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호
NOH SANG HO
노상호는 스스로 설정한 루틴 속에서 오늘도 어김없이 그림을 그린다. 정해둔 분량의 그림을 꼬박꼬박 그리는 와중에 에어브러시 작업도 시작했고, 3D 프린터로 만드는 오브제나 애니메이션 작업도 넌지시 생각해본다. 더 빨리, 보다 많이 그리고 싶다는 목적에 맞닿은 꾸준함은 조만간 그를 한 계단 더 오를 수 있도록 해줄 것 같다.
작업실 안에 작업실 하나가 또 있어요. 이 작업실을 쓴 지 한 10개월 되어가요. 기존에 하던 작업은 집에서 할 수 있어서 한동안 작업실을 안 썼는데 새로 에어브러시 작업을 하게 됐거든요.
에어브러시가 새로운 환경을 만든 셈이네요. 저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감각하는 것들을 그리고 있고, 그 부분을 은유할 만한 재료를 찾고 있던 것 같아요. 에어브러시는 분사를 하지만 캔버스에 밀착되지 않죠. 간접적인 툴이라는 게 흥미롭게 느껴졌고, 제가 그림을 그리는 맥락에서 속도가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다 보니 새롭게 에어브러시를 선택하게 됐어요.
속도에 초점을 맞추면 모든 그림에서 일률적인 퀄리티가 나오기 힘들지 않나요? 저는 퀄리티를 체크하지 않는 편이예요. 정해진 루틴에서 매일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내보내는 그 과정이 중요하기 때문에 퀄리티가 좋든, 좋지 않든 그걸 판단하지 않고 계속 완성하는 거죠. 이미지를 찾거나 볼 때도 그런 부분을 체크하지 않고요.
매일 스스로를 꾸준하게 단련한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회화 이론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학생을 가르칠 때 퀄리티를 체크하는 대신 양을 늘리면 더 빨리 성장한다. 저도 가끔 3~4년에 한 번씩 제 그림 실력이 늘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영어 공부를 예로 들면서 계단식으로 성장한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저도 그런 경험을 아주 가끔 하고 있죠.
이렇게 매일 그림을 그리다 보면 요즘의 나라는 사람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요. 근 1년간 생각한 게 있는데 이제는 외부의 평가가 그다지 궁금하지 않아졌어요. 이 점이야말로 좋은 상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고요. 물론 누군가 제 그림을 평가하는 것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 단지 제가 신경 쓰거나 체크하지 않게 되었다는 거죠.
근래의 루틴 안에는 어떤 형태의 작업이 이어지고 있나요? 예전에는 수채화를 많이 썼는데 좀 더 단단한 형태로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최근엔 유화를 많이 쓰고 있어요. 에어브러시를 자주 사용하게 되었고, 3D 작업도 시작했죠. 유화 작업에 참고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이미지를 수집하는 것처럼 3D 작업을 위해 3D 모델링을 수집하고 있고요. 그 모델링을 3D 세계에서 배치하고 촬영하면서 일종의 밈을 만들어보는 중이에요.
3D 작업을 하면서 수집한 이미지로 또 다른 세계를 확장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럴 때마다 세상의 재미 거리는 느는데 내가 보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패션을 예로 든다면 하이패션에 흥미를 느끼다가 어느 순간 만날 똑같다고 생각해버릴 수 있죠. 그런데 하위 범위에서 생겨나는 재미있는 브랜드를 내가 안 본 것일 수도 있잖아요. 인스타그램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어느 순간이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팔로잉을 늘리지 않아요. 지금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벅찬 거죠.
곧 키아프 서울에 참가하는데 특별히 기대하는 부분이 있을까요? 아트 페어는 전시가 아니다 보니 제가 원하는 컨디션으로 꾸릴 수만은 없어요. 그렇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재미있다고 여겨지는 부분도 있어요. 페어가 꼭 거대한 인스타그램처럼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음악으로 비유하면 정규 앨범이라기보다 싱글 단위앨범처럼 느껴져요. 딱 하나로 응축해서 표현해야 하는 느낌이 들거든요. 아트를 바라보는 부분에서 시대의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 재미있는 지점도 있을 것 같아요.
