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서 반갑다. 지난 3월 파리 패션위크 기간에 묵은 숙소에서 우연히 당신의 어머니를 만났다. 그 순간 당신과도 언젠가 만나게 될 것이라고 직감적으로 느꼈다.(웃음) <마리끌레르> 코리아 독자에게 당신을 소개해주기 바란다. 나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인 어머니를 만났다니 반가운 소식이다! 니나 리치와 내 이름을 딴 브랜드 해리스 리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는 해리스 리드다. <마리끌레르> 코리아와 인터뷰하게 되어 무척 기쁘다.
요즘 당신의 하루 일과가 궁금하다. 매우 유동적이다. 하루는 파리에서 눈을 뜨고, 하루는 런던에서 잠든다. 보통은 오전 8시쯤 런던에서 일어나 잠시 명상을 한 후 최고로 멋있고 재미 있는 옷을 꺼내 입는다. 최근에는 니나 리치 사무실에서 샘플을 자주 훔쳐 입는다.(웃음) 해리스 리드 사무실에 디자인을 체크하러 들렀다가 오후에는 니나 리치 아틀리에에 가기 위해 파리행 기차를 탄다. 컬렉션에 관한 회의를 마치고 파리에서 하룻밤 묵거나 런던으로 돌아온다. 규칙적이지 않은 현재의 일상이 썩 마음에 든다.
“엄마, 나는 언젠가 파리에서 살 거예요. 나를 나대로 느끼고, 자유롭게 해주는 곳에서요. 밤마다 읽는 잡지에 등장하는 하우스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될 거예요.” 니나 리치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후 인스타그램에 올린 아홉 살 해리스의 말이 인상적이다. 꿈을 이룬 소감이 어떤가? 환상적이다. 여전히 종종 볼을 꼬집어볼 만큼 초현실적인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어 가장 좋은 점은 모든 업무가 내가 사랑하는 일의 반복이라는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수없이 많은 아이디어를 내고 디자인 작업을 하는 것은 나에게 큰 기쁨이기에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럭셔리 브랜드 역사상 최연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당신의 2023 F/W 컬렉션은 의심할 여지 없는 ‘핫 데뷔’ 무대였다. 쇼를 준비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2023 F/W 시즌 런웨이의 오프닝을 연 모델 프레셔스 리(Precious Lee)를 만난 순간이다. 피팅을 위해 사무실에 들어선 그는 내가 본 어떤 사람보다 자기애가 넘쳤고, 남다른 에너지로 현장의 모든 사람을 압도했다. 그는 앞으로 니나 리치가 젠더 플루이드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자리 잡을 것과 자신이 브랜드의 다음 챕터를 열 새로운 아이콘이 될 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본인이 런웨이에서 어떤 캐릭터를 구현해야 하는지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 했다. 자신의 역할에 큰 책임감과 사명감을 느끼는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이번 컬렉션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룩을 꼽자면? 지금 떠오르는 것은 코쿤 소매 재킷과 롱 스커트에 모자를 쓴 올 데님 룩과 블랙 앤 화이트 페이크 퍼 코트다. 하지만 매번 바뀐다. 모두 나의 자식 같아 하나를 다른 룩보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죄책감이 든다.(웃음)
개인적으로 아티스트 지닌 브리토(Jeanine Brito)의 초현실적인 새끼 양 그림을 프린트한 원피스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한국 모델 윤보미가 입고 런웨이에 섰다). 그와 어떻게 협업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지닌 브리토는 인스타그램으로 알게 됐다. 그는 니나 리치의 아이코닉한 심벌인 사과에 기초한 아름다운 프린트를 만들어주었다. 하우스의 코드를 능숙히 해석할 줄 아는 아티스트와 작업하는 건 큰 행운이다. 니나 리치는 전부터 화가, 도예가, 비
주얼 아티스트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와 협업해왔다. 그 행보를 이어가 앞으로 가능한 한 많은 아티스트와 작업해보고 싶다.
니나 리치 데뷔 컬렉션을 준비하며 디자인의 영감은 어디서 얻었나? 하우스의 역사에 대한 연구다. 많은 사람이 니나 리치를 향수가 유명한 브랜드로만 기억하고 오랜 기간 심미적인 쿠튀르 컬렉션을 선보인 하우스라는 사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이번 시즌에는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 하우스의 헤리티지를 탐구하면서 디자인을 시작했다.
