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내 마음 속 고향, 유년기에 긴 시간을 보낸 곳은 춘천이다. 춘천에서 산 건 열 살 때부터. 당시 아빠는 서울의 회사를 나와 춘천 효자동에 작은 프린트숍을 차렸다. 엄마는 춘천 근화아파트 상가에서 ‘센스’라는 양품점을 열었다. 엄마의 상가 친구들은 엄마를 ‘센스야’라고 불렀다. 하지만 “센스 딸내미네. 어디 가니?”라는 말에도 나는 한 번도 웃거나 대답하지 않아 엄마를 곤란하게 했다.
표현에 인색한 아이였기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아빠의 오토바이 뒷좌석에 앉아 공지천을 따라 등교하는 길 만큼은 참 좋았다. 아빠의 너른 등을 껴안고 미지근한 바람을 맞는 언덕을 늘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3학년 담임이던 김정애 선생님은 엄마에게 스케치북과 물감을 사 보내 나를 미술부에 가입시켰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내게 학교에 가고 싶은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거였다.
선생님과의 인연은 춘천 어린이회관(현 KT&G 상상마당 춘천)에서 더 깊어졌다. “보람아, 내일 예쁘게 입고 와. 선생님이랑 어디 좀 가게.” 이 말을 내가 귀담아들었을 리 없다. 다음날 나는 늘 입는 청치마에 티셔츠를 입고 학교에 갔다. “아유, 좀 더 단정히 입고 왔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괜찮아, 어서 가자.” 나는 그날 선생님과 춘천 어린이회관에 가서 어떤 상을 받았다. 이날로 내게 춘천은 마음에 떠올릴 때마다 기분이 산뜻해지는, 나의 다정한 고향이 되었다. 이날 느낀 감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상을 받아 기뻤던 게 아니라, 수업을 빼먹고 선생님과 택시를 타고 춘천 어린이회관에 가는 길이 좋았다. 그날 엄마와 함지 레스토랑에 가서 먹은 달콤한 ‘함박’ 스테이크도. 함지는 1980년대 때와 다름없는 인테리어와 메뉴를 고수하고 있는 레스토랑이다.
1980년대생에게 춘천 어린이회관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려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만약 어떤 연유로 춘천 어린이회관을 철거한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춘천으로 내려가 시위할 친구들이 숱하다.
춘천 어린이회관만큼 우리들의 유년시절이 잘 보관되어 있는 장소는 없으니까. 춘천 어린이회관은 1980년, 건축가 김수근이 ‘호숫가에 끝없이 피어나는 동심세계’를 슬로건으로 설계했다.
“설계하는 내내 꼭 어린이가 된 기분이었죠. 아늑한 건물에 숨어있다 나오면 햇빛이 옆으로 들어오고 모퉁이를 돌면 강한 햇빛이 지붕에서 쏟아지고, 그러다 공간이 트여 호수와 산을 맞닥트리는 공간상의 해프닝을 테마로 삼았어요. 제게 어린이는 바로 ‘노는 사람’이란 개념이고 이곳은 그런 그들의 본질을 강조하는 문화적 공간입니다.” 1980년도 김수근의 인터뷰. 건축가의 바람처럼 우리는 야트막한 구릉에 마련된 무대에서 장기자랑을 했고, 호숫가 잔디밭에 엎드려 그림을 그렸다. 담 하나 없이 자연으로 흐르는 붉은 벽돌 건물을 빙글빙글 돌며 술래잡기를 했다.
그간 춘천을 찾는 지인들에게 청평사 가는 길, 남이섬, 유포리막국수, 우미닭갈비나 알려줬지 춘천 어린이회관을 추천한 적은 없다. 근처에 괜찮은 식당이 없어 괜히 허탕쳤다고 생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서울에 차고 넘치는 잘난 이들과 비교하며 초라해질 때, 혼자 그림을 그렸던 호숫가와 춘천 어린이회관을 떠올린다. 고여 있는 호수처럼 보이지만, 희미한 달빛에도 성실히 동요해 반짝이고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봄이 오는 시내’라는 고운 뜻을 지닌 춘천. 우리는 춘천에 갈 때마다 춘천 어린이회관을 따라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