판매 여부가 영향을 미치기도 할까요? 그렇죠. 다만 작품이 판매되면서부터 든 생각은 있어요. 팔린다는 이유로 무언가를 하는 것도, 안 팔린다고 해서 시도하지 않을 것도 없다는 거예요. 조금 직접적으로 말하면, 예전에 컬렉터가 한 말 중 제 마음에 남는 것들이 있어요. ‘여기 하트가 너무 귀여워’라고 말하는데 그건 실상 저의 작업과 전혀 맥락이 맞지 않는 이야기였거든요. 그런데 귀갓길에 ‘하트를 넣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영향을 받는 게 결과적으로 제게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어떤 말은 지나치려 해도 담기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페어 현장에 자주 들르지는 않아요. 작가는 빨간 딱지가 붙었는지에 따라 이상한 압박감을 느낄 수도 있거든요. 그래도 저는 인스타그램 덕에 호응에 대해 초연해지는 법은 훈련이 되어 있는 것 같아요. 매일 그림을 업로드 하기 때문에 포스팅에 대한 통계를 보게 되거든요. 그래서 사실은 사람들이 어떤 그림을 좋아하는지도 알아요. 단지 아는 것까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걸 놓지는 않는 정도죠.
예전에 한 전시에서 옷걸이에 작품을 걸어두는 방식을 시도한 적이 있죠. 새롭게 시도해보고 싶은 전시는 무엇인가요? 옷걸이에 거는 방식을 좀 더 확장해보고 싶어요. 편집매장처럼 보이는 공간 안에 무수히 많은 에어브러시 회화를 옷처럼 걸어두는 거죠. 큰 회화는 3백~4백 점, 작은 드로잉은 2천 점 정도로요. 전시장이 아닌 숍 형태로 운영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일정 기간이 지나면 끝나는 전시가 아니라 편집 매장처럼 운영하고, 한쪽에 작업실이 있어서 제가 작업을 할 때마다 매번 새로운 그림이 신상처럼 걸리는 거죠.
한 해의 반이 지났습니다. 남은 하반기 계획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작업 이외의 나머지 업무를 줄여야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어요. 그에 맞게 생활이나 소비 패턴도 바꾸려고 해요. 1, 2년 전에는 반대로 행동했어요. ‘그래, 움직이면 얼마나 버는지 해보자’라면서 기회가 오면 몸이 부서져라 일해보고 돈도 써봤는데, 저랑은 맞지 않는 생활이었거든요. 계속 일을 줄이고 작업의 양을 늘리는 것, 루틴을 성실하게 지키고 저녁이 있는 삶을 사는 것이 올해의 계획이에요.
최지원
CHOI JI WON
최지원은 오래된 도자 인형의 얼굴을 그린다. 티 한 점 없이 매끈해서 감정을 헤아릴 수 없는 여인의 얼굴은 반짝이는 겉과 다른 공허한 마음을 떠올리게 한다. 닿지 않아도 감촉이 느껴질 것 같은 그림에서 우리는 동시대의 정서 자체를 보고 느낀다.
작품 속의 도자 인형은 실제 수집품인가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한 호텔에서 우연히 도자기로 만든 장식품을 봤는데 매끈한 표면에 매료됐어요. 제가 도자 인형을 그리기 때문에 실제 수집하는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렇진 않아요. 구글에 ‘Vintage Porcelain Doll’을 검색하면 도자 인형의 이미지가 쭈욱 나와요. 포털 사이트나 빈티지 소품을 판매하는 사이트에서 주로 이미지를 찾고, 화면으로 옮겨두고 있죠.
모아둔 이미지는 어떻게 활용하나요? 어떤 주제로 작업하고 싶다는 것을 정하면 그에 맞게 포토샵으로 각각의 이미지를 오려 붙여서 재조합하고 있어요. 이 세팅 과정이 제게는 드로잉 과정인 셈이에요. 콜라주 작업은 계획적으로 해두는 편이고, 어떤 내용에 대해 표현하는 방식은 좀 더 직관적으로 다가가고 있어요.
도자 인형 중에는 동물도 있고, 남성도 있을 텐데 그림에는 주로 여성이 등장하죠. 남성이나 동물도 있지만 폭이 넓지 않고 주로 여성의 옷을 입은 인형이 많은 편이죠. 그런데 종류가 다양했더라도 저는 여성만 그렸을 것 같아요. 제가 여성이라는 것도 영향을 미쳤고요.
