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 찾아오지만 우리가 미처 감지하지 못한 기적들에 대한 기록’. 시인 이은규가 이지혜의 시를 두고 남긴 말이다. 이지혜가 기록하는 순간은 오늘 당신이 본 풍경과 다르지 않다. 정류장과 버스 안, 극장과 공원에서 사진 찍듯 마음에 담은 찰나를 산문으로 풀고, 이내 시를 완성한다. 이지혜는 그렇게 쌓아온 산문과 시를 나란히 한 권에 담은 새로운 형식의 책 <조각의 유통기한>을 발표했다. 그는 산문집인지 시집인지 우왕좌왕하는 이들을 위해 이 책을 ‘노트’라 부른다. 이런 이유로 <조각의 유통기한>은 서점의 산문 코너에도, 시집 코너에도 진열돼 있다.
시마다 덧붙은 산문을 먼저 읽으며 시가 탄생하는 순간을 목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새롭다. 시와 가깝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읽기의 즐거움을 새삼 깨칠지도 모른다. 나아가 시는 시대로, 산문은 산문대로 읽어도 무방하다. 하지만 ‘시의 풀이’ 혹은 ‘시의 사연’이라 할 만한 글을 시 바로 옆에 둔다는 건 시인에게 꽤 큰 모험임이 분명하다. 누군가는 해석에 담을 치고, 시를 가두는 일이라 염려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려를 뛰어넘는 건 대중과 시가 더 가까워졌으면 좋겠다는 시인의 바람이다. 그녀가 직조한 매일의 시를 누군가 단 몇 조각만이라도 매일 읽기를 바라는 마음. 서른을 넘긴 젊은 시인이기에 가능한 시도이기도, 마음이기도 하다.
‘이제야’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등단할 때 나와 동명의 시인이 두 명이나 있었다. 무엇보다 시를 쓰는 순간에는 다른 이름을 쓰고 싶었다. 늘 글을 쓰지만 시를 쓸 때는 유독 다른 사람이 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시에 접근하는 태도 때문인 것 같다. 아무래도 시는 산문과 달리 상태와 감정을 오랜 시간 바라봐야 한다는 장르적 특성이 있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시는 늘 ‘비로소’ ‘이제야’ 완성된다. ‘이제야’는 내가 좋아하는 단어다. ‘말하고 있는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라는 사전적 뜻이 시를 쓰는 일과 밀접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번 책 <조각의 유통기한>은 본명으로 발표했다. 이제야라는 이름으로 등단한 지 올해로 6년째인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뭐 하나만 봐도 시로 얽고 싶어 하고, 시어를 짜내서 뭐든 만들려고 하더라. 시에 대한 강박이 심상치 않던 차에 시집이자 산문집인 이 책을 작업하게 됐다. 완전히 시집이라 할 수 없으니 시도 긴장도 잠시 내려놓고 본래의 내 이름을 붙였다.
작가 노트라 할 수 있는 산문이 시마다 붙어 있다. 이런 형식의 책이 과거에 있었나? 없는 걸로 안다. 주변에서 만류도 했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형식으로 책을 묶은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시를 쓸 때는 그 시를 쓰게 만드는 이야기가 있다. 시가 되는 이야기들을 늘 메모하는데 이를 작가 노트처럼 묶고 싶었다. 둘째 이유가 결정적인데 시를 좋아하지만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집이 인기 있다고 하지만 정작 많은 사람이 어려워하고 끝까지 읽지 못한다. 이들에게 좀 더 친숙하게 다가가고 싶다. 시와 산문을 함께 내밀며 시와 산문을 같이 혹은 각각 따로 읽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시를 만나길 바랐다. 그게 젊은 시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도 생각했고.
하지만 시는 태생적으로 오해의 장르다. 같은 문장이라 해도 저마다 이해하는 것이 다르고, 그 다름이 시를 매력적으로 만들기도 하는데 작가 노트가 자칫 해석의 즐거움을 막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나? 밤새워 고민했던 부분이다. 시의 이런 특성 때문에 나 역시 시를 좋아하고, 쓰게 됐으니까. 내가 시를 가두는 것은 아닌지, 산문이 자칫 해설집이 되는 것은 아닌지 고민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짝지어 놓은 시와 산문이 완전히 같은 내용이 되지 않도록 했고 중복되는 단어는 삭제했다. 산문은 머릿속에 그려지는 장면 정도로만 그 기능을 하게끔 정리했다. 독자들은 어떻게 읽고 있는지 궁금하다.
