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은 봄을 상징한다. 하지만 패션계는 계절의 법칙과 경계를 허문 지 오래다. 런웨이에는 가을과 겨울에도 화려한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난다. 물론 봄의 그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2018 F/W 컬렉션에는 바로크 시대의 네덜란드 미술을 대표하는 바니타스 정물화가 연상되는 ‘다크 플라워’가 수많은 옷을 수놓았으니까! 분명 탐스러운 자태의 화려한 꽃이지만 짙은 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어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기운을 솔솔 풍긴다는 말씀. 먼저 패션계에서 꽃을 좋아하기로 손꼽히는 디자이너들의 컬렉션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에뎀과 지암바티스타 발리 그리고 새로운 플라워 마니아로 부상한 리처드 퀸이 그 주인공. 이 셋은 모두 과거 시대극의 주인공 등을 뮤즈로 런웨이에 세웠는데, 꽃을 중심으로 모던한 아름다움을 더한 드레스를 디자인한 것이 특징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들은 실제로 과거의 유산을 채집해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에뎀은 1930년대에 활약한 미국 무용수 아델 아스테어, 지암바티스타 발리는 1970년대의 히피, 리처드 퀸은 1960년대에 활동한 아티스트 폴 해리스에게서 각각 영감을 얻었다. 이들의 컬렉션을 보면 알 수 있듯 다크 플라워는 고혹적인 무드를 연출하기에 제격이다. 로맨틱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고, 흔한 모티프지만 무엇보다 예술적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이런 마력에 홀려 다크 플라워 패턴에 마음을 준 디자이너는 상상 이상으로 많다. 구찌, 샤넬, 발렌시아가, 생 로랑,발렌티노 등 거대 하우스 브랜드는 물론이고 스텔라 매카트니, 시몬 로샤, 아쉬시 등 디자이너 브랜드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컬렉션에서 다크 플라워를 목격할 수 있다. 이 꽃무늬가 매력적인 건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덮어도 현란해 보이지 않고, 짙은 색감 덕분에 되레 차분해 보인다. 패턴이 빼곡한 옷을 선택할 때는 솔리드 컬러의 옷으로 룩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패션의 정석이라지만,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다. 심지어 지암바티스타 발리나 로샤스는 파이톤 가죽 패턴의 아우터와 부츠로 강렬함을 배가했으니! 네덜란드 바니타스 정물화 속 꽃은 인생무상을 상징한다. 부와 권력, 쾌락의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는 모티프를 통해 역설적으로 삶의 덧없음을 이야기하는 것. 패션계의 다크 플라워도 어쩌면 이런 미술 사조와 맞닿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뭐 어떤가? 이토록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꽃을 추운 날에도 마음껏 즐길 수 있으니 얼마나 매력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