여성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큰 이유로 작용했나요? 그림 속의 도자 인형과 저를 동일시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는 제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작업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투영된 부분도 있긴 해요.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해서 작업을 하게 되니 여성만을 그리는 게 아닐까 싶어요.
정작 인형은 무표정을 짓고 있어요. 표현하고 싶은 것을 은밀하게 감춰두는 걸까요, 상상의 여지를 남겨주는 걸까요. 얼굴을 차갑게 그려내고 있지만 그 부분에서 관객의 입장을 크게 고려하지는 않아요. 생각할 겨를이 없다기보다는 그것이 제가 표현하고 싶은 방향이고요.
보는 사람 입장에서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겠네요. 오히려 다른 반응을 듣는 것이 더 재미있어요. 사실 저는 제 그림이 굉장히 직관적이라는 생각을 하거든요. 보는 분들 입장에서도 제가 의도한 느낌이 거의 전달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내 눈에는 어떻게 보인다는 해석을 들으면 신선하죠.
그 중 인상적인 피드백이 있었나요? 옷에 대해 물어보는 분들이 종종 있어요. 2019년부터 2020년에 걸친 제 초창기 작업에서는 도자 인형이 본래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그렸어요. 반면 지금은 자라나 H&M 같은 스파 브랜드의 옷을 그려요. 시대에 맞게 조형적인 측면을 고려해서 그리는 편이에요.
인형이 무표정한데 피부가 매끈하기 때문에 기괴하다거나 체념한 듯한 느낌도 들어요. 촉각적으로 매끈한 표면은 제 작업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모티프예요. 처음엔 몰랐지만 작업을 하면서 보니 겉은 번지르르한데 내실 없는 대상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질문을 듣고 보니 기괴함이나 체념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하겠네요. 이런 새로운 해석을 듣는 게 재미있어요.
작품을 보고 나니 도자 인형에 대한 또 다른 인상이 생기기도 하네요. 도자기는 굉장히 아름답고 단단해 보이지만 작은 충격에도 쉽게 표면이 깨질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매끄러운 표면에 다양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흥미로워요.
빈티지 도자 인형에 시선이 간 것처럼 미술 역시 과거의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했나요? 현대미술도 좋아하지만 중세시대의 그림이나 플랑드르 미술에서도 영감을 받았어요. 혹은 일본 우키요에 목판화에서 나오는 색감이나 구도를 인상 깊게 보기도 했고요.
그간의 작품 중 유달리 마음에 남는 그림은 무엇인가요? ‘우는 여인’이라는 그림이 있어요. 2019년 말부터 그렸고, 도자 인형에서 눈물 줄기가 나오는 그림이죠. 그리면서 대부분의 과정이 망설임 없이 진행된 데다 당시의 몰입감이 여전히 생각나요. 완성되었을 때의 감정도 여전히 남아 있고요.
‘뾰족한 것들의 방해’나 ‘우는 여인’에는 확실한 장치가 있기 때문에 좀 더 시선이 몰입되는 효과가 있죠. 두 작품은 각각 가시를 배치한다거나 눈물을 억지로 흘리게 만들어 직접적인 감정 전달 효과가 일어나도록 했어요. 혹은 ‘스파크’와 같은 작품에서는 불꽃 같은 매개체를 사용하기도 했고요. 죽어 있는 어떤 대상에 무언가 자극을 주어 감각을 일깨우는 의도였고, 그에 따라 구도나 구성을 좀 더 과감하게 시도했어요.
‘우는 여인’과 다르게 고민을 하게 된다거나 작업을 잠시 멈추게 만든 작품도 있나요? 아무리 포토샵으로 사전 스케치를 세팅해두었다고 해도, 그 작업은 페인팅을 위한 베이스의 역할이거든요. 붓질을 하면서, 색을 더하면서 비로소 발현되었을 때에 나오는 느낌이 있는데, 그 느낌이 의도한 대로 나오지 않을 때 가장 속상해요. 그래서 저는 항상 멀리 떨어져 보는 습관이 있어요. 특히 그림 사이즈가 크면 클수록 작품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관찰하는 시간을 자주 가져요.
한발 물러나 보다 보면 조금은 정리가 쉬워질까요? 작업실에 있을 때는 결점이 많아 보이지만 다른 공간에 놓였을 때는 또 다른 느낌이 될 수 있더라고요. 그래서 머릿속으로나마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는 것 같아요. 어떤 위치에 있을 때 괜찮을지, 그럼 이 작품은 완성인지 아닌지를 꽤나 오래 생각해요.
