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 BIFF 김성수 감독 크리스마스 캐럴

복수 끝에 마주한 성장
김성수 감독 <크리스마스 캐럴>

주원규 작가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을 영화로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받았을 때, 김성수 감독은 단번에 수락하지 못했다. 그가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건  머릿속에 상상된 클로즈업 신 덕분이었다. “소년의 두 얼굴이 떠올랐어요. 통제할 수 없는 분노로 가득 찬 얼굴과 어쩔 수 없이 웃음 짓고 있는 얼굴이었어요.” 전자의 이름은 ‘일우’, 후자의 이름은 ‘월우’다. 18세 쌍둥이인 일우와 월우는 영화 <크리스마스 캐럴>를 이끌어간다. 축복으로 가득한 크리스마스이브, 동생 월우가 억울한 죽음을 맞자 형 일우는 복수를 하러 악인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향한다. 이 작품은 빠르면 올겨울 촬영에 돌입한다.

소설은 전형적인 복수극의 서사를 따르지만, 김성수 감독은 다른 차원의 복수를 생각했다. “복수를 다룬 작품들을 보면 피해자를 보호받아야 하는 불쌍한 존재로 그릴 때가 많더라고요. 이와 달리, 피해자의 시각이 담긴 복수극을 만들고 싶었어요.” 일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원작을 각색하며 감독은 월우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복수의 쾌감보다는 그 이면에 존재하는 갈등과 아픔 그리고 부조리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조명한 것이다.

감독은 <크리스마스 캐럴>이 ‘복수로 시작해 성장으로 끝나는 이야기’라고 소개한다. 복수를 결심한 일우는 동생의 죽음에 숨겨져 있던 악몽 같은 진실들을 마주하기 시작한다. “쌍둥이는 가장 친밀하다고 할 수 있는 관계잖아요. 그런데도 일우는 월우가 억지웃음을 짓는 이유를 모른 채 살아왔어요. 동생이 입은 피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거죠. 죽음의 이면을 밝혀나가며, 일우는 월우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점차 깨닫게 돼요. 더 나아가 ‘그렇다면 나는 누구일까?’ 고민하면서 성장하죠.”

월우가 세상을 떠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학교 폭력’이다. “최근 학교 폭력이 사회적인 이슈잖아요. 오늘날 학교 폭력의 핵심은 피해자가 제대로 회복하지 못하고, 가해자가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심지어 피해자가 어떠한 합의를 통해 가해자의 보복을 피해야 하는 경우도 있죠. 이런 상황은 학교 폭력을 넘어 대한민국 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약자가 아닌 강자가 오히려 구원 받는다는 지점이 <크리스마스 캐럴>을 작업하는 데 굉장히 큰 영향을 줬습니다.”

사회를 바라보는 김성수 감독의 시선은 전작 <야수>(2006) <무명인>(2014)과 드라마 <구해줘>(2017)를 통해 꾸준히 이어졌다. “이를테면 장편 데뷔작 <야수>에서는 어른들의 세계에 안착해야만 행복할 수 있는 순진한 소년들이 주인공이었죠. 차기작 <크리스마스 캐럴>은 어른들의 세계에 순응하던 소년들이 본래의 얼굴을 되찾는 과정을 다룹니다.” 감독의 작품은 결국 사회, 신, 운명 등이 세상에 만들어놓은 모순으로 귀결된다. 이를 통해 감독은 관객에게 질문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 정말 괜찮은가요?”

 

 

부산국제영화제 BIFF 김희정 감독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남겨진 이들의 기억하기
김희정 감독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시리가 되물었다. ‘어디로 가는 경로 말씀이세요?’ …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김애란 작가의 단편소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중에서. “저는 이 부분이 굉장히 현대적이면서 아름답고, 동시에 복잡미묘한 감정을 안겨준다고 느꼈어요. 이 소설은 두 사람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예요. 중학교 선생님인 남편이 체험학습을 갔다가 반 아이를 구하러 물에 뛰어들었고, 결국 학생과 남편 모두 죽어요.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이 있죠. 선생님의 아내와 학생의 누나. 그들이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나온, ‘시리’와의 대화 같은, 아이러니한 상황이 흥미로웠어요.”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마음에 스며든 것들을 모아뒀던 김희정 감독은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흔쾌히 자신의 이야기를 내어준 김애란 작가는 ‘감독님 손에서 굉장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 같아요’라며 지지의 마음을 더했다.

