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보선(일러스트레이터)
책 <적적한 공룡 만화> <나의 비거니즘 만화>

트위터에 ‘토르티야를 고작 하나 말아 먹었는데 배부르다니. 좀 억울한걸’이라고 올렸다가 잠시 후 내렸다. 인스타그램에 포스터를 게시하며 북 토크 소식을 알렸다. 스프링 노트에 만화 콘티를 그렸다. 언제부턴가 매일 어떻게든 기록하며 지낸다. 지금도 기록을 기록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아 통통한 비건 마시멜로를 하나씩 집어 먹으며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다. 비건 마시멜로는 처음 사 먹어 보는데, 겉은 딱딱해 보여도 한 입 깨물면 기다렸다는 듯 촉촉하고 달콤한 마시멜로가 입안에 가득 퍼진다. 기분이 절로 상승한다. 잡지에 실릴 에세이 주제로 ‘올해의 위로’를 꼽으라는 청탁을 받았을 때, 이 하얀 마력의 마시멜로를 제치고 ‘기록’이 당선되었다. 물론 내가 뽑은 것이다. 기록은 어떻게 나에게 위로가 되었을까.
과거를 기록하면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두게 된다.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는 시간의 특징에는 지금이 곧 과거가 되어버린다는 섬뜩한 부분이 있다. 앞으로 나아가자는 말은 많이 해도, 뒤를 돌아보자는 말은 별로 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중한 기억은 주기적으로 돌아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올 초 나는 인생을 돌아보며 사진 16장을 고르고 간단히 메모했다. 마음에 드는 사진들로 인생을 요약해보니 꽤 괜찮게 살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중한 기억을 뜯어 시각적으로든 청각적으로든 감각할 수 있게 남기는 건, 현재의 나에게 든든한 아군이 생기는 셈이다. 지금 나에게 확신이 서지 않고 불안할 때 이 기록물을 살펴본다. 나는 항상 흔들렸지만 그런데도 무사했다는 걸 확인한다.
기록엔 개인의 해석이 들어가며, 이는 기록 후 개인의 행보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책을 여러 권 계약하는 바람에 1년 내내 에세이를 썼는데, 당시에는 별 감흥 없던 사건이라도 글로 옮기려고 기억을 더듬어보면 꼭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의 내 입장에서 그때 놓쳤던 의미와 가치를 끄집어낸다. 나에겐 기록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서 그런지, 기록의 결말을 ‘~하고 싶다’, ‘~하면 좋겠다’, ‘~할 것이다’라고 끝내는 경우가 많다. 억지스러울지라도 이런 성찰과 다짐으로, 기록 후 얇은 종이 한 장 정도 용기를 다지게 된다.

기록하며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위로받은 경우도 있었다. 기록물엔 나의 민낯과 가면이 여실히 드러나는데, 이런 기록물을 타인과 공유했을 때다. 타인의 반응에 대해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내가 담담하게 글과 사진을 공개한 듯 보여도 사실은 여러 번의 검열을 거쳐 밖으로 보낸 것이다. 우려와 달리 사람들은 나의 기록물을 좋아했다. 싫어서 떠난 이들도 있지만, 내 곁에 머물거나 혹은 새롭게 다가온 이들이 훨씬 소중하다. 그 우정과 사랑 덕분에 나는, 나를 더 포용하게 되었다.

이만하면 ‘올해의 위로’로 기록을 뽑은 이유가 충분히 설명되었을까. 마지막으로 즐거운 소식 하나 남기며 글을 마친다. 기록자의 마음만 있다면 세상 모든 것은 기록의 소재가 된다는 사실.

 

코니아일랜드
이코베(파트타임 아티스트)

바다를 좋아한 건 오래되지 않았다. 산이냐 바다냐 고르라면 선택은 언제나 후자였지만. 십 수 년 전, 광고 회사를 때려치우고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을 때 우연히 들른 곳이 양양이었고, 주말이면 그곳에서 알게 된 사람의 차를 얻어 타고 바다 앞에 있었다.
뉴욕의 코니아일랜드는 아름다운 바다라고 얘기하긴 어렵다. 포트안토니오의 바다처럼 꿈결 같지도, 니스의 그것처럼 동화 같지도, 몬탁의 해변만큼 더럽게 쓸쓸하지도 않다. 습관처럼 코니아일랜드를 찾는 건 순전히 지리적 이점 때문일 것이다. 자가용도 없는 내가 2.75달러만 지불하면 24시간 운행하는 지하철을 타고 환승 없이 한 번에 간다. 모두가 잠드는 새벽에도 지하철로 1시간, 걸어서 10분. 바다는 혼자서 갈 수 있어야 오롯이 내 것이 된다.

