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이 보이는 곳에 자리 잡은 서울 북촌의 ‘수영’(김새벽)과 ‘종구’(곽민규)의 집.
외국인 ‘소피’(아나 루지에로)가 나흘 동안 그곳에 머무르다 떠난다.
2년 후 어느 날, 수영이 소피의 블로그를 발견하면서 잊고 지낸 과거의 일상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나흘 동안 소피는 북촌 일대를 걷거나 친구를 만난다. 수영과 종구는 크게 말다툼을 하지만 이내 꽃 선물을 하거나 치킨을 먹으러 나간다.
소소한 일상을 가볍게 회상하는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 시간 속에 이제한 감독은 미묘하게 얽힌 순간들의 감정과 생각을 담아냈다.
소피의 시선과 수영의 기억, 서로 마주 보는 인왕산과 집 사이에 흘렀을 아득한 시간들.
그 모든 것들 덕분에 배우 김새벽은 영화 <소피의 세계>에서 ‘진짜 같은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소피의 세계> 분량의 반 이상에서 배경이 되는 인왕산 보이는 집이 인상적이에요. 촬영지가 북촌마을 맞죠? 이제한 네, 저희 집이기도 하고 주요 촬영지였죠. 감독님과 김새벽 배우는 전작인 단편영화 <마지막 손님>에 이어 두 번째로 연출자와 배우로 만났더군요. 이제한 맞아요. 단편영화로 만나기 약 10년 전까지는 홍상수 감독님 촬영 현장에 스태프로 일하러 갔을 때 여러번 뵀어요. <마지막 손님>을 찍을 때 처음으로 부탁을 드렸죠. 보통 시나리오 쓸 때 마음속으로 배우를 정해요. 그때 제일 먼저 떠오른 인물이 새벽 씨였습니다.
김새벽 배우의 배역 이름이 <마지막 손님>과 <소피의 세계>에서 같아요. ‘수영’이라는 캐릭터 이름에 담은 뜻이 있나요? 이제한 수영이라는 이름은 스태프 한 분의 의견으로 정해졌어요. 시인 이름이기도 하죠. 김수영 시인이요. 아마 한자로 물, 호수(洙暎) 같은 뜻이 있었던 것 같아요. 뜻도 예쁘고 발음도 좋아서 썼어요. 무엇보다 제 영화 안에서는 수영이라는 이름과 배우 김새벽이 연결돼 있잖아요. <소피의 세계>를 쓸 때 ‘수영’으로 시작했어요. 다 쓰고 나서도 굳이 이름을 바꿀 필요는 없겠다 싶었습니다. 내용과 특별한 연관성은 없어요.
김새벽 배우는 처음 <소피의 세계>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기억하세요? 김새벽 감독님과 촬영을 맡은 김수민 촬영감독이 부부예요. 평소에 두 분을 자주 만나고 참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신나게 읽었는데 수영과 종구의 부부 관계가 너무 사실적이고 디테일하게 쓰여 있더라고요. 두 분한테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있나 걱정하면서 읽었어요. 경험에서 나온 거라면 내가 뭐라도 도와줘야겠다 싶었죠. 이제한 영화 내용에 어머니가 편찮으시고, 집에 대한 문제도 있잖아요. 다 만들어낸 픽션인데 어떤 의미에서는 그 장면이 새벽 씨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아요. ‘배우로서 뭔가 마음이 동해서 그런 말을 했던 건 아닐까?’ 저는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김새벽 진짜 같은 어떤 것들이 느껴졌어요. 그런 걸 염두에 두고 썼다면 같이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완성된 영화의 첫인상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김새벽 묘하게 쓸쓸했어요. 영화의 결말이 쓸쓸하진 않은데 분위기 자체가 그랬어요.
수영이라는 캐릭터를 만들 때도 쓸쓸한 마음이 있었나요? 이제한 새벽 씨가 말한 쓸쓸함이 제가 생각했던 감정하고 닮은 것 같아요. 맨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 거실에서 인왕산을 보고 있는데 이상하게 슬프게 느껴졌어요. 집에 있는 사람이 산을 보잖아요. 반대로 산도 그 집을 보고 있죠. 서로가 바라보고 있는데 사람의 시간과 산이라는 존재가 가진 시간은 완전히 다른 것 같았습니다. ‘나는 언젠가 떠나겠지? 저 산은 계속 여기를 바라보고 있겠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바라봤을까?’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이상한 쓸쓸함,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감정이 영화에 조금씩 있어요.
대자연을 대할 때 드는 무력감이 있는 것 같아요. 물도 계속 바라보면 비슷한 공허감이 느껴질 때가 있지 않나요? 김새벽 맞아요. 진짜 답답하고 너무 막막할 때 폭포를 보러 간 적이 있어요. 막연하게 폭포를 보고 싶어서 갔더니, 지금의 고민과 문제라고 생각하는 게 되게 하찮게 보이는 거예요. 종구랑 수영이 겪는 일도 나중에는 기억도 정확히 안 나고 그게 맞는 기억인지도 잘 모를 거예요. ‘그때는 되게 힘들었구나’ 하고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때가 오죠. 이제한 멀리 떨어져 있는 산의 입장으로 바라보는 방향을 바꿔보니 느껴지는 감정이 영화의 중심이 되는 씨앗이었던 것 같아요.
