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늦가을답지 않게 청명한 어느 날, SNS를 뒤덮을 만큼 한 시대의 가구 트렌드를 선도한 박원민 작가를 파리 카펜터스 워크숍 갤러리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웬델 캐슬, 론 아라드, 스튜디오 욥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의 작품이 곳곳에 아무렇지 않게 놓인 그곳에서 그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터뷰를 위해 마주 앉은 그는 이게 다가 아니라는 듯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여전히 하고 싶은 게 넘치는 학생이라 말했다.
내일이 런던 카펜터스 워크숍 갤러리(이하 카펜터스)에서 열린 개인전 <스톤 앤 스틸(Stone & Steel)> 마지막 날인데, 파리에서 뵙네요. 돌아보면 어떤가요? 마무리를 짓는 느낌이에요. 4년 동안 준비한 신작 시리즈의 방점을 찍는 느낌이고요. <스톤 앤 스틸>에 전시한 작품들은 모두 일본에서 제작한 거라 이전 작업 과정과 여러모로 달랐거든요.
이곳은 어떤 곳인가요?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의 작품이 곳곳에 놓여 있어요. 제가 작가로 소속된 카펜터스의 공장 겸 작업실이에요. 거장부터 신진 디자이너까지 모두 아우르는, 세계 디자인 갤러리 중 존재감이 독보적인 곳이죠. 모든 소속 작가가 이곳에서 작업하는 건 아니에요. 저는 좀 특별하게 카펜터스 측의 제안을 받아 이곳에 자리 잡게 됐어요.
첫 작품 ‘헤이즈(Haze)’ 시리즈가 인스타그램과 핀터레스트를 뒤덮은 때가 있었습니다. 연이어 ‘헤이즈’처럼 레진 소재를 활용한 가구가 국내외를 막론하고 봇물처럼 쏟아졌죠. 2013년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처음 선보였는데, 반응이 엄청났어요. 당시에는 멤피스 디자인 그룹이나 미니멀리즘 작품들과 견주어 평가하는 사람이 많았고요. 그때는 가구에 화려한 색을 쓰는 추세가 아니었어요. ‘헤이즈’는 당시 디자인 신에 대한 반감과 도전 정신에서 출발한 작업이기도 해요. 색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기하학적 조형성을 띤 것도 그 때문이죠.
트렌드를 이끈 작가이자 디자이너로서 유행을 쉽게 따르는 요즘 디자인 신의 시류를 어떻게 보나요?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제가 처음으로 과감하게 레진을 가구에 도입했는데, 작품의 독창성만큼은 인정받았기 때문에 만족해요. 다만 몇몇 디자이너가 큰 고민 없이 다른 디자이너의 재료나 형태를 차용하는 건 의아하게 느껴질 때가 있죠. 이 점이 ‘헤이즈’ 이후 완전히 다른 작품 시리즈를 만든 동력이 됐어요. 레진만 재료로 활용하는 작가에 머물고 싶지 않았거든요.
얘기한 것처럼 이번 개인전에 쓰인 ‘스톤 앤 스틸’ 시리즈는 전작 ‘헤이즈’나 ‘플레인 컷츠(Plain-Cuts)’ 시리즈와 많이 달라 보여요. 요즘 부쩍 눈이 가는 새로운 재료가 있나요? 세라믹과 유리 그리고 ‘스톤 앤 스틸’에 활용한 것과는 다른 돌에 관심이 생겼어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다양한 재료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고, 여러 가지 재료를 아우르는 오케스트라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제게 전시는 논문을 발표하는 것과 비슷한 의미거든요. 형태는 다르지만 제 모든 작품은 연관성이 있어요. 컨셉트와 재료에 대한 탐구라는 공통의 주제로 이어지죠.
