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실
한정현
소설집 <소녀 연예인 이보나>,
장편소설 <줄리아나 도쿄>
<나를 마릴린 먼로라고 하자>가 있다.
제43회 오늘의작가상,
2021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무이의 가방은 지나치게 컸다. 어디 가는데? 나도 모르게 그 말이 나올 뻔했다. 어디 가냐니, 이제 막 도착한 사람에게 말이다.
“나 여기에 세워둘 거야?”
나는 무이의 말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저어 보였다, 뭔가 들킬 것 같은 느낌일 때 하는 자동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뭐, 물론 때맞춰 끓은 김치찌개가 아니라면 한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그러니까 이 말은 오랜만에 본 무이에게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뜻이다. 이건 낯섦과도 퍽 다른 것이었다. 너무 많아서 먼저 할 말이 잘 떠오르지 않는 그런 기분. 아유, 나 왔다고 김치찌개 끓이는 거야? 김치 맛있게 익은 건가 보네. 그런데 넌 무슨 베트남 사람 한국 온다고 김치찌개를 끓이니. 무이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김치찌개 냄새가 새어 나오는 주방 쪽으로 고개를 빼고 코를 킁킁대는 시늉을 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자 무이 또한 나를 따라 한 번 웃어 보이곤 이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치 물건 통 못 치웠어. 못 치우겠더라.”
나는 무이가 나의 반려견인 이치를 찾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이치는 무이와 내가 따로 살게 될 즈음 유기견 보호소에서 데리고 온 아이였다. 이치는 발견 당시 이미 백내장과 피부염을 가지고 있었다. 유기되고 추운 곳에서 오래 떨어서인지 발작 증세가 포함된 상태였다. 그때 이치는 이미 열 살 노견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치의 주인이 일부러 버렸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은 흔했다, 노견이라 버리는 것. 동물의 귀엽고 화사한 순간만 함께하고자 하는 인간들. 어쨌거나 나는 이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무이가 그래서 어쩌면 이치를 찾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이치는 소견상 언제 죽어도 ‘그래도 오래 버텼구나’ 싶을 정도의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역시 무이는 무이였다. 항상 낡은 게 좋아, 무이가 처음 나를 만난 날 했던 말. 무이는 내 말을 듣더니 가만히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아주었다. 이상하게 무이가 내 어깨를 감싸자 눈물이 흘렀다. 이치의 장례를 치르면서도 얼떨떨함에 흘리지 않던 눈물이었다. 나는 무이, 무이, 무이, 이렇게 중얼거리며 울었다.
“무이.”
무이는 무이. 한 사람의 이름. 그런데 무이를 나는 뭐라고 정의하면 될까. 무이, 무이. 내가 무이에게 무이라고 하면 어른들은 얼른 내 팔목을 잡아끌며 귀에 대고 속삭이곤 했다. 어머니라고 해야지, 무이가 뭐니. 하지만 나는 어머니보다 무이 쪽이 더 좋았다. 왜냐면 내게 무이는 무이 같았지 엄마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엄마 같다는 건… 물론 처음부터 무이가 무이여서 좋은 건 아니었다. 왜냐하면,
무이는 여러 겹의 목도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무이를 만난 건 스무 살 겨울이었다. 무이, 안녕? 어차피 한국말 모를 거야, 조금은 이런 마음을 품고서 던진 첫인사. 종로에 위치한 던킨도넛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의 최초의 만남. 아버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건넨 그 인사는 사실 무이가 한국어를 모를 것 같아서 한 말이 아니었다. 비웃어주려고 던진 첫인사였다. 이유는 명확했는데 무이는 아버지와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났고,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원정 결혼을 한다는 국가 중 하나인 베트남에서 온 사람이었으니까. 무이의 모든 면이 나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나는 어릴 적 엄마와 이혼하고 죽 나를 키워준 아버지의 많은 면이 좋았지만, 무이와 결혼하려는 아버지를 받아들이는 건 너무나 힘들게 느껴졌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그거 참 웃기지, 아버지에 대한 부끄러움이 무이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났으니까.
“윤아, 오늘 날씨가 추워, 목도리 해야 해요.”
가만히 내 첫인사를 듣던 무이는 자신의 목에 둘러져 있던 목도리를 풀어 내 목에 감아주었다. 생각해보면 사계절 기온이 한국보다 높은 베트남에서 온 무이가 더 추웠을 텐데. 목도리를 끝까지 다 감아준 무이는 내 옷자락을 살짝 끌며 도넛 앞으로 이끌었다. 하트 도넛을 고른 나에게 무이가 웃어 보였던 기억이 난다.
