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 기념판> 속 작품 <죄와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의 표지를 작업했다. 세계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를 그림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이 쉽지 않았을 거란 예상을 했다.
나에게 굉장히 좋은 기회인 동시에 시련이기도 했다. (웃음) 프로젝트 자체의 규모가 큰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대문호라 칭해지는 도스토옙스키의 세계를 몇 편의 그림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점에서 부담이 컸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그대로 표현하기보다 200년이 흐른 지금의 해석을 더하는 방식을 택했다.
작업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지점은 무엇이었나?
4대 장편을 각각 다른 방식으로 그려내는 것. 10권의 책이 세트로 묶이긴 하지만, 통일성을 주기보다 각각의 작품이 지닌 분위기를 살리는 편이 좋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야 나도 지치지 않고 작업을 이어가고, 보는 이들도 지루하지 않게 책에 접근할 수 있을 테니. <죄와벌>과 <백치>는 주인공을 부각시키는 형태로 작업했다. 특히 <죄와벌>의 경우 자신을 영웅시하며 죄를 정당화 하는 상권과 그 죄로 인해 괴로움에 빠지는 하권의 대비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데에 집중했다. 반대로 <악령>과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은 보다 많은 인물들을 배치했다.
작업 과정에서 유독 마음이 갔던 작품이 있었을까?
<악령>이 좋았다.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이와 소시오패스처럼 보이는 지나치게 냉정한 인물 간의 대비가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굉장히 입체적이고 심층적으로 인물을 살피는 도스토옙스키의 관점에 감탄을 했다.
고비의 순간도 궁금하다. 어떤 점이 가장 어려웠을까?
다양한 담론이 오고 갔던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현장과 지금의 간극을 줄이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철학적이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직관적이고 효용적인 생각이 주가 되는 시대이지 않나. 이 차이를 극복하고 싶었는데, 성공했는지 잘 모르겠다.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겠다. (웃음)
이 작업을 통해 이해한 도스토옙스키는 어떤 사람인가?
처음엔 괜히 거장으로 불리는 게 아니구나 싶어서 어렵고 대단해 보였는데, 차츰 그에게 접근하다 보니 생각보다 인간적인 면모가 많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젊었을 땐 사치도 심하고, 도박도 한 적이 있고, 시기 질투도 심했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런 자신의 바닥을 작품 속에서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거다. 밑바닥의 삶에서 온갖 인간 군상을 마주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현자가 되어가는 그의 삶을 알고 난 후 더 큰 애정이 생겼다.
10개월간 도스토옙스키의 세계에 빠져 완성한 그림이 담긴 10권의 책이 발간되었다. 소감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보통 시는 회화와, 소설은 영화나 연극과 비견된다고 하지 않나. 그런데 이번 작업은 소설을 회화로 옮기는 형태였다. 더군다나 도스토옙스키의 서사는 어떤 작품보다 다층적이다. 그런 그의 세계를 내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어서 어렵지만 즐거운 시간이었다. 오늘 책을 처음 받아봤는데, 감회가 새롭다. 내 그림이 이렇게 책으로 완성될 수 있구나 싶어서 신기하고. 해질까봐 함부로 만지지도 못하겠다. (웃음) 그만큼 소중한 작업이었다.
미술관에서도 도스토옙스키를 만날 수 있다. 열린책들이 그간 펴낸 도스토옙스키 전집, 관련 도서, 표지 원화를 중심으로 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전시 <BOOK+IMAGE10: 도스토옙스키, 영혼의 탐험가>가 12월 19일까지,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에서 개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