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얼굴이 있다면 어떤 형상일까. 유독 흐리고 추운 얼굴의 낱낱을 세밀히 그려내는 것이 시(詩)가 하는 일이라면, 이 지면에 등장하는 4명의 시인들은 오늘 이 순간 가장 도전적이고 예리한 붓이다. 무의미를 이겨내고, 쓸모의 강압 앞에서 의연히 자기 질문을 짊어지는 이들. 사유하고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네 시인의 첫 시집. 가장 빛나는 초상.
나는 극장에서 사람 구경을 자주 해요
‘개구리극장’ 중에서
사람들이 어둠 뒤에 숨어 울고 웃는 걸
반짝이는 죽음이라고 이름 붙였거든요



스티치 장식 팬츠 Moncler × Palm Angels, 슈즈는 에디터 소장품
<개구리극장>을 읽으면 가벼워졌다. ‘분수 광장의 아이들’, ‘충주’와 ‘포천’, ‘버스의 투명한 차창’, ‘방울토마토와 흑토마토’…. 마윤지의 시 안을 거닐다 보면 일상의 언어를, 감정을 거두고 판단을 유보하는 태도를, 익숙하지만 그 자체로 신비로운 삶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맑고 투명한 시어 너머에는 종종 어린아이의 섬찟함이 드리웠고, 주변에 흩어져 있던 죽음들이 고개를 들었다.
촬영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마윤지 시인과 택시에 올랐다. 뒷좌석에서 그와 나란히, 그리 고 비스듬히 마주 앉았다. 차창 밖의 낯익은 서울을 각자의 배경으로 한 채 대화가 이어졌다. 다정하고 무해한 말씨로 단어를 하나하나 고르며 분명히 말하는 그를 보며 시가 시 인과 퍽 닮아 있다고 느꼈다. <개구리극장>이 세상에 나온 뒤 열 달 가까이 지난 지금, 첫 시집은 그에게 전 애인 같은 존재다. “제가 쓴 시를 잘 못 보겠어요. 최선을 다해 사랑한 뒤 이별한 느낌이거든요. 그 시간을 돌아보는 게 고통스러울 수 있잖아요. 새벽에 전 애인에게 ‘자니?’ 하고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 같아서… 민망해요.”(웃음)
중학생 때 그는 도서관에서 시집 한 권을 발견했다. “오늘 꼭 읽고 싶은데, 이미 책을 많이 빌려서 대출이 안 됐어요. 그래서 교복 재킷에 숨겨서…(웃음) 집으로 돌아와 열심히 읽고 난 뒤 다시 서가에 꽂아뒀죠.” 그것이 마윤지 시인이 기억하는 시와 처음 마주한 순간이다. “이걸 만남이라 생각하면, 떨리지만 태연한 척하려 했던 감정만이 남아 있는 것 같아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계속 기다려왔는데, 결국 무엇인지 몰라서 놓쳤던 그 감각이 오래 남았어요.”
그때는 몰랐기에 놓칠 수밖에 없었던, 시와 함께 오래도록 살아가리라고 느낀 순간도 있다. “등단하기 2년 전에 한 뉴스를 봤어요.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연천군에서 돼지들이 집단 생매장되었다는 내용이 TV에 흘러 나오고 있었어요. 새빨간 물감을 풀어둔 것처럼 핏물이 흐르는 내천의 모습이 화면에 나왔는데, 제가 고등학생 때 가본 적 있던 곳이더라고요. 그땐 이렇게 맑은 냇가를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깨끗했거든요. 그 뉴스를 본 뒤 이걸 기록해야 한다는 강한 느낌을 받았어요.” 이후 시인은 ‘연천’이라는 시를 썼다. “작년 동해에서 가져온 돌을 아이들에게 보여 주었다 / 아이들이 비린내 나는 강가에서 돌을 주워 왔다 / 사람들이 며칠씩 고기를 못 먹었다”(‘연천’). <개구리극장>에는 이러한 죽음의 감각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
“늘 이면을 보고 싶고 또 쓰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실 이면이라는 건 없음을, 세계는 언제나 한 면에 펼쳐져 있음을 깨달았어요. 보고 싶지 않다고 등을 돌릴 때 비로소 이면과 같은 그늘진 부분이 생긴다는 것을요.” 그래서 시인에게는 비치지 않는 부분을 응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치지 않으니 고요하다고 느껴지잖아요. 하지만 그 안에는 아름다움도 잔인함도 있어요.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빈 공간 같은 사람들, 조명되지 않은 죽음도 있고요.”
