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이제
<0%를 향하여>
2018년 중편소설
<셀룰로이드 필름을 위한 선>으로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미래가 없고 (……) 미래가 없고 (……) 미래가 없다. 나는 언제까지 이 생각을 지속시킬 수 있을까. 지속시킬 수 있을까. 고개를 돌려보니, 할머니가 보인다. 빛. 어둠. 빛. 어둠. 연말이었고, 그렇게 밤이 지나고 있었다. 계속. 밤은 지나고 있었다.”
– 소설 <0%를 향하여> 중에서
2021 제12회 젊은작가상 수상 작품집에 실린 소설 <0%를 향하여>에서 한 구절을 오늘 낭독하기로 했죠. 어떤 구절을 선택했나요? “미래가 없고 (……) 미래가 없고 (……) 미래가 없다. 나는 언제까지 이 생각을 지속시킬 수 있을까. 지속시킬 수 있을까.” 이렇게 반복하면서 끝내는 문장을 꼽고 싶어요. 미래가 없다고 하면 없어야 하는 건데 이렇게 문장을 계속 나열하다 보면 종이 위에서 앞으로 나아가게 되잖아요. 제가 소설 안에서 다룬 독립영화나 언더그라운드의 예술들이 지금까지 이런 방식으로 지탱해오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어요. 미래 같은 건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묵묵히 남아 이 신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미래가 만들어졌고, 현재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는 해피엔딩이라 생각했고요. 마지막까지 그 공간에 가서 영화를 보는 감상자이고 싶다. 그 자리를 완성하는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으로 썼는데, 이를 굉장히 비극적인 결말로 인식하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그 점도 재미있었어요. 각자가 처한 상황이나 세상을 보는 방식에 따라 소설 결말도 완전히 달라진다고 느꼈거든요.
소설을 쓸수록 소설에서 배우게 되는 것들이 있나요? 영화를 전공하고, 영화를 찍으며 느낀 점이 있다면 ‘인생에서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뭘 계획해도 다 어그러진다’였거든요. 근데 소설을 쓰고 난 뒤에 계획대로 되지 않아서 더 좋아지는 경우도 있다는 걸 경험하게 됐어요. 소설은 계획 없이 시작해도 되고, 쓰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면서 어디에 도착할지 모르는 상태로도 계속해서 쓸 수 있다는 점을 배운 거죠. 그리고 쓰다 보면 이건 아니다 싶어도 연습 삼아 끝까지 써볼 때가 있어요. 어차피 남는 거 시간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쓰면서 결국엔 끝을 냈는데, 끝내고 주변을 둘러보니 방 안이 너무 고요한 거예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더라고요. 내가 이렇게 작품 하나를 망치고 실패했는데 누구한테도 상처를 주지 않고, 해를 끼치지도 않고, 돈을 잃지도 않고,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은 거예요. 다 연습이니까. 그게 너무 좋은 실패인 거예요.
무엇을 보고 느낄 때 유난히 더 쓰고 싶어지나요? 생각보다 과학과 수학에 호기심이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살아가다 보면 일상에서 어떤 체계나 메커니즘 같은 게 보일 때가 있잖아요. 특히 사물의 속성에는 그 물성을 유지하기 위한 엄청난 체계가 존재하는 것 같아요. 하다못해 책을 봐도 표지부터 목차, 배치 순서 등 구조를 보는 거죠. 사물을 보듯 이런 방식으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치밀하게 구조화된 소설을 말하는 것인가요? 네. 맞아요. 전에 소설 <사운드 클라우드>에서는 LP에서 CD로, 파일에서 스트리밍으로 음악이 계속 다른 기기로 옮겨가는 방식을 그대로 가져다 글을 썼어요.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고 이야기하지만 어떻게든 살고 있잖아요. 그래서 소설 <미신>을 쓸 때는 ‘모른다’로만 끝나는 문장을 만들어 어디까지 써나갈 수 있는지 실험해보기도 했고요. 소설 <0%를 향하여>에서는 문단으로 나눈 100에서 0으로 갈 때까지 물리적인 공간들을 선택해서 가는 방식이었고, <그곳에서>라는 소설은 스도쿠 형식을 가져와 소설을 썼어요. 스도쿠가 복잡해 보이지만 그 안에 체계가 있잖아요. 기존 구조 말고 새로운 구조를 빌려 쓰는 방식을 늘 고민하고 있어요. 저는 이야기를 단락으로 나눠 쓰는데 이때 문단도 나누지 않거든요. 한 단락을 마치 퍼즐 조각처럼 만들어서 여러 단락이 각자 다른 읽기 속도와 방식을 가지게끔 만들고 싶다는 고민을 했어요. 한편으로는 순서에 상관없이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가령 단편 작품을 묶은 소설집을 읽을 때는 독자가 실제 수록된 순서와 다르게 작품을 취사선택해 읽기도 하지만, 한 편의 소설에서 단락을 마음대로 뒤섞어 읽는 것이 가능한가요? 그렇게 읽으려면 하나의 챕터가 하나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야겠죠. 짧게라도 완성되어야 하는 거예요. 이런 방식으로 쓰면 제가 구성한 순서 외에 무한한 순서가 만들어지는 거죠. 예능 프로그램 <유퀴즈 온 더 블럭>을 보면 출연자마다 에피소드가 나뉘어 있잖아요. 본방송을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걸 짤로만 보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봐도 결국 무슨 내용인지 다 알거든요. 요즘 사람들의 보는 방식, 읽기 방식이 이렇게 빠르게 진행되잖아요. 많은 정보량을 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선택적으로 읽고 보게 되고, 그 모두를 조합했을 때 서사가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걸 유도해서 쓰는 거죠.