곧 키아프 플러스 참가를 앞두고 있어요. 어마어마한 미술계의 행사이기 때문에 신나기보다는 걱정되는 부분이 더 커요. 하지만 해외 유수의 갤러리가 다양하게 참여해 제 그림이 새로운 신에 노출될 수 있는 기회인 만큼 긍정적인 반응을 얻길 바라요.
표현하고 그린다는 건 때때로 무겁고 어려운 일이에요. 그럼에도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릴 때부터 화가가 꿈이었어요. 그림 그리는 행위 자체를 너무 좋아했거든요. 지금 이 생활을 유지해나가고 싶은 이유도 마찬가지예요. 그림 그리는 것이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니까요. 제 작업의 주된 동력은 마음이에요. 내가 매료되는 무언가를 발견하면 그림으로 그리고 싶다는 마음이 솟아올라요.
작가로서 어떤 꿈을 꾸고 있나요? 제 꿈은 작가로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기보다 작업 생활을 유지해나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요. 작업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미술계에 진입했고, 하다 보니 좋은 기회가 오고 있지만 아직도 부담되고 어렵다는 생각이 크거든요. 현명하게, 너무 지치지 않는 선에서 해나가야겠다는 것이 제 신조인 것 같아요.
이희준
LEE HEE JOON
이희준은 일상에서 경험하는 공간을 줄곧 사진으로 남겨둔다. 하나둘 쌓인 이미지 중, 그에게 특별한 기억을 안겨준 사진들은 자르고 더하는 콜라주 과정을 거쳐 또 다른 도시의 얼굴이 된다. 그가 만든 도시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는 보는 이의 경험과 상상에 달려 있다.
그림이 갤러리에 전시된 것처럼 걸려 있네요. 완성작인가요? 아직은 아니에요. 그림을 한동안 펼쳐놓고 보면 뭔가 부족하거나 하고 싶은 부분이 보이거든요. 그래서 그림을 바로 전시하기보다는 이렇게 걸어두고 한동안 바라보는 것을 좋아해요. 사실 어떤 조형을 어디에 둘지 결정하는 것이 쉽지 않아요. 작업실에 놓인 작품들도 완성에 가깝지만, 실제로 완성에 이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리거든요. 한 작품을 서너 주째 그리고 있는데 처음에는 우당탕탕하고 그리다가, 끝날 무렵에는 좀 더 신중해지는 것 같아요. 별 게 아닐 수도 있지만 점이나 선의 위치, 작은 터치의 관계에 따라 그림의 완성도가 달라지고 긴장감도 달라져요.
도시의 면면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해 그림으로 담아내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데요. 그리고 싶은 공간과 머물고 싶은 공간은 일치하는 편인가요?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적으로는 과하지 않은 공간을 좋아해요. 모던하면서 심플하고, 정제되어 있는 공간을 선호하는 편이죠. 오브제가 많이 있거나 내용으로 꽉 들어찬 공간이 아니라 수직과 수평의 마감이 잘 정돈되어 있거나 여백이 있으면 한결 편안한 기분이 들어요.
한 인터뷰에서 글래스고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왔을 때, 느껴졌던 서울의 분위기가 매력적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죠. 누군가는 서울이 난개발되었다고 하고, 도시 계획이 제대로 구상되지 못했다고도 하죠. 그런데 들여다보면 서울에는 참 다양한 얼굴이 있어요. 오래된 빨간 벽돌로 쌓아 올린 단독주택이 모여 있는 동네도 있고, 제가 어릴 때 살던 동네처럼 아파트 단지로 둘러쌓인 곳도 있어요. 세련되고 감각적인 숍들이 즐비한 한남동이나 성수동 같은 동네도 있고요. 이런 다양함이 작가로서는 보고 느낄 것이 많아 좋은 것 같아요.
공간에 대한 인상은 어떤 방식으로 기록하나요? 일상에서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공간을 스마트폰 사진으로 찍어둬요. DSLR로 찍는 것보다는 화질과 화소가 확실히 떨어지지만 오히려 어떤 공간에서 경험한 느낌을 바로 담아낼 수 있어서 선호하는 편이에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을 때 기준선이 나오는 것처럼 작품에도 어떤 선이 보여요. 화면을 분할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저는 선도, 면도 화면 위에 구축되었다는 생각을 해요. 기존의 이미지 속에 놓인 환경을 회화로 새롭게 접근하고, 그 공간에 제가 어떻게 반응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죠. 온전히 저의 주관대로 이 공간을 읽어내는 방법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어요.