“사실 원작 안에 이미 세월호가 있어요. 읽히지 않을 수가 없어요. 물에 빠진 학생을 살리려던 선생님마저 죽은 이야기잖아요. 영화에도 이 지점이 보일 거예요. 저는 지금이 재난의 사회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늘 이 시대에서 어떻게 감수성을 잃지 않을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데, 영화를 통해 관객들이 이를 같이 고민해주면 좋을 것 같아요. 한편으론 애도는 어떻게 하는 건지, 제대로 된 애도하기는 무엇인지도 얘기하고 싶었고요. 원작에도 나와 있는 부분인데 아내가 떠난 남편을 생각하며 ‘그 사람은 왜 내 생각을 안했을까, 내 생각을 했으면 구하러 들어갔을까’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학생의 누나에게서 온 편지를 읽고 깨닫는 거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거라는 걸요. 아마 많이 공감하는 이야기일 거라 생각해요.”

단편을 시작으로 다섯 편의 장편영화를 내놓기까지 김희정 감독은 꾸준히 ‘기억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왔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창작하는 사람은 곧 기억해서 말하는 사람이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일어났을 때 머나먼 폴란드에 머물고 있었음에도 이를 기억하다 영화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2011)을 만든 그는 또 다른 기억을 제대로, 잘 전하기 위해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를 시작했다. “아마 제가 그런 시대에 살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그의 기억은 내년 2월 광주에서, 8월 폴란드에서 영화가 된다.

 

 

부산국제영화제 BIFF 윤재호 감독 아버지의 비밀

혼란과 불안 속에서도 사랑을 잃지 않는 마음
윤재호 감독 <아버지의 비밀>

“이 영화는 한 청년이 아버지와 가족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겪게 되는 트라우마, 혼란과 갈등, 그리고 다시 화해의 길로 가기 위한 여정을 다루고 있어요.” 윤재호 감독은 2012년 칸 국제영화제 레지던시에 선정되었던 이 이야기를 아주 오랜 시간 품고 있었다. “사실 <아버지의 비밀>은 제가 처음으로 쓴 장편이에요. 당시에 다 쓰고 보니 다루려는 주제가 워낙 광범위해 하나의 영화로 끝나기는 힘들 것 같았어요. 그래서 파생된 작품이 <뷰티풀 데이즈>(2018)와 <파이터>(2021)예요. 첫 번째 이야기인 <뷰티풀 데이즈>에서는 중국인 청년 ‘젠첸’과 북한 사람인 그의 엄마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뤘고, 두 번째 <파이터>에선 탈북 여성 ‘진아’가 겪는 삶의 딜레마를 드러냈어요. 그리고 3부작의 마지막 편이자 이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인 <아버지의 비밀>에서는 한국인 청년 ‘태성’이 겪는 고통과 혼란,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담았고요.

그는 꾸준히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이야기로 끌어들인다. 시작점은 2010년에 만든 단편 <약속>이다. 이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그는 탈북민, 고려인, 조선인, 중국과 일본에 있는 동포들을 만났고, 태어난 곳과 살고 있는 곳 사이에 머물며 아픔을 안고 사는 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됐다. “삶의 딜레마와 아픔을 얘기하면서도 결국 궁극적으로는 어떤 사랑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분열의 시작점은 결국 사랑의 결핍이잖아요. 거기서부터 오해하고 상처받고, 그리고 결국 다시 회복하는 것도 사랑이고요. 경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다 보면 사랑이라는 존재를 결코 외면할 수 없게 돼요.”

<아버지의 비밀> 역시 그간 살펴온 사람들과 그 안의 사랑이 담겨 있다. 다만 이를 그려내는 방식은 이전과 크게 다르다. 윤재호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처음으로 스릴러 장르를 시도한다. 그의 영화를 아는 이들에겐 생소한 도전처럼 보이겠지만, 정작 그는 영화를 시작할 때부터 하고 싶었던 장르였다고 말한다. “칸 국제영화제 레지던시에서 초고를 쓰고 한국으로 돌아와보니 생각보다 현실의 벽이 높더라고요. 장르물을 하는 데에는 꽤 많은 예산이 필요했고, 여러모로 이 이야기를 밀어붙이기엔 여의치 않았어요. 그래서 다큐멘터리나 드라마 장르를 먼저 시작하게 된 거죠. 먼 길을 돌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저는 지금이 가장 적당한 때라고 생각해요. 전작들을 만들면서 스토리텔링의 완성도를 높이는 법을 배웠고, 그 경험을 이번 이야기에 잘 살릴 수 있었어요.”

9년이란 시간을 거쳐 비로소 출발을 알린 이야기를 영화로 완성하며 그가 전하고 싶은 건 충격과 불안, 그리고 그 속에서도 타인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 것이다. “이 영화는 태성에게 닥친 충격적인 사건으로 시작해요. 그가 느낄 충격과 불안을 관객들도 같이 경험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이 경험을 통해 현실을 자각하고, 이해하면서 동시에 같이 살아가는 이들에게 애정을 느끼길 바라요. 파괴와 결합, 분열과 회복. 그 과정에서 많은 감정이 오갈 거라 생각해요.”

