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 황인찬

 

“우리는 사랑할 때에만 살아 있다고, 그리고 사랑이란 결국 그 살아 있음, 존재함 자체라고요. 이 논리를 거꾸로 활용하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살아 있는 우리, 존재하는 우리, 현물인 우리는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는 존재라고요.”(<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 중) 황인찬 시인이 등단 12년 만에 첫 산문집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을 출간했다. 시의 세계 안에서 정교하고 정확하게 단어와 운율을 구축해오던 시인이 시 밖으로 나와 다른 이의 작품을 세심히 고르고, 마음을 다해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적었다. 동료 시인과 시를 향한 존경과 동경, 애정과 부러움을 빼곡히 담아.

 

두 번째 시집 <희지의 세계> 출간 당시에 만났었죠? 7년 만이에요. 맞아요. 그때 찍은 사진이 지금도 기억나요. 책상에서 이렇게.(웃음)

김수영문학상 최연소 수상자이자, 이례적인 판매 부수를 기록한 신예로 주목받으며 소란할 때였어요. ‘문단의 아이돌’로 불리던.(웃음) 이제 그만 아이돌에서 은퇴시켜줬으면 좋겠어요. 너무 놀리기 좋잖아요. 지금도 검색하면 걸리는 수식이라 반복되고 복제되면서 놀림받고 있어요.

오늘 인터뷰하러 오는 길에 황인찬 작가가 당시의 화려한 수식, 세간의 기대에서 조금 자유로워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어떤가요? 첫 시집 이후 두 번째 시집부터는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글을 쓰지는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계속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건 ‘내가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느냐’거든요. 이게 더 어렵더라고요.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지를 계속 질문하고 돌아봐야 하는데 훨씬 어려운 일 같아요.

2020년 10월부터 1년간 진행한 네이버 오디오 클립 <황인찬의 읽고 쓰는 삶> 원고를 다듬어 엮은 책이에요. 황인찬 시인이 이렇게 다정하고 친절한 사람이구나 싶을 정도로 책 전체에 온기가 흘러요. 다정함과 친절을 최대치로 끌어다 쓴 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웃음) 일상생활에서 세심하게 뭘 챙기거나 다정한 편은 아니에요. 냉소적이고 차갑게 굴 때도 있고요. 시인으로서도 그렇게까지 친절하진 않죠. ‘오려면 오세요, 읽으려면 읽으세요’ 하는 태도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편이에요. 하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만큼은 그러면 안 되겠더라고요. 내가 시인의 이름을 걸고 다른 시인의 시를 경유해 말할 때는 나의 얄팍하고 치기 어린 자의식을 내세우면 안 되죠. 시 속으로 깊이 들어가 읽는 일 자체가 작가와 깊게 소통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깊숙이 들어가놓고 냉소하는 척하는 건 시에게 미안한 일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더 적극적으로, 시인으로서의 저보다 훨씬 다정하게 말을 걸고, 깊이 다가가려 했어요.

<황인찬의 읽고 쓰는 삶>이라는 직관적인 이름이 책으로 묶이면서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제목으로 바뀌었어요. ‘말하는 사랑’이라는 표현에 방점이 찍히더라고요. 기어코, 애써, 공들여 사랑을 말하는 행위에 대해 생각하게 해요. 시를 쓰는 행위도 시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데 굳이 말을 하는 거잖아요. 결국 모든 예술 양식이나 소통 행위가 다 그렇다고도 할 수 있죠. 그 행위는 사랑의 형상을 띤다고 봐요. 결국 사람들이 굳이 뭔가를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사랑을 애써 말하는 일일 수밖에 없는 거죠.

이 책이야말로 사랑을 애써 말하는 책이죠. 작가 소개에 ‘시를 이용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자주 고민합니다’라는 문장이 있는데요. 이 책이 그 실천 중 하나로 보여요. 그 문장을 책날개에 굳이 쓴 건, 시인들이 기본적으로 ‘시 오타쿠’예요. 시를 대단하고 큰 것으로 마음속에 품고 살죠. 시뿐 아니라 현대 예술 자체가 그렇죠. 예술이 예술 자체를 위한 것으로, 예술이 예술을 위해 예술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행위가 계속되는데, 거기에서 멈추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와 더 가까워지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 되더라고요. 그러니 시를 목표로 삼지 말고 수단으로 삼자, 시는 내 삶의 목표가 아니고, 다른 사람과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라는 생각으로 시를 대하자고 마음을 바꿔갔어요. 이 책처럼 시를 이용해 할 수 있는 일, 또 다른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되고요.

