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친구의, 누군가의 엄마, 할머니이기도 한 평범한 여자 사람을 이야기한다.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라는 말의 ‘오늘’은 굴곡 없이 평탄하고 사소한 운수가 좋은 날이지 아주 특별한 날은 아니다. 작가가 원하는 삶은 이렇다. 모두들 그냥 그렇게 잘 살아가는 것.
웹툰부터 만화책까지 다양한 매체를 통해 꾸준히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여성 서사에 주목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최근 몇 년 동안 페미니즘 리부트가 일면서 크게 영향을 받았어요. 그전에는 이런 주제에 관심 있는 편은 아니었거든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개인적인 경험들이 더해지니 자연스럽게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어요. 저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이 세상의 수많은 엄마, 할머니, 친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
먼저 웹툰 <27-10>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제목이 독특해요. 어떤 의미인가요? 정확하게는 ‘이십칠 빼기 일’인데 저는 편하게 ‘이칠일공’이라 부르고 있어요. 숫자의 의미라 하면 27살인 주인공이 10살부터 겪은 가정 폭력에 대한 기억을 점점 치유해나가는 데까지 16년이 걸렸다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긴 시간이지만 평생의 시간은 아니잖아요. ‘언젠가 끝이 난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본인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인 만큼 기획할 때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 같아요. 언젠가 이야기로 다뤄야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매번 준비가 안 되어있었어요. 계기라고 말하자면 그냥 ‘지금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세상에 내놓았을 때 잠깐 주목받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봐주었으면 했거든요. 완성도 있는 이야기로 만들고 객관적으로 그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 거죠.
주인공을 ‘그녀’라고 부를 뿐 이름이 없어요.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작가이자 글의 주체인 제가 주인공에게 거리를 두기 위해서예요. ‘나’라고 지칭해버리면 어쩔 수 없이 이입해버리잖아요. 또 다른 이유라면 독자들이 작가를 의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무거운 소재이다 보니 자연스레 작가에 대해 궁금해할 것 같았거든요. 이야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건조한 톤으로 연출했어요.
여성 주연의 비(非)로맨스 만화 <여명기>를 시작으로 최근까지 다양한 작가들과 여성 서사를 풀어나가고 있어요. 처음에는 전혀 거창하지도 않고 친구 네 명이 모여 ‘우리 책이나 낼까?’라는 말에 시작하게 되었어요. 친구의 친구, 지인이 더해져 12명의 작가가 모였죠. 이렇게 커질 줄 알았다면 아마 시작도 못했을 거예요.
그렇게 ‘팀 총명기’가 탄생하게 되었군요. 프로젝트 제출을 해야 하는데 팀명이 필요하다길래 부록 책 이름으로 정해둔 ‘총명기’로 써냈어요.(웃음) 총명기가 원래 ‘중요한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 골자를 적어둔 책이나 글’이라는 뜻이거든요. 책을 만들고 나니 팀명으로 사용하기에 생각보다 의미가 잘 맞더라고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젊은 여성 작가들이 모여 만들었으니, 이들이 고민하고 관심 가지는 것들을 모은 책이 된 것이죠.
‘여성’이라는 공통된 주제로 다양한 생각들이 한자리에 모인 거네요. 책을 만들다 보면 그 과정 속에 여러 사람들이 개입되기 마련인데 여성 작가 12명, 여성 디자이너 1명이 모여 여명기 프로젝트의 모든 것을 진행했어요. 13명 모두가 굉장히 의욕적이고 프로젝트에 애정이 넘쳤죠. 그러다 보니 규모가 커지고 좋은 책이 나올 수 있었어요.
최근 발간된 <여자력 女自力>도 여성 작가들과 함께 했어요. 이런 프로젝트를 계속 이어나가는 이유가 있나요? 기본적으로 여성의 이야기가 세상에 많이 없어요. 아직까지 여성 서사가 부족하기 때문에 계속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 거죠. 마침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고, 좋은 작가도 많고, 서로 시간도 맞고.
현실적인 내용을 주로 다룬 지금까지의 작품과 다르게 <여자력 女自力>에서는 ‘초능력’을 소재로 삼았어요. 일상 속 작은 판타지를 만들고 싶었어요. 주인공이 터무니없이 엄청난 힘을 가진 설정이라면 뉴욕에서 싸우는 게 더 어울리겠죠.(웃음) 많은 이들이 한 번쯤 생각했을 법한 소소한 능력을 통해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그려나갔어요.
<여자력 女自力>의 자가 ‘子(아들자)’ 아니고, ‘自(스스로 자)’인 점도 눈에 띄었어요. 여성의 이야기인데 ‘子(아들자)’ 가 들어가면 좀 웃기잖아요. ‘自(스스로 자)’로 바꾸니 ‘여성 자신의 힘’, ‘여성 자신의 이야기’라는 뜻이 되었죠. 아직까지 ‘여성 서사’라고 이름 붙은 것은 모진 가치 평가를 당하곤 해요. 하지만 지금은 이런 것들을 신경 쓰기에 앞서서 최대한 많은 이야기가 세상에 나와야 하는 단계라고 생각해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면 좋겠어요.
페미니즘의 잘못된 정의로 인해서 때론 예민한 주제가 되기도 해요. 이런 부분 때문에 조심스러울 때가 있나요? 문제 되는 이슈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건 삼가는 편이에요. 말 한마디에 단편적으로 오독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충분한 시간과 공을 들여 생각을 담을 수 있는 ‘작품’을 통해 신중하게 이야기하려 해요. 작품에 빗대어 의견을 담아내는 것도 쉽지는 않아요. 많은 이들이 보는 만큼 조심스럽죠. 작품 속에서는 현실을 비극적이고 가학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사실 만들어내는 이야기보다 더 잔인하고 힘든 현실이 많잖아요. 그렇지만 최소한 제 작품을 보고 나서는 사람들이 ‘괜찮아질 수 있어’라고 생각할 수 있기를 바라요.
앞으로 작품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나요?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기본적으로 모두 소시민이에요. 기껏 주인공으로 태어났는데 드라마틱한 일을 겪기보다 다들 적당히 살아가요. 오히려 소소한 불행들이 깔려 있죠. 이렇게 말하니 조금 미안한데.(웃음) 이런 보통의 인물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건 ‘그냥 그렇게 적당히 잘 살았습니다’에요. 사람들이 보통의 나날을 보내며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