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내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큰 화제는 S의 연애사였다. S는 활기차고 적극적인 성격이고, 그녀의 남자친구는 조금 내향적이지만 S의 변덕에 잘 맞춰주는 터라 둘은 크게 싸울 일 없이 잘 만나왔다. 하지만 얼마 전 모임에서 만난 그녀는 예상 밖의 이야기를 했다. “한 달 전쯤 남자친구랑 둘이 술을 마시다 장난으로 진실 게임을 했어. 고등학교 때 사귄 같은 반 여자애 같은 시시한 얘기도 하고, 그러다가 내가 이런 질문을 했지. 최근에 자위 할 때 누굴 떠올렸어?” 잠시 친구들의 반응을 살피던 그녀가 얘기를 이어갔다. “남자들은 자기 여자친구나 아내를 생각하며 자위를 하진 않는다고 어디선가 들었거든. 취한 상태에서 갑자기 거기에 생각이 미치기도 했고, 가벼운 호기심이 일었어. 난 솔직히 포르노 배우나 여자 아이돌 정도의 대답을 예상했거든. 그런데 걔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씨.’ 그게 누구냐고? 퇴근 후 데이트할 때 두어 번 길에서 마주친 내 회사 후배!” 분통을 터뜨리는 S 앞에서 우리는 그저 경악했다. “자기도 말해놓고 아차 싶었나 봐. 당황스러웠지만 이해하려고 했어. 나도 예전에 남자친구랑 같이 카페에 있을 때 아주 잘생긴 남자를 보았는데, 나도 모르게 그 남자랑 키스하는 상상을 한 적 있어. 비슷한 걸 거야.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그런 성적 판타지는 누구나 가질 수 있다는 건 알아. 문제는 내가 그 후배를 매일 본다는 거지. 그리고 후배를 볼 때마다 남자친구가 그녀를 떠올리며 자위하는 모습이 그려지고. 정말 괴로웠어. 그렇다고 회사를 그만두기는 싫고, 차라리 그와 헤어지기로 했어.” 그를 만나지 않으니 죄 없는 후배를 미워하는 감정도 사그라졌다고 고백하는 S는 어쩐지 서글퍼 보였다. 그녀의 말대로 연예인이나 전혀 모르는 타인이 아니라 아는 누군가를 성적으로 상상하는 일은 어찌 보면 아주 드문 일이 아니다. S의 이야기를 듣던 우리는 다만 진실 게임이라고 진실만을 말한 그의 융통성 없는 태도를 개탄했다.
상대의 섹스 판타지에 뜨악할 수 있음을 깨달은 건 사람들의 다양한 페티시를 알게 된 후였다. 여자가 스틸레토 힐을 신은 모습이나 신발을 벗은 후 드러나는 뽀얀 맨발의 자태에 흥분한다는 남자들은 종종 봤다. 하지만 자신이 풋 페티시를 가지고 있다고 고백한 한 남자와 보낸 여름밤은 내 상상과 조금 달랐다. 하루 종일 스니커즈를 신고 돌아다닌 탓에 발 냄새가 날 것이 확실한 내 두 발을 샤워도 하기 전에 어루만지기 시작한 그는 사뭇 진지하게 코를 묻고 내 체취를 음미했다. 참으로 기이한 순간이었다. 이게 바로 어디서 들은 ‘커닐링구스를 하다가 여자친구의 항문 냄새 맡는 걸 좋아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어요’의 발 냄새 버전인가? 이걸 변태적 성향이라 해야 할지, 그냥 특이한 페티시 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건지 나는 아리송했다. 친구 P의 경험 또한 조금 특이했다. 어느 날 P는 자취를 하는 여자친구가 무언가를 사러 잠깐 나간 사이 그녀의 노트북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거기엔 야동의 흔적이 있었는데, 그녀가 저장한 한 즐겨찾기 카테고리엔 포경수술을 하지 않은 페니스를 가진 배우들만 나오는 동영상 클립이 잔뜩 들어 있었다. P는 아동 시절 포경수술의 고통과 굴욕을 이겨낸 대한민국의 보통 남자였고, 그래서 여자친구의 비밀스러운 취향에 혼란스러웠다. “내 여자친구가 수술 안 한 페니스에 판타지를 느끼다니 어쩐지 부아가 치밀었어. 뭐랄까, 난 가슴이 크고 살집도 있는 편인데 알고 보니 남자친구가 모델처럼 아주 마른 여자들만 나오는 야동을 수집하고 있었다면 배신감이 느껴지지 않겠어?” 둘은 다른 이유로 얼마 못 가 헤어진 탓에 그녀의 진짜 취향은 알 길이 없어졌지만, P는 자신에게 없는 면을 야동에서 찾는 여자친구가 야속한 동시에 그것이 ‘포경수술 안 한 페니스’라는 점에서 어쩐지 자존심이 상하는 눈치였다.
생각해보면 연인의 판타지에 내적 갈등을 겪는 많은 경우는 결국 제삼자 때문인 것 같다. 친구 S도, P도 상대방이 다른 사람을 꿈꾼다는 사실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 제삼자를 머릿속이나 스크린 너머가 아닌 현실에서 맞닥뜨려야 한다면? K는 최근 스리섬을 해보고 싶다는 남자친구 때문에 고뇌하고 있다. 게다가 그가 원하는 스리섬 상대는 여자. 그런 그를 이해하려는 K의 시도는 그가 결국 두 사람 관계의 부족한 부분을 타인에게서 채우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로 이어졌다. K의 떨떠름한 반응에 남자친구는 스리섬은 그저 판타지일 뿐 중요한 건 둘 사이이며 그녀가 원하지 않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며 그녀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남자친구의 은밀한 환상을 알아버린 K는 판도라의 상자를 연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다고 한다. 세상엔 스리섬이나 스와핑을 즐기면서 행복한 연인들도 분명 다수 존재하니 그들의 섹스 라이프를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판타지는 ‘그들만의 리그’일 수 있기에, 상대와의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면 내보이기 전에 조심하는 편이 낫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