혼자 가는 바다는 장소라기보다 기이한 생명체로 느껴진다. 단단한 쇠도 녹슬게 만드는 바닷바람을 맞으며 거대하거나 잔잔하게 치는 파도를 보고 있으면 바다의 기분을 알 수 있다. 일출 전의 코니아일랜드는 파스텔 톤으로 물든다. 갈매기들은 작은 파도에 몸을 씻기도 하고 민망할 정도로 큰 소리를 내기도 한다. 물가에는 파도가 모래사장을 정갈하게 빚어놓아 바짓단이 젖지 않게 걷을 수 있다. 바다를 걷다 보면 오래전, 나보다 큰 동물을 보았을 때 느낀 연민과 호기심, 출처 모를 이해심 같은 것들이 파도에 섞여 밀려온다. 떠내려간다.

지난달, 파리의 팔레 드 도쿄에서 열린 아네 임호프(Anne Imhof) 전시를 관람했다. 인상 깊은 장면은 트레이닝팬츠만 걸친 아티스트가 무릎까지 차오르는 바닷물을 채찍질하는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이었다. 새벽 푸르스름한 기운을 머금은 바다를 채찍으로 내려친다. 통쾌함과 아픔이 순서 없이 떠올랐지만, 바다는 어떤 상처도 남기지 않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나의 바다를 떠올렸다. 코니아일랜드. 비어 있는 지하철을 타고, 비어 있는 거리를 걸어 도착하면 비어 있던 나의 바다. 나는 그곳에서만 마음속 깊이 숨겨놓은 감정을 내다버릴 수 있다.

 

제임슨 위스키
장진택(독립기획자, 프로듀서)

올해도 참 힘든 한 해였다. 어느새 두 해를 넘겨버린 코로나19 시대에 내가 속한 문화 예술계도 서로 다른 입장에서 나름의 일들을 겪어낸 것 같다. 다채로운 형상의 예술 범주는 많은 경우 만남을 중요한 창작의 계기로 삼는다. 미술 역시 마찬가지로 작가, 기획자, 관람객 사이의 복합적인 구도에서 일으켜지는 다양한 관계의 힘으로 스스로를 영위한다. 예기치 못한 작금의 상황은 만남을 우리의 일상에서 지워버렸다. 이로써 만남을 통해 새로움을 창출하고 향유하고자 했던 미술의 영역 또한 오롯이 존재할 수 없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리라. 독립기획자로 살아가는 내가 올해는 직접 전시를 기획하기보다 다른 전시나 작가들의 작업을 살피고 비평할 기회를 좀 더 갖기로 한 연유도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만의 저작물을 만들어내는 작업이기에 꽤 큰 성취감을 돌려주지만, 그만큼 외롭고 고통스러운 창작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는 점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글을 집필하는 과정의 어려움을 평소라면 동료들과 함께하는 술자리로 풀었겠지만, 나는 올해 위스키를 마시며 참 자주 다독거렸다.

그중-혹자는 제머슨 혹은 제이미슨이라고도 부르는-아일랜드산 생명의 물 제임슨(Jameson Irish Whiskey)은 올 한 해 내가 인고의 시간을 잘 보낼 수 있게 해준 소박하고도 진솔한 위로였다. 코끝에 풍기는 상큼한 과일 향과 이를 뒤따르는 바닐라와 오크의 조화는 글을 쓰며 가라앉았던 내 감정을 북돋거나 혹은 혼란해진 감정을 진정시키고 가라앉혀주었다. 이를 한 모금 머금으면 화한 꿀풀과 견과류의 고소함과 과일이나 캐러멜을 졸인 것 같은 눅진한 달큼함 그리고 그슬린 나무의 복합적인 향과 맛이 안을 풍부하게 채웠다. 이어 목 넘김에서 느껴지는 가볍고 부드러운 질감과 다시금 거슬러오는 훈연의 후각 자극까지, 그 다층적인 맛과 향을 헤치는 가운데 또 다른 기분 좋은 몰입의 순간을 내게 선사했다. 가벼우며 부드럽고, 묵직하면서도 다채로운 감각으로 균형 잡힌 독특한 제임슨만의 풍미는 이러한 이유로 비로소 내가 생각을 잠시 멈추고 오롯이 휴식에 집중할 수 있게 했다.

누군가에게 영감이나 위로의 역할을 하는 예술에 종사하는 내가 받는 유일한 위로가 이 위스키 한 잔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씁쓸하기도, 다른 한편으론 그런 대상이 있다는 사실에 다행스럽기도 하다. 예술과 글쓰기 그리고 술이라는 위로를 위한 나의 이 조합이 누군가에겐 진부해 보일 수도 있을 테지만, 예술도 위로도 어쩌면 다 그것을 경험하는 이의 마음에 달린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