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노트북 사수기
회사엔 내가 입사한 2년 전부터 이미 오후 6시가 되면 컴퓨터가 꺼지는 ‘PC 오프제’가 있었다. 그렇다 해도 바쁜 부서는 늦은 밤까지 어김없이 야근을 했었다. 이번에 제도가 강화되면서 회사에서는 오후 6시부터 6시 30분 사이에 퇴근하는 걸 권장하고 있다. 나는 평소에 거의 정시 퇴근을 한 편이라 크게 달라진 건 없다. 단지 6시가 되면 엘리베이터를 잡는 게 힘든 정도? 하지만 여전히 남은 업무를 해야 하는 동료들은 있다. 그들은 일이 밀려 있으면 회사 노트북을 들고 집으로 가야 한다. 왜 굳이 노트북을 가져 가냐고? 회사 파일은 암호가 걸려 있어서 개인 컴퓨터에서는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팀마다 한두 대밖에 없는 희귀템이라, 매일 저녁 사무실에서는 노트북을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벌어진다. 전유진, 27세, 식품 회사
밥은 먹고 다녀요
야근이 많을 수밖에 없는 기획팀에서 일한다. 그중에서도 나는 손익 관리와 전략 업무 담당. 그러다 보니 평일 새벽이나 주말 오후, 시간대를 가리지 않고 일할 정도로 정말 바쁘게 살았다. 사실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는 지금도 일주일에 52시간을 꽉 채워서 일하는 편이라 여전히 바쁘긴 하다. 그나마 요즘은 지인들과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작은 여유가 생겼다. 회사에서도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따로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동료들도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는 중이다. 다들 노력하고 있으니 지금보다 상황이 나아지길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아니, 그래야만 한다. 최은석, 30세, 건설 회사
고생 끝엔 낙이 온다
오전 8시 30분 출근, 오후 7시 퇴근인 회사에 다닌다. 예전엔 눈치를 보다가 늦게 퇴근한 적도 종종 있었는데, 얼마 전부터 PC 오프제가 도입되면서 정시에 퇴근할 수 있게 됐다. 컴퓨터는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만 켜져 있어서 6시 30분이 되면 자연스럽게 퇴근할 수 있다. 대신 업무 시간에는 ‘집중 근무 시간’이라는 게 생겼다. 그 시간 동안에는 업무 향상을 위해 개인적인 일이나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걸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 빡세게 일하고 편하게 쉬는 거, 꽤 괜찮은 것 같다. 심수경, 26세, 부동산 개발 회사
스마트폰 끝, 운동 시작
정시에 퇴근하더라도 집에 도착하면 8시 정도. 저녁밥을 먹고 나면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다. 뭔가를 시작하기에도 애매한 시간이라 보통 TV를 보거나 스마트폰을 만지작대다 잠들곤 했다. 그러다 올해 초부터 회사가 35시간 근무제를 시작하면서 생긴 저녁 시간에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동료들도 각자 취미가 하나씩 생겼다. 예전엔 그날 업무가 꼬이면 하루 종일 거기에 매달려 있었는데, 이젠 시간이 되면 미련 없이 자리를 떠야 하니 업무 스트레스도 많이 줄었다. 대신 업무 시간 동안은 바삐 달려야 하지만. 유경민, 26세, 식품 유통 회사
저녁만 있는 삶