 

 

부산국제영화제 BIFF 이환 감독 영동시장

20대의 치열한 욕망
이환 감독 <영동시장>

<박화영>(2018)과 <어른들은 몰라요>(2021)를 통해 10대의 이야기를 담아낸 이환 감독은 새롭게 준비 중인 영화 <영동시장>의 시나리오를 약 70% 완성했고, 주연배우들도 일찌감치 캐스팅했다. 이번 신작에서 감독은 20대의 삶을 조명한다. “10대가 주인공인 작품들을 완성해보니 20대의 이야기도 하고 싶더라고요. <영동시장>은 전작의 거친 느낌을 조금 벗어나서 멜로드라마를 다룹니다. 하지만 그 안에 어떠한 처절함이 존재하죠.”

대학 시절에 만난 ‘재균’(가명)과 ‘희연’(가명)은 풋풋한 연애를 하다가 이별을 맞이한다. 1~2년 후, 사회에 나와 재회한 이들은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만 위태로운 관계를 이어간다. 두 사람의 ‘맵고 달고 짠 이야기’가 펼쳐지는 공간적 배경은 강남의 영동시장. “예전에 지인들과 가끔씩 영동시장을 찾아 술을 마시곤 했어요.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의 사연도 많이 접했고요. 서울에 정착하려 하는 지방의 사회 초년생들이 제일 먼저 찾아오는 지역이 상대적으로 물가가 저렴한 영동시장 근처래요. 이들 중엔 ‘밤 문화’에 종사하는 젊은이들이 많다고 하더군요.” <영동시장>은 두 남녀의 관계를 전면에 내세우지만 그 이면에는 20대, 강남, 밤 문화로 집약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있다.

<영동시장>의 초고를 약 10년 전에 쓴 이환 감독은 다수의 인터뷰를 통해 ‘시대가 변해도 세대는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세월이 흐르면 20대 특유의 언어나 정서가 달라질 수 있죠. 하지만 욕망은 공통적으로 존재해요. 20대는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표출하는 것 같거든요. 다르게 말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나가는 듯한 느낌이 있죠. <영동시장>은 이러한 20대의 욕망과 자기 파멸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에요.” 감독은 <영동시장>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로 인물들의 ‘치열한 정서’를 꼽는다.

작품 활동을 이어오며 이환 감독이 꾸준히 주목한 화두는 ‘성장’이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세대를 살아가며 나름의 성장을 한다고 생각해요. 특정 세대에 경험할 수 있는 상황과 감정 그리고 사회적 책임감에 인간이 어떻게 대처하며 살아가는지 궁금합니다.” 10~20대에 관한 영화를 만들며 이환 감독은 자신이 지나온 시절을 정리하고 보완해왔다. 자신이 그랬듯, 관객들도 공감을 바탕으로 각자의 시절을 돌이켜 볼 수 있기  바라는 마음이 <영동시장>에 녹아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BIFF 김보라 감독 스펙트럼

경이로운 삶을 살아가며
김보라 감독 <스펙트럼>

김보라 감독이 준비 중인 신작 <스펙트럼>의 장르는 SF다. 첫 장편영화 <벌새>(2019)를 사랑해준 ‘벌새단’을 비롯한 주변의 추천으로 김초엽 작가의 단편소설 <스펙트럼>을 읽은 후, 감독은 이를 자연스레 영화로 완성해가는 중이다.

근미래의 한국천문연구소에서 일하는 40대 여성 ‘도연’은 레트로 열풍에 발맞춰 자가주행 차 운전을 배운다. 논바이너리 운전 강사 ‘스티브+린다’에게 도연은 자신의 어머니이자 우주비행사 ‘희진’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다. 극 중 희진은 우주 괴담과 같은 존재다. 감독은 <스펙트럼>을 통해 ‘소통’에 대해 말한다. “성별과 인종 등의 경계를 넘나드는 소통에 대해 탐구하고 있어요. 이 작품을 통해 제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아가는 중이고, 그 과정이 아주 흥미로워요.”

김보라 감독은 시나리오를 쓸 때 관객을 상상하고 고려한다. 영화를 볼 관객, 더 나아가 모든 인간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 깊이 사색하는 것이다. “관객을 생각하며 만든 영화야말로 작가주의적이라고 생각해요. 그 이야기가 영화를 만나면 배우의 연기, 미장센, 음악, 카메라 워크 등과 어우러져 관객에게 더욱 잘 전달되죠. 영화는 다양한 감각을 동원해 관객을 다른 세계로 초대합니다.”

