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추상을 감각하게 만드는 가장 황홀한 수단인 섹스. 그러나 섹스는 더 이상 사랑을 방증하지 않는다. 계속되는 교감이 사랑을 만들어낼 거라는 확신과 절실함도 이제는 희미하다. 데이팅 앱을 깔자마자 속수무책으로 보이는 프로필 문구에는 캐주얼 섹스, FWB(Friends With Benefit), 자만추(자연스러운 만남 추구) 같은 이상한 조어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그러니까 원나잇 스탠드, 여기에 관계의 시간성을 덧대면 소위 섹스 파트너를 찾고 있는 것이다. 섹스도 경제적일 수 있을까. 당연하다. 우리는 간명하고 편리한 시대를 살아가는 ‘쿨’한 사람들이니까.
섹스 앞에서 쿨하지 않으면 일단 지고 들어가는 거라고, 우리는 각종 매체를 접하며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심지어 주말 연속극에서도 선 섹스, 후 연애 이야기가 아무렇지 않게 방영된다. 그런 장면에서 섹스는 ‘실수’처럼 묘사된다. 술을 마시고 흥에 겨워 어쩌다 보니 섹스를 해버렸고, 그렇게 관계가 시작된다는 로맨스물의 클리셰는 사방에 넘친다. 섹스 후에 누가 먼저 연락을 하는가로 이른바 ‘밀당’이라는 권력 구조를 만들어낸다. 한때는 결말이었을 그것이 이제는 이야기의 전제, 그야말로 디폴트가 된 셈이다. 섹스는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내게도 섹스 파트너가 있었다. 제안을 받은 적도 있고 반대로 내가 먼저 손을 내민 적도 있다. 만난 지 몇 시간이 채 안 된 사람과 모텔을 찾은 적도 있고, 수년 동안 깔짝깔짝 간만 보다가 어느 날 기어이 해버리고 만 사이도 있다. 그때마다 내게 섹스는 단순히 관계의 지표나 애정의 척도로 비치지 않았다. 그저 구체적인 행위에 불과했다. 상대의 몸을 응시하고, 타인의 몸에 내가 파묻히거나 나를 묻어버리는 일. 그 잠깐 사이에 피어오르는 찰나의 교감이 존재할 수는 있으나, 섹스가 끝난 이후 그것이 오롯이 사랑에 가 닿는다고 여길 사람은 흔치 않을 터.
쿨하다는 건 무얼 뜻하는 걸까. 성적인 측면에서 주체성을 담보하는 것? 그렇다면 다시 묻는다. 주체성이라는 건 무엇일까. 섹스라는 행위에 수동적이지 않은 태도를 보인다면 그것은 주체적인가? 다시 묻자. 그렇다면 섹스에 객체적일 수 있나. 섹스를 권력관계로 두고 볼 때, 객체성을 띠는 입장에 놓여 있다면, 그것은 섹스가 아닌 강력 범죄의 피해자일 것이다. 우리는 섹스를 할 때 모두 주체적이다. 행위를 합의한 당사자이므로. 그런데도 왜 여성에게는 ‘주체적인’이라는 수사적 표현이 이제야 마치 제자리를 찾았다는 듯이, 그것도 마치 ‘쿨’한 여자에게만 트로피처럼 주어지는 것일까. 그러니까, 도대체, 왜.
“쿨하게 섹스만 하자.” 이렇게 말하는 남성은 제법 많았다. 나의 연애가 험난했다기보다는 지금껏 살아온 기간에 비례해 통계적으로 추산한 결과다. 이는 나만이 아니라 주변의 지인들에게도 축적된 경험이다. 섹스‘만’ 하자는 말에서 ‘만’이란 뜻은 결국 책임지지 않겠다는 거 아냐? 섹스를 통해 감정의 전개를 이룩하려는 친구들은 그렇게 해석했고, 궁합은 좋은데 그냥 그것만 좋은 것이라고 재빠르게 단정해버린 친구들은 ‘만’이 제시하는 감정 노동 없는 상태를 기꺼이 만끽했다. 그들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할 때 ‘만’이라는 단서에 따라 반으로 극명하게 갈렸다. 나 역시 그 두 부류 사이를 맘껏 뛰어다녔다. 걔랑 하는 건 좋은데 걔 데리고 다니는 건 부끄러워. 그럴 경우엔 ‘만’을 택했고, 제발 나를 사랑해달라고 조르는 강아지처럼 구는 관계에서는 ‘만’따위는 당치도 않다며 떼를 쓸고 빌었다. 상대에 따라 나의 널뛰기는 상승과 하강을 반복했다. 잠깐, 그럼 난 쿨한 여자야, 아니면 질척대는 여자야? 나는 생각한다. 그때 내가 했던 결정들이 온전히 나 스스로 한 선택이라고 확신할 수 있느냐고. 어쩌면 떠밀리듯, 혹은 어떤 절박함이 나를 끝내 합의로 갈무리하게끔 만들지는 않았는지. 관계를 망칠까 두려워서, 그 순간을 즐기지 못하는 것 같은 압박감에서 어떻게든 피하려고 애를 쓴 건 아닌지. 일례로 나는 친한 남자 사람 친구와 함께 아침까지 술을 마시다가 그의 원룸에서 잠을 잔 적이 있다. 그는 잠결에 나를 더듬었고, 나는 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으나 완강히 거부하지는 못했다. 정색을 하면 그와 나의 관계가 어색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냥 한 번만 해줘. 그가 말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부탁을 들어줬다. 이건 나의 선택이었을까. 나는 그날의 섹스를 ‘실수’로 기억하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내게 그날은 악몽이나 다름없다.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Liberated>에는 봄방학을 맞아 해변을 전투 기지로 삼은 남학생들이 등장한다. 이곳에서 보내는 하루의 승부를 판가름하는 관전 포인트는 얼마나 만족스러운 섹스를 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횟수의 섹스를 했느냐다. 그리고 만나서 섹스를 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으로도 자기들끼리 내기를 한다. “Let me show you.” 남학생은 카메라 렌즈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말한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정말 에니바디여도 상관없는 아무 여성에게 다가가 묻는다. 네 엉덩이가 탐스러워. 나한테키스해줄래? 여성은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그의 입술에 키스를 한다. 남학생은 보란 듯이 카메라를 향해 웃는다. 봤지? 다큐멘터리는 매체가 다루는 섹스의 방식이 여성들에게 마치 일종의 해방처럼 느껴지도록 의도한다고 고찰한다. 첫 경험이 중요하지 않은 세대에게 섹스는 주체적인 섹슈얼리티를 표방하려는 여성이 해내야 하는, 일종의 견습이며 숙련이다. 우리는 고민할 필요가 있다. 과연 이러한 방식의 제안과 합의가 온당한지 말이다. 관계의 무게를 덜어내려는 감정적인 편의를 좇는 일이 굳이 섹스라는 결과로 이어져야만 하는지 말이다.
섹스에 있어서 여성은 더 주도적이어야 한다. 싫으면 싫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그건 좀 쿨하지 않다고 퍼붓는 온갖 직간접적인 문화에 대항해 조금 더 강하게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 난 내가 섹스하고 싶을 때 해. 지금은 하기 싫어. 그리고 내가 거절하는 건 결코 쿨하지 않은 것이 아니야. 그냥 싫은 것뿐이야. 이것이 진정한 해방의 언어, 이른바 쿨한 애티튜드가 될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실천해야 한다. 우리 다음 세대의 여성들을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