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월드에서 마치 공식처럼 굳어진 어떤 법칙들은 종종 사고의 확장을 가로막는다. 강한 색에는 부드러운 색을 매치해야 한다든가, 백팩은 세련될 수 없다는 식의 고리타분한 생각들 말이다. 그러나 저 먼 유럽 어딘가에서 미신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이런 룰은 우습게도 하나의 룩, 하나의 쇼, 하나의 트렌드 때문에 언제 그랬느냐는 듯 잊히고 만다. 레드와 핑크의 강렬한 조합으로 배색의 원칙을 뒤흔들어놓은 지난 시즌의 이자벨 마랑이나 커다란 백팩을 순식간에 수많은 패션 피플의 위시 리스트에 올려놓은 새 시즌의 로에베처럼!

 

이번 시즌 트렌드의 꼭대기에 앉아 패션계의 흐름을 호령 중인 네온 컬러 역시 마찬가지다. 네온 컬러에 대한 선입견은 사실 고정관념을 넘어 불명예스러운 누명에 가까웠다. 여름에만 어울리는 색, 고급스럽지 않은 색, 스키복이나 수영복이 떠오르는 색, 동양인에겐 절대 어울리지 않는 색. 자주 입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큰 결심 끝에 산 네온 핑크 컬러의 재킷이 놀림 끝에 옷장에 묻히는 일 역시 다반사였으니, 이쯤 되면 네온 컬러는 길고 긴 수난 시대를 겪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시즌은 기록할 만한 시점이다. 네온 컬러가 파리, 밀라노, 런던, 뉴욕 할 것 없이 전 세계 패션위크의 런웨이를 물들였을뿐더러 지금까지와 상반되는 클래식한 이미지 역시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기 때문. 네온 블루 컬러와 시스루 소재를 조합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강조한 질샌더, 네온 블루 컬러 아워글라스 라인 재킷을 선보인 발렌시아가, 고전적인 코트에 은근한 네온 컬러를 입힌 에르메스, 네온 오렌지 컬러의 프린지 드레스를 선보인 알렉산더 맥퀸이 대표적인 예다. 어디 그뿐인가. 네온 컬러는 힙합퍼를 연상시키는 마르니의 오버사이즈 룩으로도, 미래적인 무드를 표현한 메종 마르지엘라의 후드 톱으로도 완벽하게 변신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증명하기도 했다.

 

또 한가지 주목할 부분은 겐조와 마르지엘라 등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브랜드가 눈부신 형광색보다는 원색에 가까운 색을 추구해 리얼 웨이에서 진입 장벽을 낮췄다는 점이다. 특히 유돈 초이, 포츠 1961의 컬렉션 피스에 쓰인 네온 오렌지는 유심히 보지 않으면 평범한 다홍빛으로 착각할 만큼 광도가 낮다. 발렌시아가와 토가의 블루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 때문에 다른 색처럼 편하고 쉽게 매치할 수 있을 거라는 말씀! 그럼에도 네온 컬러에 대한 두려움이 아직 남아 있다면 샤넬의 머플러 같은 포인트 아이템에 도전해보자. 어떻게 활용하든 네온 컬러가 칙칙했던 당신의 겨울에 전에 없던 산뜻함을 더해줄 거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