컨셉트와 재료에 대한 탐구라…. 좀 더 설명을 덧붙인다면요? ‘헤이즈’는 안개나 몽롱한 상태라는 뜻이고, 레진이라는 재료의 물성을 활용해 만든 가구 작품이라면, ‘플레인 컷츠’는 미니멀리즘을 대하는 작가로서의 제 관점에서 출발해 알루미늄 재료에 집중한 시리즈예요. 신작인 ‘스톤 앤 스틸’은 ‘플레인 컷츠’부터 이어진 금속에 대한 탐구이자 자연의 돌을 결합한 작품이고요. 이번 시리즈는 형태적으로는 직선 디자인의 틀을 깨고 싶었고,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곡선을 활용하고 싶었어요. 동양 미학과 작가로서 제 관점을 결합할 방법을 고민하다 우연히 일본 미야기현의 화산암을 발견해 완성했죠. 사실 작가로서 제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디자인을 하지 않는 것’이에요.
디자인하는 걸 원치 않는다니, 작가이자 디자이너에게 들으니 흥미로운 말이에요. 나가오카 겐메이(長岡賢明)가 떠오르기도 하고요. 작업 과정의 우연성 혹은 자연스러운 결과물을 지향한다는 뜻인가요? 계획한 것뿐 아니라, 그 외 외부 요소들이 작품에 결합되면 더 좋은 작업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스톤 앤 스틸’도 자연의 광물이 가진 미감을 최대한 표현하고자 했죠. 그 바탕에는 단색화와 ‘모노하(物派)’라는 예술 사조에 대한 제 관점이 있고요. 모노하는 1960년대 일본의 근대 산업화에 대한 반감에서 시작된 개념인데, 자연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작업 방식이에요. 이 개념에 단색화가 보여주는 비움과 여백의 미학에 대한 제 화답을 작품에 담은 것이기도 해요.
그 때문인지 박원민 작가의 작품을 보면, 재료 본연의 형태와 물성이 그대로 유유히 존재한다는 인상을 받아요. 그러기 위해서 매우 정교하고 까다로운 공정을 거쳤다는 사실이 흥미롭고요. 쉬워 보이고 단순하지만 만들기는 굉장히 어려워 보이는 작품이 주는 감동이 있어요. 아주 간단해서 따라 하기 힘든 것. 더 이상 간단해지기 힘들 만큼 단순한 작품을 만드는 게 제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봐요.
그렇다면 요즘 고민 중인 새로운 작업도 있나요? 건축적인 작업. 때가 되면 큰 스케일에 제 여러 가지 탐구 결과를 투영한 작업을 하고 싶어요. 당장은 제 가구와 어울릴 공간을 만드는 데서 시작하려고요.
영국왕립예술학교에서 건축 석사 과정을 밟고 있죠? 가구 분야에서 주목받는 디자이너가 건축을 공부한다니 놀라운 한편, 역사적으로 건축가가 가구를 만든 선례가 많아 자연스럽기도 해요. 건축도 결국 디자인이라는 걸 알게 됐거든요. 사실 건축가가 디자인을 한 경우는 많지만, 디자이너가 건축을 한 경우는 드물어요. 이런 현상을 깨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제가 추구하는 미학과 연계한 건축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싶어요. 일반적으로 말하는 건축과 다른, 박원민만이 할 수 있는 건축.
어쩐지 박원민 작가의 가구는 건축적이기도 해요. 형태를 쌓고 조합하는 방식과 비율은 물론, 형태와 형태 사이의 공간감도 건축적인 인상을 주죠. 비슷한 얘기를 건축가들에게 종종 들었는데,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몰랐어요. 그러다 제가 가구를 만드는 논리가 건축의 논리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됐죠. 작가로서 작업을 시작할 때부터 장식적인 디자인을 싫어했어요. 불필요하게 스타일리시한 형태도 납득할 수 없었고요.
작가이자 디자이너로서 스스로 어디까지 왔다고 생각하나요? 갈 길이 멀죠. 존경하는 노구치 이사무(野口勇) 같은 거장의 작품과 비교하면 더 배울 게 많구나 생각하고요. 실제로 학생이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여전히 학생의 자세를 잃고 싶지도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