여행자인 소피의 시선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부부의 일상과 고민거리가 오히려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이제한 이야기를 처음 쓸 때 소피를 가장 먼저 떠올렸어요.한국을 찾은 여행객이라는 설정을 주고, 소피가 머물 곳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까지 생각을 발전시켰습니다.
특별히 중요하게 생각한 장면이 있다면요? 이제한 수영과 종구가 집 문제로 싸우는 시퀀스 전체에 집중했어요. 일단 인왕산과 집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니까 그 집에 있는 사람들이 중요해졌거든요. 집 문제가 있을 수 있겠다 싶었고, 두 사람의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굉장히 깊고, 확실하고, 단순한 방법으로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가 최악으로 치닫는 어떤 순간에 소피가 있었던 거죠. 소피는 그 세계를 스쳐서 지나간 사람이에요. 살짝 문틈으로 엿들은 소피의 순간적인 기억이고, 수영의 기억도 한 시간 남짓 포함된 2년 전의 어떤 순간을 그린 장면이었어요. 싸우는 신만 분량이 8분 정도 되고, 시나리오로도 A4 용지 7페이지 정도 대사가 이어지는 어렵고 중요한 장면이었습니다.
그 길고 중요한 장면을 첫 테이크에 오케이 했다고 들었어요. 이제한 맞아요. 두 번째 테이크는 중간 정도 지켜보다가 컷 했어요. 첫 테이크에 충분히 만족했는데, 오래 걸릴 걸 각오하고 촬영한 거라 다른 방향이 있을까 하고 한 번 더 부탁드렸죠. 그런데 두 배우가 에너지를 첫 테이크에 다 쏟은 거예요. 김새벽 반성을 많이 했어요. 감독님이 원하면 열 번이라도 다시 해야 하는데! 대사가 너무 길고 대본에 행동 지문까지 다 쓰여 있었어요. ‘엎드린다, 뒤로 돈다, 앉는다.’ 부담감을 갖고 연기한때문인지 화면으로 보니까 다리가 막 떨리더라고요. 사람이 악을 쓰면 힘이 풀리잖아요. 제 다리가 멈추지 않는 거예요. 이제한 너무 자연스러웠어요. 사실 첫 테이크 보면서 울컥하더라고요.
영화는 현재의 수영이 2년 전에 그 집에 묵었던 소피를 회상하는 액자식 구조인데요. 돌아보면 수영은 소피를 얼마나 각별하게 생각했을까요? 김새벽 소피가 첫번째 손님은 아닐 것 같아요. 그 전에도 여러 손님을 받았을 거고, 특별한 일들이 생기잖아요. 그때마다 최선을 다했고 정말 고마운 마음이 있었을 거예요. 다만 시간이 흘러서 ‘그때 이런 일이 있었지’ 하는 정도로 기억이 흐려졌을 거고요. 살다 보면 혼란의 시기나 마음이 힘들었던 시기도 나중에 돌아보면 ‘맞다, 나 그런 일이 있었지’ 하게 되잖아요. 아마 소피가 인왕산에 같이 가자고 제안한 것도 생각해보면 고마웠을 거예요.
영화에서 소피만 빼고 수영과 종구뿐 아니라 다들 짝이 있어요. 마침 소피는 “나는 혼자가 싫어. 혼자 있으면 우울해져”라고 말하더군요. 이제한 감독 나중에 보니 집 밖에 지나가는 사람들도 부부였더라고요. 제가 혼자 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은연중에 그런 대사까지 쓰게 된 것 같아요. 의도하진 않았거든요.
문득 두 분의 여행 스타일은 어떤지 궁금해지는데요. 이제한 보통 아내를 따라다닙니다. 혼자 있는 걸 싫어해요. 우울해서… 제가 소피였네요. 김새벽 여행을 좋아했는데 요즘 갈증을 느끼지는 않아요. 옛날에는 혼자 다니는 걸 좋아했는데, 친한 친구랑 즐겁게 여행한 뒤로는 혼자 가는 게 싫더라고요.
여러 감정과 시간을 쌓아 완성한 영화입니다. 관객이 어떤 마음으로 보길 바라나요? 이제한 내가 겪은 과거의 일을 생각하거나 다시 바라볼 때 느끼는 어떤 감정들, 과정이 영화와 닮아 있어요. 옛날 일을 떠올리면 그 당시에 겪을 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보이잖아요. 그 순간에서 멀어졌으니까. 관객들도 영화를 보고 나서 그런 감정을 느끼면 좋겠습니다. 김새벽 구조적으로 단순한 영화는 아닌 것 같아요. 그걸 생각하면 오히려 방해가 될 것 같고, 그냥 카페 가서 옆 테이블 사람들 구경하듯이 편한 마음으로 보러 가시면 좋겠어요. 저는 아까 말한 폭포랑 진짜 비슷한 지점이 좋았어요. 무언가 힘든 게 지금 나를 다 잡아먹을 것 같지만 그런 게 아닐 수도 있겠다. 지금 만나는 어떤 것들에 다 그냥 감사하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인연이든, 시간이든, 사건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