‘마법 같은 힘’을 지닌 영화 안에 김보라 감독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담아낸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 변하고, 깨닫고, 성장해가는 모습이 한 편의 영화 안에 응축되어 펼쳐진다. 감독이 이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은 삶의 경이로움에서 비롯된다. “괴롭고 화나는 일을 겪더라도, 작업을 하다 보면 시나리오 속 세계가 안전하고 아름답다는 느낌을 종종 받아요. 그 감정이 제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닿기를 바랍니다.

 

 

부산국제영화제 BIFF 이충현 감독 환청

비릿한 날것의 이야기
이충현 감독 <환청>

단편 <몸 값>(2015), 장편 <콜>(2020)로 이름을 알린 이충현 감독이 오래전 메모를 꺼내 신작 <환청>을 준비 중이다. 메모를 남기던 당시, 감독은 ‘반전’과 관련한 서사에 한창 빠져 있었다. “<환청>의 가장 큰 반전은 거짓말과 변심입니다. 부부간에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미스터리 스릴러예요.”

결혼 3주년을 기념해 아내의 고국인 한국에 갔다가 미국으로 돌아온 ‘리차드’는 의문의 환청을 듣기 시작한다. 환청의 원인을 파헤치던 그는 결국 참혹한 진실을 발견하고 만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문장에 담긴 의미처럼, 관계의 밑바닥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보려고 합니다. 가장 친밀한 사이인 부부는 이 주제를 보다 잘 보여줄 수 있는 설정이죠.”

<환청>의 이야기 구조는 인물들의 심정을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레 완성되었다. “전작 <몸 값>과 닮은 지점이 있어요. 서로를 믿지 못하고, 끝없이 거짓말을 할 때의 서스펜스가 <환청>에도 담겨 있죠. 아주 비릿한, 날것의 이야기가 될 듯합니다.”

이충현 감독은 일상의 사소한 생각들을 모아 이야기로 만들어낸다. 기존 시스템을 흐트러뜨리는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그의 이야기는 영화라는 매체를 거치며 더욱 선명해진다. “영화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죠. 하지만 훨씬 정확하고 구체적인 표현을 통해 관객에게 이야기를 전할 수 있습니다.” 최대한 많은 것들을 활용하며 작품을 만들어나갈 감독의 다음을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부산국제영화제 BIFF 임선애 감독 세기말의 사랑

그늘을 벗어나 햇빛 아래로
임선애 감독 <세기말의 사랑>

임선애 감독이 영화 <세기말의 사랑>을 제작하기로 마음먹은 데는 그의 장편 데뷔작 <69세>(2019)를 함께 만든 박관수 프로듀서의 영향이 컸다. “<세기말의 사랑> 시나리오를 읽은 프로듀서 님이 같이 작업해보자고 하셨어요. 이 작품으로 아시아프로젝트마켓에도 선정되니까 <세기말의 사랑>을 꼭 저의 차기작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일종의 계시를 받은 듯했죠.” 오래전에 써둔 시나리오를 지난해부터 다시 발전시켜 가며, 감독은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을 또 한 번 확인했다.

<세기말의 사랑>의 시대적 배경은 말 그대로 ‘세기말’, 1999년 겨울이다. 새천년을 앞두고 있던 당시 사회의 모습을 감독은 시나리오에 고스란히 담았다. “종말론과 밀레니엄버그 등이 대두하면서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기였어요. 모두가 세상이 끝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그때, 오히려 누군가는 용기를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사회에서 조금 밀려나 있던 약한 존재들의 용기를 이 작품에서 다뤄보고 싶었어요 .”

<세기말의 사랑>에는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비호감형 외모와 폐쇄적 성격의 ‘영미’가 자신에게 친절을 베푸는 ‘구 대리’를 만나 마음을 빼앗기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런 영미 앞에 나타난 구 대리의 아내 ‘유진’은 아름다운 외모를 지닌, 전신이 마비된 장애인이다.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된 두 사람은 서로를 연민하고 질투하지만, 결국 각자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구원하며 자유로워진다. “친척 중 장애를 가진 분이 있어서 어렸을 때 장애인을 향한 선입견에 대해 각성했어요.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살아가는 모습은 각자 다른데, 자신을 기준으로 누군가의 삶에 잣대를 들이미는 경우가 많다고 느꼈죠. 영미와 유진을 양극단에 배치해 ‘모든 삶은 존중받아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습니다.”

임선애 감독은 <69세>의 ‘효정’, <세기말의 사랑>의 영미와 유진처럼 사회의 가장자리에 있는 인물들을 사려 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어디에서도 본 적 없지만, 사실 우리가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지 못한 캐릭터들이 감독의 작품에서는 중심에 자리한다. “사회가 관심을 두지 않는 인물들을 조명하며 이들이 그늘 아래 숨지 않고 존엄한 삶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영화를 통해 전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