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LENCIAGA

최근 패션계의 시선은 정확히 실용성에 머물러 있다. 나날이 입지를 다지고 있는 스포티즘부터 평범함을 추구하며 큰 파장을 일으킨 놈코어 패션까지, 근래 떠오른 트렌드는 모두 아름다움보다는 실용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수많은 브랜드가 패션 판타지를 자극하기보다 다수가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쪽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는 것. 그리하여 새롭게 떠오른 키워드가 있으니 바로 ‘고프코어(GopeCore)’다. 고프의 뜻에 대해서는 그래놀라(granola), 귀리(oat), 건포도(raisin), 땅콩(peanut)의 줄임말이라거나 굿 올드 레이진 앤 피넛(Good Old Raisins and Peanuts)의 약자라는 설이 있다. 한마디로 하이킹이나 캠핑을 갈 때 챙겨 가는 견과류 믹스를 아웃도어 룩에 빗대어 표현한 것.

고프코어가 이토록 주목받는 데는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린 발렌시아가의 공이 크다. 지난 2017 F/W 발렌시아가 맨즈 컬렉션에 등장한 셔츠와 스웨트셔츠를 겹쳐 입고 후드를 뒤집어쓴 룩은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의 런웨이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캐주얼한 스타일이었다. 심지어 레이어링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고, 럭셔리와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닮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발렌시아가의 라벨을 달았기 때문일까? 품절 대란을 일으키며 전설이 된 투박한 스니커즈 ‘트리플 S’를 신고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어딘지 모르게 촌스러운 듯한 모델들의 모습은 패션에 조금 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따라 하고 싶을 만큼 쿨했다. 그리고 이런 ‘어글리 뷰티’에 빠진 디자이너들이 고프코어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듯한 룩을 앞다투어 쏟아냈다.

런웨이를 수놓은 아웃도어 브랜드의 제품이라 해도 될 법한 아노락 점퍼와 패딩 점퍼, 등산화를 닮은 워커와 스니커즈, 새 시즌 잇 아이템으로 떠오른 패니 팩과 버킷 햇이 바로 그 증거다. 2018 S/S 남성 컬렉션에는 수트 위에 나일론 윈드브레이커를 입은, 출근하는 아버지가 떠오르는 스타일이 등장했고(발렌시아가는 대드 코어를 중심으로 한 컬렉션을 선보였다), 여성 컬렉션은 아웃도어 룩을 극도로 페미닌한 스타일로 변주하는 등 디자이너들이 고프코어라는 새로운 흐름에 편승하고자 고심한 흔적이 역력했다. 마리 카트란주와 캘빈 클라인은 지퍼와 스트링으로 장식한 비비드한 컬러의 나일론 드레스를, 보테가 베네타와 넘버21은 이브닝 웨어로도 손색없는 차분한 어스 컬러의 점퍼를 선보였고, 구찌는 MLB와 협업한 베이스볼 캡과 트레킹화를 키 아이템으로 삼아 2018 프리폴 컬렉션을 구성했으니 말이다.

솔직히 말해 앞서 언급한 룩은 고프코어에서 영감을 얻었을 뿐이다. 당장 캠핑을 떠난다 해도 상관없을 만큼 캐주얼한 아웃도어 룩이야말로 진정한 고프코어다. 그러니 런웨이에 오른 값비싼 옷이 아닌 파타고니아의 레트로 X 재킷이나 노스페이스 점퍼, 테바 샌들로도 얼마든지 새 시즌 트렌드를 즐길 수 있다. 얼마 전 옆자리에 앉은 에디터가 갖고 싶어 하던 하이엔드 브랜드의 슈즈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비싼 힐을 사면 뭐해요? 맨날 입고 신는 건 후드 티셔츠에 스니커즈인데.” 맞는 말이다. 이렇듯 트렌드나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매일 편하게 입고 신는 것들이 패션계를 호령하는 시대가 도래했으니! 바로 마성의 고프코어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