지금 작가를 붙잡고 있는 하나의 질문이 있다면요? 아날로그와 디지털에 관해 고민하고 있어요. 데뷔작을 쓸 때부터 해온 생각이고, 제 소설에도 드러내려고 해요. 디지털 기술은 이미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었잖아요. 아날로그도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의미가 아닌 것 같고요. 이런 변화 속에서 우리의 인식 체계와 감각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요. 그 감각들이 소설에도 드러났으면 좋겠고요. 하나 더 이야기하면 어떻게 하면 차별 없이 문화 예술을 향유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어요. 우리의 노동시간은 지나치게 길고, 산업재해로 고통받는 사람도 많은데 이런 상황에서 예술을 향유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죠. 책값도 1만원 정도밖에 안 한다고 하지만, 그 돈이 비싸다고 느끼는 사람도 분명 있을 거고요. 이런 생각을 하면 이상한 감정에 휩싸여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는 것 같고요. 막연한 고민이지만 그럼에도 미약하나마 작가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이야기가 주는 힘에 대해, 그 막강함에 대해 체감할 때가 있나요? 무엇이 작가를 계속 쓰는 사람으로 머물게 하나요? 내가 앞으로 어디로 갈지 모르고 또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거의 없잖아요. 근데 소설에서는 그게 가능하니까 계속 쓸 수 있는 것 같아요. 초등학생 때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언젠가 나도 죽을 텐데 한 가지 직업만 선택해서 살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여러 번 살아보고 싶고, 직업도 여러 개 가져보고 싶고, 다양하게 경험해보고 싶은 거죠. 그렇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토리텔링을 하는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시작했어요. 연극이나 영화를 꿈꾼 이유도 이야기 안에서 여러 번 죽고 다시 태어날 수 있으니까요. 그런 걸 꿈꾸면서 지금까지 온 것 같아요.
심신이 건강한 상태로 오래 쓰기 위해서는 무엇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잘 쓰고 싶다는 강박이요. 잘 써야겠다는 막연한 강박이 더 잘 쓸수 없게끔 만드니까요. 저는 어떤 작가를 좋아할 때 작품 하나만 가지고 그 작가를 좋아하기보다는 그 사람이 초기작부터 지금까지 어떤 경로로 나아왔는지, 작품을 남기면서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선택을 해왔는지 살펴보는 걸 좋아해요. 개인의 굴곡진 서사를 그려가는 게 무척 재미있어요. 이처럼 소설을 쓸 때 아쉬운 작품이 있어도 다음 단계에서 바뀌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스스로에게 관대한 편인가요? 엄격한 편인가요? 관대한 편인 것 같아요.(웃음) 관대해야 하는 것 같고요.
관대해지고 싶을 때 무엇을 하나요? 몸을 많이 움직여요. 생각을 많이 안 하고 산책하거나 공기놀이를 계속 해요. 공기놀이를 하다 보면 명상하는 것처럼 마음이 깨끗해지고 아무 생각도 안 하게 돼요. 공깃돌의 움직임에만 집중하게 되니까. 그런 걸로 수련을 열심히 해요.(웃음) 결국에는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어느 정도 인지를 인지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구나 하고. 지나치게 완벽을 추구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그래야 다시 쓸 수 있으니까요. 초등학교 때 쓴 일기에 이런 구절이 있더라고요. “일기를 안 써서 칠판에 이름이 적혔다. 아이, 성질난다. 그렇지만 내가 잘못했는데 뭘. 다음부터 잘하지 뭐.”(웃음)
무척 쿨한 어린이였네요. 깜짝 놀랐어요. 이런 태도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앞으로 쓰게 될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까치에 관한 소설을 쓰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동네에 까치가 많아서 평소 유심히 보는데, 볼수록 머리가 굉장히 좋고 움직임이 절제되어 있는데 또 귀엽고 굉장히 매력적이에요. 맹금류를 두려워하지 않고 우습게 보는 태도도 아주 멋있는 것 같고요. 서울에 사는 젊은 청년들과 까치의 이야기를 엮어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