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
최유리(뮤지션) 음반 <여정>
평창에 있는 본가에 새하얀 강아지가 있다. 이름은 ‘최땅콩’, 이제 곧 네 살이 된다. 땅콩이가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내 손발을 온 힘을 다해 깨무는데 간지럽기만 했다. 그러다 금방 몸집이 커져 엄청나게 큰 행복을 담당하게 되었다. 가끔 슬럼프에 빠질 때나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면 본가에 내려가 강아지와 하루만 시간을 보내도 마음이 한껏 따듯해진다. 그러지 못할 땐 강아지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마음을 추스른다.
20년 넘게 어디에서나 막내로 지내던 나에게 그렇게 부담 가지지 않고 살아도 된다고 말해주듯이 갑자기 나타나 동생이 되어준 이 하얀 강아지는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다. 흰 우유를 마시지 못하는 내가 락토 프리 우유를 사서 마실 때 같이 마셔주는 친구가 되어주었고, 내가 어디서 무얼 하든 땅콩이는 날 사랑해주고 있을 거라 믿는다. 식구들과 통화하다가 수화기 너머 내 목소리가 들리면 끙끙거리며 보고 싶다는 듯 울어주는 땅콩이가 너무 사랑스럽고, 자주 안아주지 못해 미안하다.
내가 사다 준 사료를 잘 먹어주는 것, 무표정하게 있다가 제 이름만 부르면 씩 웃으면서 안아달라는 듯 쳐다보는 것, 꼭 사람처럼 감정 표현도 곧잘 하고 대화가 되는 듯한 느낌. 사실 이 정도만 해도 내가 땅콩이와 함께 살아갈 이유는 충분하다. 앞으로 평생 내 곁에 있어주지는 못하겠지만, 내가 받은 사랑을 최선을 다해 전부 돌려주고 뭐든 다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 언젠가 어떤 영상에서 강아지와 늑대의 차이점은 사람을 사랑하는 유전자의 유무뿐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세상에 태어나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 친구에게 내가 무얼 못 해줄까 싶다.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땅콩이와 나 둘 다 서로 사랑하며 내년에도 잘 살아가야겠다.
커피
김겨울(작가 겸 유튜브 채널 <겨울서점> 운영자)
책 <책의 말들> <독서의 기쁨>
일하는 동안, 밥 먹는 동안, 책 읽는 동안 나는 오늘 치의 커피와 내일 마실 커피를 생각하고 있다. 내가 할당해둔 하루의 커피량은 에스프레소 기준으로 2샷에서 4샷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1~2샷을 넣은 아메리카노 한 잔, 점심을 먹은 후에 다시 1~2샷을 넣은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오후 3시 이후에는 디카페인 커피를, 피치 못할 경우에는 카페인이 든 커피를 마신다. 에스프레소 샷 대신 콜드브루나 커피 메이커에 내린 커피를 마실 때도 있다. 커피는 카페인 성분 때문에 실제로도 연료가 되어주지만, 그보다는 마음의 연료에 가깝다.
커피를 준비하는 건 일종의 의식이다. 내가 지금부터 자리에 앉아 주어진 일을 해내겠다는 신호다. 아침에 일어나 에스프레소 머신의 전원을 켜거나 커피 메이커에 원두를 넣으면서 느끼는 건 살아 있는 몸과 그 몸이 사는 시간에 대한 감각이다. 나는 오늘도 이 향을 맡고 이것을 마실 수 있다. 나는 이것을 마심으로써 고된 일이 사실은 조금 즐길 구석이 있다고 믿을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속임수다. 힘든 것(일)에 좋은 것(커피)을 붙여서 힘든 것을 좋은 것으로 만들려는 속셈이다. 혹은 힘든 것(일) 대신 힘든 것(삶)이라고 해도 된다.