독자들이 시를 낯설지 않게 느끼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책 같다. 인스타그램에서 내 책을 두고 #시입문서 #초급반시 등의 해시태그를 붙이더라. 흔히 시를 두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나. 이는 우리가 처음 시를 접한 방식의 문제인 것 같다. ‘해야 솟아라’ 하면 ‘해’에 동그라미 치고 ‘조국의 독립을 상징’ 이렇게 쓰지 않았나. 뭘 자꾸 해석하려 하는 것이 시를 더 어렵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 같다. 하지만 시에는 읽는 것 자체만으로도 좋은 문장들이 있다. 정확히 어떤 뜻인지 모르지만 외우고 싶은 문장을 발견하는 것. 이게 시 읽기의 즐거움이고 이 기쁨을 많은 이들이 같이 느꼈으면 좋겠다.
매일의 글을 정리해 시로 완성하는 과정에서 본인만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인가? 탈고 후 고치지 않는 편이다. 보통 함축적이면서도 새로운 표현을 하기 위해 단어를 많이 바꾼다. 한 번 뒤틀어보고 다른 단어를 넣고, 어순을 바꾸고 해체하고 하면서 다양한 시도를 하는 거다. 그런데 나는 이런 작업을 잘 하지 않는다. 탈고를 할수록 당시 내 감정이 사라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뜻 모를 거창한 단어를 가져다 쓰기보다 솔직한 단어로 숨통을 틔우고 문은 닫지 않는, 그런 시를 쓰고 싶다.
반면 젊은 작가들의 실험적인 시를 선호하는 문단 내 분위기도 무시할 수는 없다. 젊은 시인의 실험적인 시에 대해 문단이 기대하는 바가 크고 특정적이다. 난해하고 파괴적이고 독창적이며 어려운 시. 젊은 시인만이 잘 쓸 수 있는 스타일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20대, 30대에만 가질 수 있는 특정한 감성, 혹자는 오글거린다고 할 수도 있는 젊은 서정이 있는데 그걸 애써 숨기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등단 초기에는 선배들에게 ‘20대의 시가 왜 이렇게 말랑말랑해?’ ‘시가 쉽다’는 말도 들었다. 그런 의견에 힘들어할 때 또 다른 선배들은 두리번거리지 말고 가던 길 쭉 가라고 했다. 그 말을 믿고 계속 썼다. 물렁하고 부드러운 지금 감성을 잃지 않고 싶다. 10년이 지나면 쓰고 싶어도 못 쓰게 될 테니까. 그 때문인지 또래 독자들의 메일도 받고, 인스타그램으로 응원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잘 팔리고 있다. 출간한 지 한 달 반이 지났는데 1쇄를 넘겼다고 들었다. 인스타그램 마케팅의 효과도 크다. 표지를 홀로그램지로 했는데 독자들이 표지를 이리저리 움직여 빛 물결을 만들고 이를 짧은 영상으로 찍어 올리더라. 사실 표지에 얽힌 비화가···. 처음에는 표지가 좀 단조로운 것 같아서 마음에 안 들었다.(웃음)
분홍색 테두리에 홀로그램지를 넣은 팬시한 시집이라니. 의아한 사람들도 있을 거다. 하지만 상품으로서 고민을 많이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봤다. 어느 자리인가 한 독자에게 시가 신비로운 것이 좋으냐, 신비롭지 않은 것이 좋으냐라는 질문을 받았었다. ‘신비롭게 혼자 읽으려면 저 혼자 골방에서 쓰겠죠’라고 답했다. 산문과 시를 함께 담았다는 것 자체가 상업성을 고려한 거다. ‘나는 시인이야, 시집만 있으면 돼’라고 생각하기보다 북스타그램 해시태그가 달려 한 명이라도 더 읽었으면 좋겠다. 책 나오고 나서 편집자들에게 표지 반대했던 거 사과했다.(웃음)
최근 시로 써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일상의 순간이 있다면 언제인가? 요즘 날씨가 좋아지니 버스킹을 많이 한다. 한강에서 한 남자가 혼자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는데 지나가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근데 이 사람이 눈을 감고 있으니까 자신 앞에 관객이 얼마나 있는지 모른 채 계속 노래를 하는 거다. 그리고 노래가 끝났다. ‘박수를 쳐야 하나?’ 박수를 치면 나밖에 없는 게 티가 나고. 안 치려니 그가 너무 외로워보이고 고민이 되더라. 근데 다행히 부드럽게 다음 곡으로 넘어갔다. 찰나의 순간인데 그에게 위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수를 칠까 말까 하던 순간을 생각하며 집에 오면서 메모를 했다. 왜 사람과 사람이 대화를 할 때 침묵이 흐를 때가 있지 않나. 누군가와 소통하고 마음을 나눌 때 일일이 답을 할 때가 있고, 대답하지 않은 채 들어야 하는 순간도 있지 않나. 노래가 끝나고 다음 곡이 시작될 때까지 20~30초. 그 순간에 대한 시를 써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