병원에서 직원들의 삼시 세끼를 책임지고 있다. 하루 종일 돌아가는 시스템이다 보니 교대로 근무를 하는데 보통은 일하는 시간대가 고정되어 있다. 피크 타임에는 정신없이 바쁜데, 일하는 시간은 줄고 업무량은 엇비슷해서 요즘은 정말 말 그대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게 뭔지 실감하고 있다. 원래는 일주일에 62시간 일했는데, 이번에 52시간으로 바뀌면서 월급도 꽤 많이 줄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우스갯소리로 법을 어겨서라도 더 일하고 싶다고 말한다. 내년에 시급이 좀 더 오른다 해도 52시간 근무라면 전과 비슷한 수준이다. 당장 수입이 줄어서 걱정스럽긴 하다. 저녁은 생겼지만 내 지갑은 왠지 비어가는 것 같다. 지은수, 32세, 병원
더 바빠진 하루
일주일에 약 세 번 정도, 퇴근 시간 후에도 3시간 넘게 야근을 했다. 야근 후 지친 상태로 집에 들어가면 바로 쓰러지다시피 잠
든다. 그러다 보니 평일 저녁에는 개인적인 시간이 전혀 없었다. 제도가 시행되고 나서는 회사 인사팀뿐만 아니라 경영진들이 직접 나서서 52시간 근무를 강조하더라. 이번엔 진짠가보다 싶었다. 바로 헬스장으로 달려가 회원권을 끊었다. 매일 빼먹지 않고 운동하고 있고, 얼마 전부터 영어 공부도 시작했다. 요즘 다른 의미로 바쁘게 산다. 이게 ‘워라밸’이라는 건가! 태진호, 29세, 제약 회사
이젠 필라테스 출석왕
신입 사원이다 보니 업무가 끝나도 눈치를 보다 늦게 퇴근한 적이 많았다. 전부터 필라테스를 꾸준히 해왔는데, 그렇게 퇴근이 늦어지는 날에는 수업을 취소할 때가 많았다. 제도가 시작된 후부터 평일에도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니 일상에 활력이 생겼다. 회사에서는 수요일과 금요일마다 오전 8시 30분에 컴퓨터가 켜지고 오후 6시가 되면 무조건 꺼지는데 이 덕에 늦지 않게 퇴근하는 분위기가 생겼고 회식도 줄었다. PC 오프제를 단 이틀만 하는데도 그 영향력이 은근 크다. 최재희, 26세, 금융 회사
진짜 됩디다
회사가 재개발이나 재건축의 시공사가 되도록 수주하는 일을 하고 있다. 영업직이다 보니 일주일에 두세 번의 야근이 있고, 한 달에 한두번은 주말 출근도 해야 했다. 7월부터 제도가 본격 시행되면서 퇴근 시간이 되면 회사 컴퓨터가 자동으로 꺼진다. 처음엔 많은 사람들이 ‘저게 진짜 되려나’ 하고 반신반의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우리 스스로도 업무 시간 안에 최대한 일을 끝내려 하고, 불필요한 야근을 피하는 문화가 생겼다. 현재까지는 만족하고 있다. 내 시간이 많아졌다. 전영재, 29세, 건설 회사
돈보다는 빠른 퇴근을
내가 일하는 곳은 대학병원 마취과다. 다른 병동은 근무 시간 외에 컴퓨터에 로그인하는 것 자체를 막는다고 들었지만, 마취과는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환자 곁을 지켜야 하는 특수 부서다. 수술이 늦어지면 어쩔 수 없이 초과 근무가 생기는 거다. 전에는 초과된 시간만큼 적립해두었다가 쓰고 싶을 때 그 시간만큼 퇴근을 앞당길 수 있도록 했는데, 이젠 그게 사라지고 초과 수당을 준다. 난 돈으로 받기보다는 빨리 집에 가는 게 더 좋았던 사람이라 아쉽긴 하다. 그래도 최대한 제 시간에 갈 수 있게 해주는 분위기가 생긴 건 좋다. 정운, 25세, 병원
야근합니다, 공기업도!
지방자치단체의 온라인 쇼핑몰 MD와 디자인 업무를 맡고 있다. 관공서에서 일하니 보통 주위 사람들은 오전 9시부터 일하고 오후 6시 땡! 하면 퇴근하는줄 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민원이 정말 많아서 일반 사기업보다 야 근도 잦고 출퇴근 시간도 따로 정해지지 않을 정도. 이번엔 좀 바뀌려나? 하고 일말의 희망을 가져봤지만 회사에서는 ‘이번에 이런 걸 발표했다더라’ 정도의 말만 했다. 모두들 실망한 눈치다. 관공서 자체가 워낙 변화가 더딘 곳이다 보니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면서도 아쉽긴 하다. 그저 조금씩 나아지길 바라며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수밖에. 김민아, 26세, 지자체 온라인 쇼핑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