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순간
개봉 2021.06.30.
등급 12세 관람가
장르 드라마
국가 한국
러닝타임 95분
소준문 감독이 만든 영화 <빛나는 순간>이 6월 30일에 개봉한다. 그동안 작품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다뤄온 감독은 이번 신작에서 ‘바다에서 숨 오래 참기’로 기네스북에 오른 70대 해녀 진옥(고두심)과 그를 취재하기 위해 서울에서 내려온 30대 다큐멘터리 PD 경훈(지현우)의 이야기를 다룬다. 제주를 배경으로, 서로의 상처를 사랑으로 보듬어나가는 과정을 아름답게 담아낸 감독과 대화를 나눴다.
<빛나는 순간>은 제주 해녀의 삶을 다룬 작품입니다. 해녀의 삶을 처음 접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먼저 제주도라는 지역에 무척 관심이 있었습니다. 제주도는 아름다운 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아픈 역사로 인한 상처를 품고 있어요. 그 아픔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거친 바다와 매일 싸워나가는 해녀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의 강인함과 생명력이 큰 감동으로 다가왔죠. 이후 해녀에 관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익히 보아온 해녀의 모습보다는 다른 결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현무암 위에 핀 들꽃 같은 여린 감성과 주름지고 그을린 얼굴에 가득 찬 순수한 미소를 말이죠. 동시에 해녀의 내면으로 들어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혹은 무심히 지나친 감정의 파도를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해녀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담아내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쳤나요? 처음에는 해녀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통해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해녀들이 쓰는 용어 등을 하나하나 배워나갔죠. 그 이후 직접 제주의 해녀들을 만났습니다. 생과 사의 경계를 밥 먹듯 넘나드는 해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감동하기도, 안타까워하기도 했습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들의 물질이 너무도 존경스러웠죠. 어렵고 힘들지만, 내일을 위해 스스로 마음을 다독이던 해녀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살다 보면 살아진다.” 그 말이 제게 큰 위로와 위안이 되었습니다. 슬픔 너머의 질긴 생명력이 담긴, 아주 숭고하고 귀한 말이었어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70대 해녀 ‘진옥’ 역으로 고두심 배우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 작업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빛나는 순간>은 고두심 선생님이 없었다면 만들어지지 못했을 겁니다. 다행히도 첫 만남 당시 선생님은 시나리오를 흡족하게 보셨다며 “이건 고두심 아니면 아무도 못하겠다”라는 말을 해주셨습니다. 작품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며 가까이에서 본 선생님은 진옥처럼 수줍고 여리고 섬세했습니다. 출신 지역인 제주도를 다룬 영화라는 점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셨고요. 영화에 등장하는 인터뷰 장면을 촬영하기 전, 선생님은 저에게 조용히 다가와 이런 부탁을 하셨습니다. 오늘은 나를 믿어달라고요. 선생님의 시나리오를 보니 깨알 같은 글씨들이 적혀 있었어요. 저는 아무 말 없이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고두심이라는 제주 출신 배우의 입을 통해 이 지역의 아픈 역사가 전해졌습니다. 제가 써놓은 대사보다 더 길게, 진심을 담아 연기하시는 선생님을 보며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 모든 스태프들의 눈시울이 뜨거워졌고요. 연기를 넘어선 선생님의 마음이 느껴졌던 소중한 순간이었죠.
<빛나는 순간>에는 바다뿐 아니라 제주의 다양한 풍경이 담겨 있습니다. <빛나는 순간>의 다른 주인공은 제주도 그 자체라고 생각했습니다. 온전히 제주다운 곳에서 이 영화를 찍고 싶어 로케이션 선정에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제주에 거주 중인 하명미 프로듀서가 지인을 통해 ‘삼달리’라는 마을을 찾았습니다. 펼쳐진 바닷가에 해녀들이 작업하는 건물 하나만 자리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다녀간 관광객들을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손때가 덜 묻었고 바다의 물빛 또한 반짝반짝 아름다웠죠. ‘삼달리’를 촬영지로 확정 지은 후 진옥의 집을 찾으러 다녔는데, 원하던 모습의 집을 발견했습니다. 돌담이 있는 올레길을 걸어 들어가다 보니 고사목 한 그루와 함께 덩그러니 놓여 있는 주택이 있었어요. 알고 보니 그곳은 실제 해녀의 집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건, 제가 작품을 준비하며 봤던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인 아흔 살 ‘해녀 삼촌’의 보금자리였어요(제주에서는 남녀 상관없이 어른을 삼촌이라고 부른다). 너무도 절묘한 우연에 모두가 신기하다고 말했습니다.
제주에서 촬영하며 겪으신 일 중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나요? 시시각각 변하는 제주의 날씨 탓에 마음고생을 좀 했습니다. 스태프들이 날씨 애플리케이션을 여러 개 깔아놓고 수시로 체크했지만, 하나도 맞지 않았어요.(웃음) 날씨에 따라 부득이하게 수정을 거쳐 촬영한 부분들도 있었고요. 어느 날, 수심이 가득한 제 얼굴을 보시더니 고두심 선생님께서 한 마디 하셨어요. “감독님, 이게 제주도의 매력이야.” 그 말을 믿고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반 작업으로 색 보정을 할 때 컬러리스트가 ‘신기하게도 이 영화는 날씨가 주인공들의 감정을 따라가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영상을 쭉 살펴보니 내내 변화무쌍했던 날씨가 진옥과 30대 다큐멘터리 PD 경훈(지현우)의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빛이 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말 그대로 ‘빛나는 순간’이었죠. 아름답게 담긴 장면들을 보며 선생님이 말해주신 ‘제주도의 매력’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올드 랭 사인> <연지> <키스키스> 등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빛나는 순간>은 진옥과 경훈의 세대를 넘어선 사랑을 다루죠. 사랑의 형태는 다양하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누구나 평등하게 지닐 수 있고, 완성형이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가야 하는 현재 진행형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자신과 다른 형태의 사랑에 대해 무작정 단정 짓고, 다르다는 이유로 밀어내려고 하는 것 같아요. <빛나는 순간>을 만들며 “왜?”라는 질문이 가장 많이 들었습니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고 하면서 왜 진옥과 경훈의 사랑에 대해서는 이유를 말해야 할까요? ‘특별한 사랑이기 때문에 특별한 이유가 필요하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모든 사랑은 같은 위치와 눈높이로 시작하잖아요. 이 사랑이 낯설 수는 있지만,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제가 이 영화에서 그린 사랑의 시작점은 ‘위로’예요. 그 누구가 됐든, 곁에서 상처를 위로할 때만큼 아름다운 순간이 있을까 싶습니다.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는 그 순간, 나이와 상관없이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사랑에 대해 말하려고 했습니다.
