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아내린 협곡의 물길과 율리이스카 알프스 초원을 만끽하려는 봄의 하이커들.

 

순례자의 빙하 호수
블레드 섬, 슬로베니아
(Bled Island, Slovenia)

검은 해초가 물 밑에 누워 흔들거리면, 물의 깊이가 자라나는 시간이다. 율리이스카 산맥 (Julijske Alpe)의 빙하가 녹아내린 봄의 호수는 거울처럼 반짝이고, 호수 한가운데 섬의 하얀 종탑은 초기 순례자의 신앙처럼 경건하다. 중세시대에는 푸른 벼랑에 매달린 외딴 성에서 신을 향한 소리가 깊은 파동으로 너울댔을 것이다. 율리이스카 산맥과 카라반케 산맥(Karavanke Alpe)에 둘러싸인 블레드 호수(Lake Bled)는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워서, 고독한 순례의 땅이 아닌 황홀하고 비밀스러운 시간을 떠올리게 한 다. 섬에 봄이 오면 옅은 초록의 전원 풍경이 사 람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한다. 장엄한 봉우리로 둘러싸인 유리빛 호수 앞에서 입속말들은 부서 지고, 깊은 응시가 떠다닌다.

블레드 호수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수억년전 빙하가 훑고 간 대지에 깊은 상처가 생겼고, 거대한 율리이스카 산맥에 가로막힌 빙하는 그대로 갇혀 우물이 되었다. 신비로운 자연에는 언제나 그에 걸맞은 이야기가 따르듯이 블레드 호수에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전설이 있다. 풀이 무성한 계곡으로 가득하던 고대의 시간,산의 요정들은 땅 한가운데 놓인 바위언덕에서 밤마다 춤을 췄다. 요정들은 바위 주변에 풀씨를 뿌리던 양치기에게 미끄러운 풀이 자라지 않도록 울타리를 설치하라고 요청했지만, 양치기는요정의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가장 아름다운 요정이 춤을 추다가 다리가 부러졌고, 화난 요정들이 산에 물길을 내온 땅을 범람하게 했다. 침수된 땅에 유일하게 남은 바위 언덕 위에서 요정들은 계속 춤을 췄다. 그 바위 언덕이 바로 블레드섬이다.

섬에는 99개 계단으로 이어진 성모승천교회(Church of the Assumption)와 가파른 절벽의 고성(Bled Castle)이 있다. 교회가 세워지기 전 이곳에 생명과 다산의 여신을 모시던 사당이 있었다는사실이 흥미롭다. 어쩌면 신화 속 요정은 자연과 교감하던 블레드섬의 여성들이었을지도 모른다. 현재의 바로크양식 건물은 17세기 중반에 지어졌는데, 사람들은 내부보다 남쪽으로 난 99개 돌단에 더 관심을 보인다. 블레드 섬의 교회에서 결혼하려면 신랑이 이 계단을 모 두 올라야 한다는 오랜 관습이 있기 때문이다.

따뜻한 계절이 오면 지역 전통대로 결혼을 앞둔 신랑이 신부를 곤돌라에 태워 이 계단에 내릴 것이다. 계단을 다 오르고 난 다음엔 52m높이의 ‘소원의 종’ 아래에 서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힘차게 밧줄을 당겨야 한다. 블레드섬에서는 사랑의 염원을 담은 종소리가 하루에서도 수십 번 울려 퍼진다.

플레트나(pletna)로 불리는 곤돌라를 타고 호수를 돌아보는 경험은 경이롭다. 호수에 미끄 러지던 청둥오리와 백조가 물속에 고개를 박고 성실하게 사냥에 몰입하는 동안 한쪽에서는 다이버들이 최대 수심 30m의 호수 안쪽을 탐험한 다.종종송어,메기같은큰물고기들이퍼덕거리며 수면 위로 튀어 오른다. 슬로베니아 사람들은 블레드 호수에 특별한 치유의 힘이 있다고 믿는데, 실제로 호수 동쪽에 20°C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 미지근한 온천수가 솟는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호반을 어슬렁거리며 고유의 시간을 쌓고, 졸음에 빠지고, 수면 위를 미끄러지다가 싱그럽게 뛰어든다. 이제야 왜 이곳이 ‘신이 만든 관광 명소’라 불리는지 끄덕거린다.

 

 

 

 

고대의 시간부터 지중해의 중요한 무역도시이던 마르세유의 옛항구.저멀리노트르담드라 가르드 대성당이 보인다.