“이 사랑은 내가 선택한 거예요.”
내가 무이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자 무이가 손가락으로 자신과 나를 번갈아 가리키며 ‘네가?’ ‘내가?’ 이렇게 분간하려는 듯 중얼거렸다. 아마도 무이가 하려던 말은 이거였을 것이다, 이 하트는 네가 선택한 도넛이에요. 그런 무이를 보며, 근데 그거 정말 선택 맞아요? 내가 이런 말을 삼켰던 것도, 하지만 그것은 조심해서라기보다는 아버지가 도착해서였기 때문이라는 것도 역시 기억이 난다. 잠깐 도넛을 깨물던 무이가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김치찌개가 먹고 싶어요”라고 했던 것도…. 마음이 약간 누그러진 내가 탁자 밑으로 핸드폰을 꺼내 베트남 음식점을 검색하다가 그런 무이를 빤히 봤던 것도.
그날 무이는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 나눠주었다. 베트남에서 한국어를 전공하고 한국에 왔으며 돈은 필요치 않다고 했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까 한국인들이 베트남 여자들을 사고판다는 말 같은 것. 방학 동안 무이는 용돈을 벌기 위해 아버지가 운영하던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고 그렇게 만났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고개만 몇 번 끄덕였다. 김치찌개의 김치가 적당하게 익었고, 나는 아버지가 무이의 밥그릇에 몇 번이나 김치를 건져주는 걸 잠시간 건너보았다. 평온한 식사였다. 그리고 무이와 아버지와 함께 산 세월은 내내 그날의 식사와 같았다.
너무나 평온한 10년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일은 별로 없었다. 생일, 명절, 내가 대학의 장학금을 받았을 때… 여느 집들처럼 이렇게 1년에 몇 번의 회식을 하기도 했고, 계절에 따라 사진을 찍으러 다니기도 했다. 아버지의 오토바이 뒤에서 나를 앞지르며 손을 흔드는 무이를 보기도 했었다. 정작 기억에 남는 하나는 우리 가족이 베트남 음식은 잘 안 사 먹었다는 것 정도였다. 그런데 왜일까,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고와 죽음으로 남겨진 내게 떠오른 건 막상 이런 거였다. 어쩌면 무이와 헤어져야 할지도 몰라. 아버지가 죽고 얼마 뒤 무이는 가방 하나를 두고 갑자기 며칠 동안 자취를 감췄었다. 서른이 넘은 내가 아버지가 죽고 아버지보다 한참 어린 새어머니가 사라졌다고 울기엔 참 애매하다 했는데, 며칠 후 무이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집으로 돌아왔다.
“가방을 두고 갔더라고.”
그게 다였다. 무이는 가방을 찾으러 왔다면서 홀로 아버지와 함께 운영했던 한식당을 키워나갔다. 그렇게 나의 대학원 학비를 대주었고,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백방으로 돌아다녔다. 3년 전에는 아버지의 고향으로 내려가 식당을 차렸다. <6시 내고향> 같은 프로그램에서 무이의 얼굴을 볼 때면 아직 낯설었다. 그래도 무이는 1년에 몇 번 서울로 올라와 나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때마다 가방을 하나씩 놓고 갔는데, 한번은 설에 들어와 길상사라는 절에 같이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무이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올해 소원은 윤아를 제 딸로 입양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그 말을 듣고 이유를 묻는 내게 무이가 말했었다. 저는 김치찌개를, 윤아는 반미를 좋아합니다.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서로를 존중합니다.
그래, 그런 일도 있었고 지금도 있지.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찌개와 같이 먹을 김을 잘랐을 때였다. 무이는 이치의 사진을 앞에서 두 손을 모아 베트남 식 절을 하고 있었다. 무이가 가져온 커다란 가방이 이치처럼 무이 곁에 있었다. 나는 무이의 가방 안에 뭐가 들었을까, 이번엔 오래 머물다 갈 수 있는 걸까 궁금했다. 하지만 묻지는 않았다.
무이, 무이도 내가 무이를 따라가지 않겠다고 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어? 이치가 떠나고 나는 항상 이치를 생각해. 함께 있지 않아도 늘 있는 것처럼.
다음 날 무이의 가방이 여전히 거실 한구석에 있었다. 항상 무언가를 흘리고 가는 무이, 막상 열어본 무이의 가방 안에는 강아지 사료와 간식, 말린 과일 등이 종류별로 들어 있을 뿐이었다.
“윤아, 이치는 좋은 곳으로 갔을 거야. 내 가방 또 찾으러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