지난해부터 선보인 ‘image architect’ 시리즈를 보면 선이나 면은 컬러로 표현하되, 구조가 되는 공간은 흑백 이미지로 표현한 지점이 인상 깊었어요. 색이 있는 사진을 쓰면 그 공간을 담아낸 시간이나 온도를 일방적으로 전달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흑백 사진을 사용해서 보는 사람들이 ‘이곳은 어떤 분위기였을까’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하는 거죠. 작은 점이나 네모, 세모 안에 힌트를 담아두면서요.
미술을 시각 언어라 칭할 때가 있죠. 본인 작업을 언어로 표현한다면 어떤 단어가 먼저 떠올라요? 종종 제가 그리는 작품이 썸네일 같다는 생각을 해요. 썸네일은 다른 창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보여지는 이미지잖아요. 그것을 눌러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이 안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도 들어가봐야만 알 수 있죠. 안에서 선이나 면을 해체할 수도 있고, 각자의 이야기를 떼어서 생각할 수도 있을 거고요.
추상 회화를 관람하는 방식은 크게 둘로 나뉩니다.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무수한 질문을 통해 작가의 의중을 알아내고 싶어 하거나. 관람객들로부터 어떤 질문을 많이 받나요? 예상했던 것보다 더 디테일한 질문을 보내더라고요. 이것의 의미는 무엇이고, 저 터치는 의도적으로 사용했는지 하는 것들에 대해서 말이죠. 그런데 사실 회화라는 건 어떤 단어의 정의처럼 ‘사과는 사과다’라고 명확하게 풀이할 수 없잖아요. 그것이 회화의 매력이자 본질이기도 할 테고요. 그래서 저는 가급적이면 완벽한 대답을 하기보다 작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큼의 대답 정도만 전하려 노력해요.
이후의 해석은 각자의 몫인 거겠죠. 사람들이 그림을 통해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그림이라는 매개를 통해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거나 생각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했으면 하고요.
곧 키아프 서울에 참가하게 되는데, 어떤 마음으로 준비 중인가요? 페어라는 장 자체가 판매를 위해 만나는 자리이기 때문에 어떤 작품이 솔드 아웃 되면, 그것만으로도 이슈가 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어떤 흐름이나 경향을 살펴볼 수 있는 자리가 되면 좋겠어요. 가기 어려웠던 해외 갤러리나 평소 못 보던 작가들도 많이 참여하게 될 테니 종합 박람회장처럼 다양한 작가들의 감각과 생각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가 큽니다.
작가로서 어떤 실험들을 시도해나가고 싶은가요? 여전히 해봐야 할 실험이 많기 때문에 보다 다양한 재료를 써보려고 해요. 어느 순간이 되면 제 작품에서 사진이 없어질 수도 있어요. 캔버스가 아니라 예전에 썼던 타일을 배경 삼을 수도 있고 새로운 재료의 사용을 통해 그 재료와 회화가 결합된다거나 설치 방식에 따라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을 거예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본다면 메타버스로 가는 시점에서 작가로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있고요.
작업실 안에는 여전히 빈 캔버스가 많아요. 앞두고 있는 전시가 있다 보니 좀 더 많은 양의 그림을 그리게 될 거예요.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빈 캔버스를 보면 부담과 설렘이 공존했는데 이젠 오히려 빈 캔버스를 보면서 비로소 시작하게 돼요. 저 안에 무얼 담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기 때문에 일부러 캔버스를 더 준비해두고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되는 것 같아요.
채지민
CHAE JI MIN
채지민은 어떤 풍경 속에 제각각의 모호한 관계성을 가진 존재를 심어둔다. 익숙한 듯 생경한 화면 속에 놓인 존재를 하나둘 보고 나면 복합적인 물음표와 느낌표가 떠오른다. 최근 작업의 표본이 될 수 있는 화보 작업을 펼친 그는 아주 새로운 전시를 앞두고 있다.
