘과 감정을 조절하기 어려운 정도의 만취 상태는 위험하다.

 

 

LEVEL 2 너를 구속하려 해

사귄 지 3년 차, 섹스 권태기에 빠져 있던 우리를 다시 침대로 불러들인 건 바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묶은 리본이었다. 처음엔 남자친구가 내 목에 초커처럼 리본을 둘러주며 장난을 치다가 분위기가 묘해졌는데, 그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내 목에 둘렀던 리본을 풀어 내 양 손목을 바짝 묶었다. 그러고는 내 팔을 들어 올려 묶인 손목 안쪽으로 자신의 머리를 쓱 들이밀더니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오 마이 갓, 전에 수없이 한 키스인데 손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왜 전에 없이 흥분되는지, 그날 밤 나는 손이 묶인 채 그의 손길이 닿는 곳곳에 전율을 느끼며 아주 오랜만에 절정에 이르렀다. 그렇게 눈을 뜬 ‘결박 플레이’는 알고 보니 원하는 만큼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전천후 스킬이었다. 로맨틱한 무드에서는 부드러운 실크 스카프가, 좀 더 거칠어지고 싶을 때는 가죽 벨트가 한몫 톡톡히 한다. 특히 벨트는 스팽킹 도구로도 쓸 수 있는 효자 아이템이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결박 도구는 그의 아르마니 넥타이다. 남자친구가 그걸 메고 있는 날이면 우리는 여지없이 뜨거운 섹스를 한다. 수트를 차려입은 그가 타이를 풀어 헤치는 모습도 섹시한데, 이제는 그 넥타이로 손목, 발목에 각종 매듭을 능숙하게 만드니 어쩐지 남성미가 배가됐달까. 내친김에 요새는 하니스를 검색하고 있다. 몇몇 제품의 무시무시한 생김새에도 불구하고 다리를 고정하는 가죽 서스펜더는 꽤 실용적으로 보인다. 나의 결박 판타지는 당분간 지속될 듯하다. L, 마케터(30세)

 

 

LEVEL 3 사랑은 흔적을 남기고

찰싹! 허공을 가른 그의 손바닥이 내 엉덩이에 내리꽂히며 차진 소리를 낸다. 살갗이 따끔한 와중에 묘하게 느껴지는 찌릿함. 작년부터 사귀기 시작한 남자친구는 알고 보니 스팽킹의 달인이었다. 엉덩이를 때린다고? 벨트로! 그건 영화에나 나오는 이야기 아닌가 했다. 어느 밤 둘이 야릇한 장난을 치다 그가 단번에 나를 돌려세우더니 내 엉덩이에 번개같이 스매싱을 날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정신이 확 들어 뭐 하는 거야? 하고 정색하고 돌아보았는데, “내 거기를 화나게 했으니 벌을 받아야지” 하고 말하는 그의 표정이 장난스러우면서도 음험한 색기가 넘쳐 나도 모르게 수긍해버린 게 여기까지 왔다. 우리는 지금 스팽킹은 물론 종종 섹스 중 서로 할퀴거나 깨물기도 한다. 주로 나는 정상위에서 그의 등과 엉덩이를 할퀴고 어깨나 팔을 깨무는 편이고, 그는 후배위에서 내 엉덩이를 그러쥐듯 할퀴는 걸 좋아한다. 물론 시행착오도 있었다. 나는 가끔 그의 뺨을 때리기도 하지만 내가 뺨을 맞는 건 싫어하고, 그는 등은 세게, 엉덩이는 살짝만 할퀴어주길 바란다. 성인용품 숍에서 큰맘 먹고 지른 니플 클립은 유두를 살짝 아린 정도만 집어주는 게 마음에 들었지만, 채찍은 안타깝게도 맞아보니(!) 감촉이 영 내 취향이 아니라 한 번 쓰고 모셔두고 있다. 서로의 한계점을 파악하니 섹스는 짜릿하지만 선을 넘어서진 않는다. 가끔 섹스 후 선명히 남은 서로의 손자국을 보면 미안함 반, 뿌듯함 반 섞인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J, 회계사(3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