 

지중해 항구 마을 산책
마르세유, 프랑스
(Marseille, France)

수천년동안 마르세유의 옛 항구 비외포르 (Vieux-Port)에는 아프리카, 중동, 이웃 유럽 국가에서 출발한 선박들이 정박했다. 오랜 바닷길 을 버틴 뱃사람들은 요새 양쪽으로 들어선 주점 에서 희뿌연 파스티스(Pastis, 로컬 식전주)를 곁들여 한낮부터 육지의 맛을 만끽했을 것이다. 기원전 600년 고대 그리스 포카이아인의 혈통을 이어받았고, 파리 다음으로 오래된 도시 마르세유는 프랑스에서 가장 다원 문화가 공존하는 활기찬 항구도시다. 북아프리카 출신 이민자가 인 구의 4분의 1이고 러시아와 이탈리아, 알제리에서 온 이민자도 상당하다. 옛 항구는 프랑스 남부의 햇빛 찬란한 풍경과 마르세유다운 활력을 마주하는 여행의 시작점이다.

지중해의 대표 무역항이던 마르세유 옛 항구에는 이제 거친 뱃사람들이 만들어내던 풍경은 사라지고, 근사하게 잘빠진 새하얀 요트가 빼곡하게 점령하는 중이다. 아침마다 열리는 어시장에 신선한 생선을 실어 나르는 어선들도 한쪽에 즐비하다. 사람들은 노먼 포스터의 천장 거울 아래 에서 여행을 모의하고, 운이 나쁘면 종종 소매치기를 당하기도 한다. 옛 항구에서 마르세유 전망대로 불리는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대성당(Basilique Notre Dame de la Garde)까지 산책해보자. 낯선 도시를 여행할 때 전망대만큼 좋은 출발점은 없으니까. 옛 항구에서 고작 1km 남짓 떨어져 있지만, 마르세유에서 가장 높은 지 대인 해발 154m의 라가르드에 자리해 경사가 상당한 편이다. 석회암 구릉에 꼿꼿하게 서 있는 화려한 건축물은 멀리에서도 선명한 줄무늬 문양과 거대한 돔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1800년 대에 지어진 네오비잔틴 양식 성당이다. 고개를 들면 종탑 꼭대기에서 황금빛 마리아상이 도시를 안온하게 내려다보고,발 끝 아래로 붉은 테라코타 지붕 물결이 펼쳐진다.

가장 마르세유다운 풍경을 좇아 고대 도로를 따라 그리스인의 최초 정착지인 르파니에(Le Panier)로 향한다. 마르세유 현지인은 르파니에에 가면 원하는 것을 발견할 것이라 조언한다. 미로같은 협소한 골목과 가파른 언덕 사이에 다양한 지역에서 온 예술가들의 수공예품을 판매하 는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어딘가에서 비 릿한 부야베스 냄새가 새어 나온다. 구시가 광장과 종일 강한 햇살을 받는 카페들이 계단식 주택사이에서 반짝거린다. 그 중심에 바로크양식의 독창적 건축물인 르비에유 샤리테(Le Vieille Charite)가 있다. 프랑스의 중요한 조각가 피에르 퓌제(Pierre Puget)가 1640년 자선 시설로 지은 건물로 부랑자나 고아, 환자를 수용하기 위해쓰였다. 과거의 흔적을 더는 찾아 볼 수 없고, 우아한 중앙 예배당과 아케이드 안뜰이 있는 안쪽은 무척 조화롭고 아름답기만 하다. 현재는 고고학 박물관으로 변모해 전시가 한창이다.

복잡한 마르세유 산책을 마친 다음에는 옛 항구에서 페리를 타면 순식간에 도착하는 레칼 랑크(Les Calanques)로 가야 한다. 육지를 불과 몇분 벗어났을 뿐인데 짙푸른 터키석색 바다에눈이부신다. 새하얀 석회암 해벽사이의 좁은 협곡을 ‘칼랑크’라고 부르는데, 코르시카어로 ‘바다의 좁은 물어귀’라는 뜻이다. 이 거칠고 장엄한 바위투성이는 20km에 달하고, 일부 지역은 카약없이 다다를 수 없을만큼 깊고 외지다. 가을부터 봄까지 개방하는 산책로를 따라 레칼 랑크를 둘러보자(여름에는 화재 위험으로 산책 로를 폐쇄한다). 지중해 관목이 늘어선 길 위에서 운이 좋으면 수줍은 보넬리 독수리와 유럽에서 가장 큰 도마뱀을 마주칠지도 모른다.

 

 

 

피르스트 정상에서 바흐알프 호수로 가는 야생화 트레일.