어색해하면서도 포즈를 잘 취하시네요. 대학교 때 연극 동아리에서 활동했는데, 알게 모르게 조금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서로 다른 장르지만 연극을 한 경험이 지금의 작업에 영향을 미쳤을까요? 저는 자연 풍경을 배경 삼아도 그 안에 구조를 만드는 데, 무의식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나서 보면 제가 설정한 소품이 세트처럼 느껴질 때가 있더라고요. 배경에 어떤 장치를 둘 때도 느낌보다는 계산적으로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무대장치처럼 세트를 만드는 것에서 편안함을 느껴요. 돌아보니 이런 작업 방식이 대학 시절 경험에서 온 영향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계산적이라는 말을 했지만, 스스로를 ‘이상한 그림을 만드는 작가’라는 추상적인 소개를 했어요. 아주 이상하기 위해서 굉장히 열심히 계산해요. 제 그림에는 동물이나 오브제, 인물이 나오는데 저는 그들의 관계성을 희미하게 만드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그 부분이 바로 제 그림을 스스로 재미있어 하는 포인트이기도 하고요. 한 화면에 존재하지만 개채들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읽히지 않는데, 그렇다고 아예 동떨어져 있는 건 아니고 뭔가 관계가 있을 것 같은 거죠.
왜 이상한 것이 좋나요? 어쩌면 ‘이상하다’라는 말은 제가 편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쓴 말일 거예요. 좀 더 파헤치자면 제 그림을 떠올릴 때 생각나는 단어들이 여럿 있어요. ‘낯설다’, ‘애매모호하다’, ‘경계에 놓여 있다’ 같은 거요. 처음 작업을 시작할 때, 오래도록 그림 그리는 건 좋은데 ‘그래서 내가 이것으로 평생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에 대한 결핍이 있었어요. 심지어 작가로 데뷔하고 전시를 하고 있는데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없었죠. 그래서 한국이라는 익숙하고 편한 환경이 아니라 작업에 오롯이 집중하기 위해 유학을 갔어요.
환경을 바꾸고 나서 확신을 얻었나요? 유학을 가고 마음이 편해지다 보니 오히려 ‘내가 왜 감정적이어야 할까, 비판적이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문득 ‘그냥 애매한 게 난데’라는 생각이 든 거죠. 그래서 그냥 좋아하는 것을 편하게 그리기로 했어요. 나의 습성을 드러내는 방식이 모호한 경계에 있다 보니 작업에도 정의할 수 없는 공간을 만들게 된 것 같고요.
작업을 하기 위해 하는 준비 과정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버릇처럼 사진을 많이 찍어요. 어떤 풍경이나, 지나가는 사람, 눈에 띄는 컬러 조합, 계단 구조 등을요. 그러다 구상이 되면 포토샵으로 작업 스케치를 먼저 해둬요. 빈 화면에 구조를 먼저 배치하고, 사이에 인물과 오브제를 배치하는 방식이 일반적인데요. 가끔은 인물을 넣고 인물에게 맞는 구조를 만들 때도 있어요.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것만큼 포토샵 작업에 공을 들이겠네요. 포토샵 스케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캔버스 작업을 끝까지 이어갈 수 없어요.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기보다 이 스케치가 정말 100% 마음에 드는지를 확신하는 데에 최소 한 달 정도를 두고 있어요.
스케치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가장 고민되는 지점은 무엇인가요? 화면을 채우고 비우는 것에 대한 판단이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떨 땐 채우는 방식으로 작업하고 싶고, 또 어떨 땐 좀 시원하게 비우는 방식이 좋아요. 의도한 대로 적절히 정말 채워졌는지, 비워졌는지를 보게 되죠.
대개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어렵다고들 하죠. 작년에 비우는 시도를 많이 했어요. 사실 진작부터 화면을 확 비워버리는 것을 해보고 싶었는데 그간 거대한 신을 담는 작업을 주로 하다 보니 자신이 없었어요. 개인적으로는 굉장한 도전이었는데 하고 나니 만족스러워요. 자기복제를 경계하기 때문에 계속 제 화면이 어떻게 하면 발전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있고, 작업이 파생되어나갈 수 있는 방향에 대해 항상 생각해요.