가장 좋아하는 소재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최근 크레이프 드 신(Crepe de Chine)이라는 소재에 빠져 있다. 크레이프 드 신은 유연하고 독특한 실루엣을 가능케 하는 멋진 소재다. 내가 니나 리치에 와서 사람들에게 가장 보여주고자 한 것이 브랜드 고유의 테일러링 기법이다. 그래서 이번 시즌 거의 모든 수트를 이 원단으로 제작했다. 부디 모두 아름답게 빛나는 니나 리치의 수트를 즐겨보길 바란다.
니나 리치라는 유서 깊은 하우스를 어떤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싶은가? 하우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최종적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니나 리치가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해 모든 인종과 성별, 사이즈를 포괄하는 동시에 여성성을 확장하는, 등대 같은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최종 목표다.
한국 패션계에서도 당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임명 소식이 큰 화제를 모았다. 혹시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거나 방문할 계획이 있나? 만약 앞으로 한국을 방문한다면 <마리끌레르> 코리아에 알려주기 바란다.(웃음) 한국은 가보고 싶은 여행지 중 하나지만 팬데믹으로 인해 갈 수 없었다. 서울에서 우리 컬렉션에 긍정적인 반응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당연히 한국에 가게 되면 <마리끌레르> 코리아에 소식을 전하겠다.(웃음) 내년 초 즈음에는 갈 수 있기를 바란다.
해리 스타일스의 스타일리스트가 인스타그램을 보고 작업을 제안했을 만큼 당신은 SNS 활용에 능통한 사람이다. 해리스 리드에게 SNS란 무엇이며,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가? SNS는 나라는 사람을 투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매개체다. 내가 하고 있는 작업부터 전하려는 메시지까지 전부 보여줄 수 있다. 이로써 우리의 고객과 팬들은 다각도로 브랜드를 경험할 수 있다. 그들과 SNS를 통해 소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내 손가락 끝을 통해 직접 전달하는 정직하고 전략적인 이 소통 방식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패션 이외에 관심이 가는 것이 있나? 혹은 시도하고 싶은 분야가 있는지 궁금하다. 2023년의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모든 분야에 도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영화 <제5원소>의 의상을 디자인 한 장 폴 고티에처럼 영화와 관련한 일을 해보고 싶다. 소피아 코폴라, 전화해주세요.(웃음)
학창 시절 당신의 옷을 판매할 타깃층을 묻는 교수에게 “제 고객은 아직 존재해선 안 돼요” 라고 답했다는 인터뷰를 읽었다. 이제 그 시기가 왔다고 생각하나? 굉장하다. 이 대화를 기억하게 해주다니.(웃음) 그 시절 교수님은 내가 만든 옷을 누가 살지 의문을 가졌다. 지금은 시대가 많이 변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끄는 새로운 니나 리치의 과감하고 독창적인 컬렉션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판매량에서도 압도적이다. 이전과 다른 반응이 아주 신선하고, 창작의 책임을 진 사람으로서 무언가를 느낀다. 이 질문을 해줘서 고맙다. 학창 시절의 중요한 한 순간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당신의 인생을 바꾼 말이나 문장이 있나? “항상 네 직감을 믿으렴. 가끔 남들보다 앞서 나가 비판받을 수도 있지만 언젠가 모두 네가 하고자 하는 바를 받아들일 때가 올 거야.” 부모님이 자주 해주신 말이다. 이 문장을 모든 일에 대입해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옳지는 않겠지만, 항상 맞는 자리에 있는다.
패션계는 여전히 남성복과 여성복 카테고리가 따로 존재하며 성별을 이분법적으로 나눈다. 젠더 플루이드를 대표하는 디자이너로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가 늘 팀원들에게 말하고 팀원들이 나에게 말하듯, 이건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젠더와 인종의 경계를 허무는 데 보탬이 될 수 있다면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해도 분명히 옳은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갈 길이 멀지만 다가올 미래에 대해 매우 낙관적이다. <마리끌레르> 코리아,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고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