단어 하나, 운율과 호흡 하나에 치열히 골몰하던 삶의 순간도 있었지만 이제는 무언가 더 멀리 보고자 하는 건가요? 근데 정작 그렇게 되니까 시를 잘 못 쓰더라고요. ‘정신 차려라.’ 이 생각을 매일 해요.(웃음) 마음을 바꾸기 시작한 건 첫 시집을 출간하고 깊이 반성한 때부터예요. 시인들이 꿈이 커서 시집 한 번 내고 세상을 구하려고 하거든요. 시뿐 아니라 예술 하는 사람 대부분이 자기 욕망에 휘둘리는 주제에 그걸로 세상을 구하겠다고들 하잖아요. 제가 06학번인데 대학에 다닐 때 세계가 급물살을 타는 느낌이었어요. 대학이 대기업에 넘어가고, 경제 논리가 교육에 노골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때였고, 그 상황을 모두가 환영하는 분위기였어요. 그때 좀 멈추어 가만 두고 보자 하는 마음으로 첫 시집을 완성한 건데, 막상 시집을 내고 돌아보니 나 혼자 깔끔떠는 일이었더라고요. 혼자 깔끔떨어봐야 세상에 보탬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이 그렇게 굴러가도록 내버려두는 일에 가깝다고 느꼈고요. 두 번째 시집부터는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저 혼자 멈춘다면 저 혼자 깔끔떠는 일이 되겠지만, 더 많은 사람이 멈춘다면 의미있는 멈춤이 될 수 있잖아요. 그 멈춤에 대해 탐구하며 시도한 게 그다음 작업들인 거죠.

 

 

읽는 슬픔 말하는 사랑 황인찬

산문집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이전과 다르게 써야 하는 데서 오는 고민은 없었나요? 시는 태생적으로 오해받는 장르지만 산문은 보편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글이길 기대하잖아요. 그래서 ‘나만 그런 건 아닐 거라는’ 의미의 문장을 많이 쓰기도 했는데요. 접촉할 수 있고 공유할 수 있는 삶의 면적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려고 했어요.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내 삶은 이런 식이었는데, 아마 당신의 삶 또한 이러지 않았을까. 그런 우리가 이런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며 계속 말을 걸었어요. 나의 삶과 이 글을 읽는 이의 삶이 맞닿는 부분을 상상하면서요.

이 책에 등장하는, 그리고 최근 작품을 통해서도 종종 거론한 ‘무용한 시의 유용함’이라는 표현이 내내 좋더라고요. ‘이 시가 없어도 된다. 안 읽어도 당신의 삶에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라는 말을 자주 해요. 하지만 음악이나 무용이 줄 수 있는 기쁨이 있고, 드라마나 영화가 줄 수 있는 기쁨이 각각 있겠지만, 시는 그 어떤 예술 양식보다 언어 자체와 지극히 밀접하잖아요. 언어는 인간의 의식과 연결된 중요한 것이기에 시만이 줄 수 있는 놀라움과 경이, 기쁨이 분명히 있어요. 물론 시가 없다고 우리 삶이, 이 세계가 큰 위기에 처하는 건 아니지만 시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알지 못한 기쁨 하나는 아주 분명하게 추가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제가 똠얌꿍을 무척 좋아하는데요. 똠얌꿍을 안 먹어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지만, 똠얌꿍을 알고 난 뒤의 내 삶은 알기 전의 삶보다 훨씬 더 다채롭고, 큰 기쁨이 생긴 거예요. 그걸 놓치고 사는 건 대단히 아쉬운 일이죠.(웃음)

시가 지닌 힘을 체감할 때는 언제인가요? 적어도 저에게 그 어떤 예술 장르나 예술 양식, 예술 작품도 시만큼 놀라게 하거나 떨리게 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제가 사랑하는 어떤 시인의 좋은 시를 처음 접할 때만큼 강렬한 놀라움을 느낀 적이 없고요. 보고 너무 좋아서 어떻게 이럴 수 있지 하고 놀라는 걸 넘어 약간 마비되는 상태인. 이런 강도의 아름다움은 오직 시에서만 느껴본 것 같아요.

최근 목격한 아름다움이 있다면 뭔가요? 주로 시에게서 아름다움을 발견해왔는데요. 최근 식물의 아름다움을 알게 됐어요. 이 점만큼은 팬데믹이 저에게 안겨준 좋은 일 같아요. 화분 스무 개 정도를 돌보느라 거의 노예처럼 살고 있는데요. 무엇보다 생명이라는 사실이 참 좋아요.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살아 있는 것을 통해 오는 안도감이 있잖아요. 필요한 것을 맞춰놓으면 알아서 쑥쑥 자라고요. 스스로 자라고 퍼져나가는 과정을 보며 깜짝 놀랄 때가 많아요. 새순 하나가 돋은 걸 볼 때의 기쁨이 무척 커서 요즘 그것만 들여다보고 있거든요. 식물 자체가 주는 생명이라는 인식, 인간도 생명체지만 입은 옷, 직업 등 수많은 기호에 뒤덮여 있어서 생물이라는 생각이 잘 안 들잖아요. 식물은 그와 별개로 그 자체로 끊임없이 성장하는 생명체라는 사실이 반갑고, 그 때문에 마음이 놓이는 부분이 있어요.

지금처럼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오래 쓰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무엇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오래 쓰기 위해 자유로워져야 하는 것… 마음 한편에 늘 자리 잡고 있는 고민인데요. 문학을 하며 세계를 구하겠다는 생각, 대단한 일을 성취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자유로워져야 할 것 같아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쓰는 일이,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일만큼이나 세상에 영향을 주는 일이라는 생각도 당연히 해야 하고요. 그 마음가짐이 시인으로서 최대한 미끄러지지 않게 하는 힘일 것 같아요. 이 모순되는 두 가지 생각을 끌어안은 채로 계속 가는 것이 결국 오래 쓸 수 있게 하는 동력이 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