알프스 산악 마을을 따라
그린델발트 피르스트, 스위스
(Grindelwald First, Switzerland)

알프스의 봄을 가장 기다리는 존재는 소들일 것이다. 매년 가을이면 거대한 소방울을 메고 화려한 수가 놓인 전통의상을 입은 목동들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소들을 진두지휘하며 골짜기를 가로질러 하산한다. 겨우내 마을 목장에서 추위를 견딘 소들은 봄이 오면 다시 산의 여정에 오른다. 야생화 화환으로 멋지게 장식한 산의 여왕이 어슬렁거리며 알프스 초원으로 향하는 계절이다. 땡그랑, 땡그랑 가장 큰 종을 울리는 소가 무리의 대장이다. 근사한 워낭 소리를 사방으로 흩뿌리며 열심히 풀을 뜯는 소들 사이로 배낭을 멘 하이커들이 씩씩하게 걷는다. 연초록의 구릉에 봄의 야생화들이 솟아오르고, 풍성하게 콸콸거리는 계곡 너머로 수많은 작은 존재들의 소리가 채워진다. 알프스의 작은 산악 마을 그린델발트 는 귀여운 생동감이 넘친다.

그린델발트는 아이거(Eiger) 북벽 바로 아래, 세개의 봉우리가 에워싸고 있는 빙하 분지마을이다. 스위스의 대표적 알프스 여행지인 융프라 우(Jungfrau) 지역에 속하지만, 흔히 전망대에 서 신라면을 먹는 융프라우요흐 루트에서는 살 짝 빗겨 있다. 융프라우를 찍고 내려오는 데만 종 일이 걸리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그린델발트를 지나쳐 바로 정상으로 향한다. 인터라켄오 스트 역에서 융프라우 철도를 타고 정상으로 향하는 기찻길에 그린델발트 역이 있다. 이곳을 융프라 우로 올라가는 기점으로만 알고 있다면, 산 기슭 목초지에 지천으로 깔린 봄의 야생화를 보 고 놀라게 될 것이다. 융프라우 지역에서 가장 많 은 사랑을 받는 하이킹 트레일이 이곳에 있다.

웅장한 아이거 산맥을 보느라 고개는 늘 저 먼 산등성이를 향하게 되지만, 그린델발트 저지대에서 또 다른 신비로운 풍광을 목격할 수 있다. 중세 말까지 그린델발트 일대에 흩어져 있던 빙하가 녹으면서 높이 100m의 골짜기 글레처슐 루흐트(Gletscherschlucht)가 생긴 것. 더이상 빙하는 찾아볼 수 없지만,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협곡 아래로 떨어지는 거대한 물길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다. 암벽에 조성한 트레일과 터널 덕분에 물길 가까이 접근하며 하이킹을 즐길 수 있다.

스위스 전역에 표지판만 설치된 하이킹 트 레일이 자그마치 6만5000km가 넘는다.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길까지 포함하면 스위스를  하이커의 나라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린델발트에서 곤돌라를 타고 해발 2168m 의 피르스트(First) 정상에 다다르면, 바흐알프 (Bachalp) 호수까지 걷는 트레일과 만난다. 여행자들은 800m 높이의 피르스트 플라이어 (First Flyer) 로프에 매달려 시속 84km 속도로 날아가는 스릴을 즐기거나 소문난 트로티바이크(trottibike) 스쿠터에 올라 설산 라이딩을 즐긴다. 중간 역인 보르트(Bort)에 내리면 아이들이 구르고 뛰며 즐겁게 노는 알프스 운동장이 펼쳐진다. 그 어떤 것을 즐겨도 실패가 없지만, 피르스트에서 1시간이면 도착하는 바흐알프 하이킹을 놓쳐서는 안 된다. 더욱이 스위스의 변화 무쌍한 날씨를 만난다면 해발 2000m 이상의 고지대로 달아나는 지혜가 필요하고 말이다. 발아 래 구름이 빠르게 미끄러지는 풍경은 영화 <클 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에 그림 같이 등장한 ‘말로야 스네이크’를 떠올리게 한다. 산골짜기를 지나는 구름은 오직 고지대 알프스에서만 목격하는 경이로운 기쁨이다. 바흐알프 호수 트레일은 해발 4000m 이상의 봉우리 일곱 개와 거친 빙하 협곡 아래 초원과 꽃으로 둘러싸인 특별한 길이다. 완만한 산기슭을 홀린 듯 걷다가 동화 같은 바흐알프 호수에 이르면 에델바이스와 바닐라 향이 나는 야생화 사이에 누워보자. 자연과 깊이 교감하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