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권위의 미술행사 ‘카셀 도큐멘타’
독일 중부 헤센주에 속한 인구 20만 명의 소도시 ‘카셀(Kassel)’. 세계 2차 대전 당시 무기 공장이 있었던 공업 도시임에도 푸른 녹지를 쉽게 마주할 수 있는 곳입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헤라클레스 산상 공원, 라이트 그림형제의 박물관 등 친환경적인 면면과 다양한 볼거리를 갖추고 있죠.
5년마다 개최되는 세계 최고 권위의 미술 행사 ‘카셀 도큐멘타(Kassel Documenta)’는 평화로운 카셀을 축제의 분위기로 만들어주는 이 도시의 대표적인 행사입니다. 베니스 비엔날레, 상파울루 비엔날레와 함께 세계 3대 현대미술 전람회로 꼽히는 만큼, 전시 시즌마다 세계 각지의 관광객들이 카셀을 찾습니다.
도큐멘타는 과거 독일 나치 정권의 반인륜적 행위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습니다. 히틀러에 의해 퇴폐의 소산으로 여겨졌던 모던아트(modern art)를 재조명하고 문화국가로서의 이미지를 선전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죠. 회화, 사진, 조각, 퍼포먼스, 설치, 필름 등 장르의 경계를 넘어 개념미술과 미니멀리즘을 중심으로 현대 미술의 미래상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권위 있는 미술 행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955년부터 시작해 올해 15번째 개최를 맞이한 카셀 도큐멘타는 주요 미술관인 프리데리치아눔(Fridericianum)부터 도큐멘타 홀, 박물관, 공원 등 카셀 내 32곳에서 100일간의 여정을 이어갑니다.
카셀 도큐멘타 최초의 아시안 큐레이터, 루앙루파(ruangrupa)
카셀 도큐멘타 15의 큐레이터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출신의 예술, 창작 집단인 ‘루앙루파’로 선정되었습니다. 루앙루파는 2000년 설립된 비영리 예술 공동체로 전시, 축제, 출판, 라디오 등 다양한 형식으로 창작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팀입니다.
이들은 도큐멘타 최초의 아시안 큐레이터로 주목받았습니다. 2002년 나이지리아 출신 기획자 오쿠이 엔위저(Okwui Enwezor)를 제외하곤 주로 백인 남성이 지배적이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전통과도 같은 기존의 틀을 깼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습니다. 어느 때보다 여성 및 아시아 작가의 활약을 기대해 볼 수 있게 된 것이죠.
이들은 도큐멘타15의 출발점으로 룸붕(lumbung)을 제시합니다. ‘룸붕’은 인도네시아어로 ‘공동의 쌀 헛간’을 의미하는 단어로, 잉여 자원의 집합체이자 작물 저장소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루앙루파는 이를 공동체의 합작 생산과 균등한 분배, 공존을 위한 논의의 장소로 확장시켰죠.
룸붕의 정신은 루앙루파가 감독하는 도큐멘타 15의 전시 방법에도 녹아있습니다.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모두 수평적 관계를 기반으로 하며, 토론과 워크숍을 통해 서로 다른 관점을 나누고 교감합니다.
카셀 도큐멘타 15에서 만난 아티스트
스케이트보드장 위를 질주하거나 자유로이 낙서하거나. 카셀 도큐멘타를 찾은 관람객들에게 모든 예술 작품은 단순한 감상 대상을 넘어 아티스트와 활발히 소통할 수 있는 매개로 기능합니다. 정적이고 무거운 분위기 대신 적극적인 자세로 작품의 면면을 경험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스타 작가나 기념비적인 작업물을 내세우는 대신 집단 창작에 초점을 맞춘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작가들이 협업하는 태도 자체가 하나의 작품처럼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이끼바위쿠르르
(ikkibawikrrr)
고결, 김중원, 조지은 작가로 구성된 ‘이끼바위쿠르르’는 한국 작가로선 유일하게 카셀 도큐멘타 15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설치미술, 행위예술, 작곡 등 다양한 창작 활동을 통해 역사의식을 일깨우고 환경 보전의 메시지를 전하는 팀입니다.
이들은 박물관이자 환경 보존을 위한 토론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오토네움(Ottoneum) 자연사박물관을 전시 장소로 택했습니다. 한국전쟁 및 태평양 전쟁과 관련된 미역의 역사를 소개한 ‘미역 이야기(Seaweed Story)’와 미크로네시아 섬에 남아있는 태평양 전쟁과 식민주의 잔재를 탐구한 ‘열대 이야기(Tropics Story)’를 주제로 한 비디오 네러티브 작품을 선보였죠.
미역 이야기를 통해 사라져가는 20여명의 제주 해녀들이 합창한 제주 아리랑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열대 이야기에는 태평양 전쟁 당시 점령 장소인 활주로와 버려진 동굴 요새, 묘지 등 전쟁의 흔적들이 녹아 있습니다.
네스트 콜렉티브
(Nest Collective)
‘콜렉티브(Collective)’는 하나의 목표와 운영 아래 모인 자발적 예술단체를 의미합니다. 케냐 출신의 ‘네스트’ 콜렉티브는 소비 사회의 어두운 면을 비추는 리사이클 프로젝트 <Return to Sender>를 선보였습니다. 압착된 헌 옷을 활용한 설치 작업물로, 쓰레기와 전자 폐기물로 인한 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알리고자 제작되었습니다.
리처드 벨
(Richard Bell)
호주의 원주민 운동가 ‘리처드 벨’은 카셀의 프리데리치아눔 미술관에서 백인들의 탄압을 적나라하게 비판하는 성향의 작품을 전시했습니다. 정치색을 숨기지 않는 카셀 도큐멘타의 특징과도 통하는 작품입니다.
와주쿠 아트 프로젝트
(Wajukuu Art Project)
아프리카 작가들로 구성된 그룹 ‘와주쿠 아트 프로젝트’. 양철 지붕으로 덮인 독특한 외관의 도큐멘타 홀 입구에 나이로비 빈민가와 마사이 전통 가옥을 참고한 구조물을 설치했습니다.
인스티튜토 데 아르티비스모 한나 아렌트
(Instituto de Artivismo Hannah Arendt)
난민, 자본주의에 대한 관점 등 저항을 뿌리로 성장해온 도큐멘타의 색을 지닌 아티스트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정부 기관의 검열을 비판한 설치작품을 선보인 쿠바의 작가 그룹 ‘인스티튜토 데 아르티비스모 한나 아렌트’처럼 말이죠.
브리토 아츠 트러스트
(Britto Arts Trust)
전시장 밖에서 직접 재배한 농산물로 음식을 만들어 방문객들과 나누어 먹는 ‘브리토 아츠 트러스트’의 행보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방글라데시 작가들로 구성된 이 그룹은 ‘유기농 식품은 거짓말입니다’라고 쓰인 도자기들로 식품 산업을 비판하며 독특한 퍼포먼스를 선보였습니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등 다양한 출신의 작가 1천여 명이 저마다의 목소리를 높이며 카셀 도큐멘타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6월 18일부터 시작된 카셀 도큐멘타 15는 오는 9월 25일까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