나는 나를 커피로 평생 속여왔기 때문에, 즉 매일 그날의 커피 덕분에 삶을 그나마 견딜 수 있었기 때문에, 이제는 삶이 원래 견딜 만한 것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커피가 없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애초에 커피가 없었던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가정은 무의미하다. 오늘이 끔찍할 때도,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내일을 생각할 때 좋을 게 하나도 없을 때도 나는 나를 속일 수 있다. 그 향과 그 맛과 그 안온함, 그 풍부함이 어찌 되었든 나의 좋은 부분을 지켜줄 것이라고 나를 위로한다.
아침에 의식이 돌아왔지만 아직 몸이 잠들어 있는 그때 커피를 생각한다. 기분이 개운해지면서 모든 게 리셋되는 느낌이 든다. 삶에는 리셋 버튼이 없고, 그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지만, 커피는 매일의 가짜 리셋 버튼이 되어준다. 가짜라고 해도 누를 수 있는 버튼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다르다. 무엇보다도 그것을 누르는 내가 매일 기꺼운 마음으로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그것을 리셋이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 뉴-셋이라고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매일의 시작을 위한 새로운(뉴) 세팅. 매일의 목표는 그날의 커피를 마시는 것, 그럴 수 있게 살아 있는 것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크리스마스캐럴
황진아(매거진 <포인핸드> 에디터)
나는 모든 계절에 크리스마스캐럴을 듣는다. 유튜브 채널에 들어가 재즈 버전부터 팝 버전까지 타인이 잘 마련해놓은 곡을 기분에 따라 골라 듣기도 하고,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졌을 때’, ‘산책하기 좋은 여유로운 오후에’, ‘한밤중에 드라이브하면서’처럼 상황별로 내가 직접 고른 캐럴 플레이리스트를 선택하기도 한다.
요즘에는 와일드선(Wildson)의 음악을 자주 듣는다. 내가 다니는 회사 사무실에서는 근무시간에도 항상 배경음악을 틀어두는데, 우연히 듣고 음색이 매력 있어 찾아본 아티스트다. ‘Let It Show’, ‘Friendliest Time of Year’ 같이 흥겨운 곡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Carry a Song’이라는 곡을 가장 즐겨 듣는다. 잔잔하고 차분한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향초를 켜둔 방에서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따뜻한 뱅쇼를 마시고 싶은 기분이 든다.
이렇듯 캐럴을 들으면 겨울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산타의 존재를 믿었던 시절, “장롱 속에 누가 선물 놓고 간 것 같더라” 하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던 젊은 엄마의 옆모습. 공기가 차고 푸른빛이 도는 새벽 어스름에 양손을 주머니에 끼워 넣고 혼자 교회로 향하던 길. 김이 잔뜩 서린 식당에서 미지근해진 나베 요리를 사이에 두고 좋아하는 사람과 하염없이 떠들던 밤. 허리를 숙여 진열장의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유심히 고르던 친구들의 눈빛. 거리에 늘어선 조명과 쌓이지 않는 눈 사이로 겉옷을 여미며 바삐 발걸음을 옮기는 행인들.
나는 사계가 뚜렷한 나라에 살고, 계절은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지만 유독 겨울의 장면들은 멀고 아득하게 느껴진다. 이미 지나간 겨울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때문인지, 다가올 겨울을 향한 묘한 설렘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중요한 건 이 어렴풋하고 실체 없는 시절이 나의 1년을 붙잡고 위로해준다는 것.
그래서 이유 없이 들뜨는 봄에도, 밝고 소란한 여름에도, 모든 것에 적당히 무심해지는 가을에도 나는 캐럴을 듣는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스친 익숙한 향기로 홀연히 과거를 떠올리는 것처럼 예상하지 못했을 때 마주해야 더 소중한 기억들이 있다. 혹여 캐럴을 너무 자주 들어 이 감정에 무뎌질까 봐 조금씩 아껴 듣곤 하는데 어느새 마음껏 들을 수 있는, 그래도 되는 12월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