마윤지의 시는 ‘나’와 ‘당신’의 경계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한다. “나를 뒤집어 쏟아 내도 / 이미 당신은 내 몸에 갇혀 죽었나 봐”(‘풍경’), “오래오래 누군가를 생각하기 때문에 / 이따금 그 사람이 되고 / 여러 사람으로 늙게 된다는 점괘를 뽑은 적이 있다”(‘새해’). 그는 서로 다른 것의 ‘사이’에 대해 골몰하며 시를 쓴다. “몸이 다르기에 이해할 수 있고, 또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나라서 나를 받아들일 수 없을 때가 많잖아요. 타인이 건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되레 무언가를 발견할 때도 있고요. 이건 몸이 가진 불가능성이자 가능성 같아요.”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시를 쓰며 믿는 것이 있어요. 우리가 살면서 많은 순간 타인으로 살게 되고, 그리고 타인이 나로 살 것임을 믿어요.”
그렇게 시인에게 시 쓰기란 나와 타자, 자연물, 사물의 경계를 오가며 탐색을 반복하는 일종의 놀이가 된다. “다들 스스로를 알고 또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잖아요. 반대로 제게는 ‘나’를 알기 위해 ‘내가 아닌’ 것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필요해요. 스스로에게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만 남기고 깎아낼 수 있을 때 오히려 나를 알게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내가 아닌 무언가를 바라볼 때, 그것이 나와 어떻게 만나는지 응시할 때, 시인은 그때 비로소 자신을 찾는다고 느낀다.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 누구나가 되어서 거리를 떠돌래”(‘불가능 도시’)라는 구절이 떠올랐다.
나 아닌 것을 떠돌며 쓰기를 반복하는 그의 시 안에는 일상적 시어와 풍경이 가득하다. 그는 “누군가의 마음을 / 고압 전선을 통해 보내 주고 싶”(‘불가능 도시’)다고, “네가 걱정하는 사람의 선풍기 바람이 되어 주”(‘불가능 도시’)고 싶다고 말한다. 시인에게 시 같다고 느껴지는 것은 삶 속에 존재하는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다. “저는 하루하루가 아주 신비롭고, 그 자체로 시 같다고 느껴요.” 그러고 나선 분명한 어조로 덧붙였다. “시를 쓸수록 시가 결코 삶보다 거대하지 않음을 배우기도 해요.”라고.
그는 삶의 과정에 중심을 쏟아붓는 작업을 하나하나 해나가면 자연스레 시가 뒤따라옴을 느끼기도 한다. “방 안에 핀 곰팡이를 어떻게 없애야 할까. 이게 요즘 제 화두예요.(웃음) 누구도 저 대신 곰팡이를 없애주지 않잖아요. 생활하다 보면 스스로 답하고 실행해야만 다음으로 넘어가는 질문이 있더라고요. 그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껴져도 물음 하나하나에 성실하고 창의적으로 답해보려 노력해요. 곰팡이를 지운 뒤 페인트를 바를지, 내가 좋아하는 벽지를 붙일지요. 그러면 싫어하는 마음이 조금씩 옅어지기도 해요. 무언가를 싫어하다 보면 그건 구속이 되더라고요. 세탁한 뒤 빨래를 널고, 시장에 가서 가격의 변동을 느끼고, 요리를 해서 끼니를 챙기는 것. 이런 모든 생활의 행위 자체에 집중하려고 해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삶, 생활, 일상과 같은 단어를 입안에 굴려보았다. 시를 쓴다는 것은 결국 살아내는 것과 다름없겠죠, 질문하자 그는 답했다. “제겐 그래요. 시가 발생하기 위해선 하루하루를 잘 느끼고, 그것이 내 안에 잘 차오르게 해야 하더라고요. 시를 쓴다는 건 그저 계속 뒤척이면서 나아가는 상태 같아요. 시인이 제 직업이고, 시가 커리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그저 시와 함께 계속 흐르고 있다고 느껴요.”
마윤지 시인과 시간을 보낼수록 그의 다음이 궁금해졌다. “시에 방향이 있다면 그것은 매일의 생활이 알려줄 것 같아요. 어떤 시를 쓰겠다고 다짐하는 건 제게 불가능한 일이거든요. 시가 제 삶을 그대로 따라가길 바라요. 그 길이 끊이거나 훼손되지 않기 위해 일상을 잘 돌보고 싶어요. 그렇게 시가 앞으로 잘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뿐이에요.”
마윤지의 시를 읽다 보면 걷고 또 걷다가 이내 투명해지는 한 사람이 떠오른다. ‘가파른 언덕 꼭대기’를 오르거나 ‘비 오는 극장’에 가고, ‘빛나는 털을 가진 큰 개’를 바라보는 사람. 마윤지 시인이 앞으로 그려낼 시와 함께 가벼운 걸음으로 나아가고 싶다. “투명 위에 투명을 엎지르는 기쁨”(‘가을 인사’), 한 아름 느끼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