그림에 등장하는 개체에 대단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왜 동물을 선택한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은 여전히 남는 것 같아요. 한 번은 어떤 분이 제 작품을 보고 ‘사이코패스의 꿈 같다’는 평을 해주시더라고요. 전체적인 그림의 느낌은 친근한데 등장하는 인물의 분위기에서 차갑고 냉소적인 느낌이 든다는 거죠. 아마 제 그림 속 인물이 거의 다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차가움을 중화시키면서 따뜻함을 부여하기 위한 소재로 동물을 쓰게 되었죠.
많은 동물 중 오리나 말 등을 그린 것은 개인의 취향일까요? 사람에게 너무 친숙한 동물은 피하고 싶었어요. 과하게 따뜻하거나 귀여운 느낌을 주고 싶진 않아서 야생의 느낌을 가진 동물을 찾다 보니 사슴이나 오리, 청둥오리를 많이 그리게 된 것 같아요.
작품 안에 들어오는 것은 주로 밝은 컬러네요. 이 질문을 종종 받는데, 이번엔 제가 한 번 묻고 싶어요. 제가 쓰는 컬러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요. 왠지 모르게 이중적인 감성이 느껴져요. 조합된 컬러는 밝은데, 그 안에서 느껴지는 정서는 ‘이 사람의 마음이 마냥 평온한 건 아니겠구나’ 하는…. 말씀하신 표현이 의도한 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느낌이기는 해요. 마냥 밝거나 마냥 어둡지 않은, 늘 애매한 경계에 있길 바라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저는 형태와 구조에 대한 감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데, 색에 대한 감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평소에 사진으로 남겨둔 소스나 SNS 광고, 브랜드 화보 같은 곳에서 참고하는 경우도 많아요.
곧 키아프 서울과 키아프 플러스에 참가하게 되죠. 새롭게 보여주고 싶은 작품이 있나요? 아트 페어나 전시를 동등하게 생각하고 있어서 키아프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여져야 한다는 생각은 없어요. 다만 제가 신작에서 조금 독특한 시도를 했기 때문에 그것을 보여준다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있어요. 원래 제 그림 속 등장인물에는 특별한 모델이 없거든요. 그런데 한 10년 전부터 모델을 그림 주인공으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해오던 중에 한 브랜드와 협업 작업을 하게 됐어요.
10년 동안 생각해온 그림이 짜맞춰지는 순간이기도 하네요. 제 친구가 쿠어(COOR)라는 남성복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간의 룩북 감도가 제 취향과 잘 맞아서 친구에게 제안을 했죠. 의류 브랜드와 아티스트가 협업을 하면 보통은 옷을 만들잖아요. 그런데 저는 역으로 ‘쿠어의 옷을 잘 그리고 싶다’라고 했어요.
내 작품에 대해 스스로 느끼는 매력과 관람객이 느끼는 매력의 간극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어요? 서로 느끼는 매력의 초점이 다른 것 같은데, 반드시 일치해야만 기분이 좋은 건 아니에요. 가끔 ‘작가님, 이게 무슨 의미인가요’라고 물으면 ‘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답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무책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제가 의도하지 않은 영역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죠. 저는 이야기를 만들지 않으려 하는데, 관객들은 만들려고 노력하는 갈등이 줄다리기가 되면서 재미가 유발되기도 해요.
작가로서의 취향과 관람객의 호응이 맞물리는 것에 신경 쓰이지는 않나요? 조금 이기적이지만 관객이 좋아하는 작업보다 스스로 즐겁게 그릴 수 있는 작품을 이어나가고 싶어요. 좀 전에 언급한 새로운 시도 역시 컬렉터 입장에서 보면 그리 달갑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구매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그림을 모으면서 이어온 서사가 있으니까요. 제가 보통 1년에 30점 정도를 그리는 데, 수량이 적은 편이라 이 부분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도 고민 중이에요.
작가로서 어떤 꿈을 꾸나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데이비드 호크니예요. 런던에 있을 때, 로열 아카데미에서 호크니의 전시가 있었어요. 당시에도 무려 90세가 넘은 할아버지였는데 회고전이 아니라 완전히 전성기인 거예요. 보통은 연배가 지긋해지면 전성기 때의 작업을 고착화시켜서 완결성을 보여주기 마련인데, 호크니는 또 다른 것을 그려요. 저도 여든, 아흔까지 지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아직 충분히 여유 있네요. 꾸준히 작업하면서 밸런스를 찾아가고 싶어요. 한 40~50년 더 그린다고 생각하면 이제 시작인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