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VENCHY

지방시의 쇼에는 쿠튀르적 웅장함과 간결함, 동시대적 미감과 고전의 미학이 공존했다. 풍성한 드레스부터 직선적인 수트, 최소한의 장식만을 더한 드레스에 이르기까지 ‘상류 문화와 미래적 감성의 조우’라는 주제 아래 다양한 룩이 등장했기 때문. 그러나 클레어 웨이트 켈러는 깃털이라는 하나의 요소로 룩 전체에 통일감을 부여하고, 패턴 대신 소재와 질감, 최소한의 색채만으로 관객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특히 애시드 핑크와 블랙이 조화를 이룬 드레스와 머메이드 실루엣의 드레스는 오트 쿠튀르와 레디투웨어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오트 쿠튀르의 가장 현대적인 해석이라는 평을 이끌어냈을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이번 쇼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 클레어 웨이트 켈러의 존재감을 다시금 증명하는 자리가 됐다.

VALENTINO

흐름이 빠른 패션계에서는 주목해야 할 브랜드 순위 역시 숨 가쁘게 바뀐다. 그러나 오트 쿠튀르 컬렉션에서 발렌티노가 가지는 의미는 불가침의 영역이다. 이번 시즌 역시 발렌티노는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피에르 파올로 피치올리는 쿠튀르라는 예술을 통해 개개인의 다름을 표현하고자 했는데, 이러한 의도는 눈에 띄는 색감을 사용하고 다양한 인종의 모델을 기용하며 여러 문화권의 전통을 반영함으로써 도드라졌다. 형형색색의 아플리케와 섬세한 기법의 조화로 완성된 드레스들, 잠시 넘어졌지만 꿋꿋하게 워킹을 끝마친 75세의 원로 모델 로렌 허튼의 가슴 찡한 에피소드, 디자이너와 쿠튀리에들이 함께한 감동적인 피날레는 이번 시즌 오트 쿠튀르 컬렉션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기억할 만했다.

ARMANI PRIVÉ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아르마니의 아카이브에서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의 실루엣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튈, 오간자, 실크처럼 해수면을 닮은 브랜드 고유의 소재는 그대로 사용하되 스타일링에 현대적 감각을 더했다. 맥시 드레스에는 심플한 재킷과 플랫 슈즈를 매치하고, 포멀한 수트에는 오버사이즈 이어링과 옥스퍼드 슈즈를 더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쇼를 앞두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단어의 의미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지만 미적, 문화적 참고물은 시대에 따른 삶의 방식을 반영하며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의 말처럼, 아르마니는 자신의 과거 작품을 재해석하고 동시대적 요소를 반영해 ‘아르마니 코드’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젊은 디자이너들이 선보인 쇼피스처럼 감각적이지는 않지만,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거장의 시도가 돋보이는 쇼였다.

MAISON MARGIELA

‘사회구조의 폐단과 붕괴’라는 무거운 주제는 마르지엘라 식 해체 주의에 철학적 명분을 더했다. 형태나 색감은 최근 몇 시즌 내내 접한 마르지엘라 컬렉션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한결같이 뛰어난 완성도와 우아한 옷 일색인 쿠튀르 컬렉션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그 로테스크한 분위기는 언제 보아도 지루하지 않았다. 특히 눈에 띈 부분은 존 갈리아노가 지난 시즌부터 강조한 젠더리스 디자인을 남성복에도 적용한 점이다(아쉽게도여성 모델은 대부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남성 모델들은 마이크로 미니 사이즈의 팬츠나 가터벨트, 시스루 팬츠를 입고 등장했고, 상류층의 전유물로 여겨지며 우아함을 수호하는 쿠튀르의 세계에 파격적인 이야깃거리를 던지고 홀연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