진옥과 경훈의 사랑을 담아내며 무엇에 중점을 두셨나요? 파도가 치고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잔잔하게 스며드는 사랑을 담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솔직한 지점도 같이 보여주고 싶었어요. 노년의 사랑이 플라토닉으로 그려지는 것도 일종의 편견이 아닐까 고민했습니다. 진옥과 경훈은 우리와 다르지 않은 감정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단지 우리가 만든 시선 때문에 그 마음을 꺼내놓기가 힘들었을 뿐이죠.
영화에 아이유의 ‘밤편지’가 나옵니다. 극 중 경훈의 휴대폰 벨소리고, 엔딩 크레디트에도 삽입되었죠. 연인 사이에는 ‘러브 송’이 하나씩은 있잖아요. 진옥과 경훈에게도 이런 곡을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곡을 고르며 고민하던 찰나에 하명미 프로듀서가 아이디어를 줬어요. 아이유가 부른 아름다운 ‘밤편지’…. 한창 꿈에 젖어 있다가 우연히 양희은 선생님이 이 노래를 부르시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 곡을 꼭 영화에 써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밤편지’에는 세대를 뛰어넘는 강력한 힘이 있고, 가사도 영화에 묻어 있는 ‘그리움’이라는 테마와 맞닿아 있어요. 노래를 들으면 위로받는 듯한 기분이 드는 동시에 사랑의 감정이 아련하게 느껴졌죠. 해녀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때 부르는 구전 민요인 ‘이어도 사나’를 호방하게 부르던 진옥이 어느새 ‘밤편지’를 잔잔하게 부를 때 느껴지는 감정의 변화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저작권으로 고민이 많았는데, 다행히 음원을 영화에 사용할 수 있었어요. 이 자리를 빌려 아티스트와 음원 관계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웃음)
제주 방언이 작품에 더 몰입하게끔 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에 사용된 방언 중 가장 애착이 가는 대사는 무엇인가요? ‘이녁 소랑햄수다(당신을 사랑합니다)’를 꼽고 싶어요. 제주 방언이지만, 제주도민들은 자주 쓰지 않는 표현이라고 해요. 이 지점이 재미있었습니다. 가슴 속에 간직한 말 같은 느낌이 더 들었거든요. 제주, 더 나아가 이 영화의 정서를 꾹꾹 눌러 담은 애틋한 대사라고 생각합니다.
해녀가 바닷속에서 해산물을 캐다가 숨이 차오르면 물 밖으로 나오며 내뿜는 휘파람을 ‘숨비소리’라고 하죠. 이번 작품에서 진옥이 경훈에게 들려주는 ‘숨비소리’에는 어떤 말이 숨겨져 있을까요? 그 숨비소리에는 진옥이 했던 대사인 “살암시믄 살아지매(살다 보면 살아진다)”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젊은 세대인 경훈이 사랑으로 진옥를 위로했듯, 진옥은 경훈에게 삶의 생명력을 전달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힘들고 모진 세상의 파도를 헤치고 나갈 수 있는 응원과 지지를요. 그래서 이들의 사랑이 아름답게 마무리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바다로 향하게 되는 해녀의 삶을 떠올리면 어떤 생각을 하시게 되나요? <빛나는 순간>에는 실제 해녀 삼촌들과 촬영한 장면이 꽤 있습니다. 촬영을 이어가며 이들의 바다를 향한 사랑을 느꼈어요. 바다에서 많은 일을 겪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요. 한 번은 촬영이 지연되어 삼촌들이 고무로 된 복장을 입고 무작정 대기하신 적이 있어요. 촬영이 재개되었을 때, 삼촌들이 바다에 들어가자마자 통제가 안 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는데, 그들의 표정이 무척 행복해 보이더라고요. 그때 다시 생각했죠. “해녀는 바다를 떠나 못 살아”라는 대사의 의미를요. 바다는 해녀에게 삶이자 사랑이고, 또 다른 ‘경훈’이지 않을까요? 슬픔, 기쁨, 아픔을 모두 바다에 떠내려 보낸다는 삼촌들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있습니다.
해녀의 삶이 지닌 모습 중 우리 모두와 닮았다고 느끼신 지점이 있나요? 모든 것이 닮아있습니다. 우리는 다 같이 사랑을 하는 존재니까요.
<빛나는 순간>이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가기를 바라시나요? 관객들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진옥과 경훈의 사랑에 당황하거나, 어쩌면 불편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마음을 열고 들여다보면 우리 모두의 사랑과 닮은 지점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감정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게 될 거예요. 바다와 산이 경계 없이 어우러진 제주에서 펼쳐지는 위로와 사랑의 순간들을 가슴으로 느껴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