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빠르게 변할수록 오히려 느린 것들의 가치는 선명해진다. 손으로 완성한 물건의 온기, 시간을 들여 다듬은 디테일, 오래 사용할수록 깊이를 더하는 오브제의 존재감처럼. 에스.티.듀퐁(S.T.Dupont)은 그 시간을 누구보다 오래 지켜온 메종이다. CEO 알랑 크레베(Alain Crevet)는 유행보다 지속성을, 속도보다 완성도를 택하며 한 세기가 넘는 역사 속에서 자신만의 미학을 구축해 왔다.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럭셔리의 의미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오늘 착용한 스웨이드 셋업이 정말 멋지다. 평소에도 완벽한 스타일로 ‘스타일리시한 CEO’라고 불리는데, 알랑 크레베가 정의하는 ‘진정한 럭셔리 스타일’은 무엇인가? 
너무 거창하게 정의하고 싶지는 않다. 누구나 각자의 스타일이 있으니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잘 갖춰 입고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태도다. 여기서 말하는 디테일은 액세서리나 작은 물건일 수도 있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볼 수 있어도 시계를 차고, 멋진 펜 한 자루를 지니는 것. 그런 사소한 요소들이 사람을 더 흥미롭고 특별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패션을 완성하는 요소는 액세서리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의류보다 액세서리가 한 사람의 스타일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표식이라고 생각한다. 재킷은 매일 바꿔 입을 수 있지만, 라이터나 펜 같은 오브제는 늘 지니고 다니며 취향과 안목을 드러낸다. 의류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한다면, 한 세기의 전통과 장인정신이 담긴 오브제는 시간을 초월한 가치를 남긴다.

에스.티.듀퐁의 철학이자 프랑스인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인 ‘삶의 예술(L’art de vivre)’이 우리의 일상을 어떻게 바꿀 것이라고 믿는가? 
인생을 제대로 즐기는 법을 알려줄 거다. ‘삶의 예술’의 본질은 속도를 조금 늦추고, 삶을 누릴 줄 아는 태도에 있다. 쉬는 시간에는 온전히 쉬고, 즐길 시간에는 제대로 즐기는 것. 그런 여유가 오히려 정신을 맑게 만들고, 결과적으로는 일의 효율까지 높여준다. 좋은 물건 역시 마찬가지다. 투자라는 이유로 보관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사용하며 가치를 경험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삶의 감각이며, 삶을 대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에스.티.듀퐁은 세상이 디지털화와 빠른 소비에 열광할 때도, 묵묵히 장인의 손길과 고유의 헤리티지를 지켜왔다. 그리고 이에 보답받듯 아날로그가 주목받는 시대가 다시 왔고. 브랜드가 이런 고유한 특징을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좋은 책을 읽고, 손으로 직접 글을 쓰는 일은 오늘날 더 큰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믿는다. 빠름과 편리함이 당연해진 시대에서 그런 행위들은 우리에게 잠시 멈추는 시간을 주니까. 속도를 늦추고 사고를 정리하며, 무언가를 천천히 쌓아가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이런 트렌드가 다시 돌아올 거라고 예측했는가?
솔직히 말하면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반갑게 느껴진다. 디지털 중심의 시대를 지나며 아날로그적 가치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변화다. 한국의 ‘텍스트 힙’ 트렌드 역시 그 흐름의 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트렌드를 느끼기도 한다. 두바이에서 프랑스식 dictée(받아쓰기) 행사를 진행했는데, 무려 1,500명이 참석해 나를 놀라게 했었다. 상품은 듀퐁 만년필이었는데, 우승한 세 사람은 너무 행복해하며 “손으로 쓰는 걸 좋아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글뿐만 아니라 라이터의 ‘클링’ 소리처럼 듀퐁은 늘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요소를 다뤄왔다고 생각한다. 디지털 시대에도 이런 손에 닿는 요소가 왜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진짜와 가짜가 뒤섞인 디지털 시대 속에서 현실에 닻을 내려주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시대를 초월하는 물건이 갖는 힘도 바로 여기에 있다. 손에 쥐었을 때 무게가 느껴지고, 품질과 촉감이 전해지며, 눈으로 형태와 완성도를 확인할 수 있는 대상들은 화면 속 경험과는 전혀 다른 감각을 준다. 듀퐁의 제품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수작업으로 완성한 래커 마감, 여러 겹의 정교한 래커 층, 그리고 라이터를 열 때 울리는 ‘클링’ 소리까지 시각과 촉각, 청각 모두에 작용한다. 결국 사람들은 이런 감각적 경험을 통해 현실과 연결되고, 오래 지속되는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 확인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DC 코믹스의 조커, 슈퍼맨 컬렉션 등 대중문화나 타 산업과 만날 때 우아함을 잃지 않기 위해 가장 공들이는 포인트가 있다면?
Less is more. 몇 가지 가장 상징적인 요소만 취하고, 캐릭터를 그대로 재현하지는 않는 것이다. 전체를 그대로 옮기려 들면 금세 피상적으로 보이기 쉽다. 절제된 표현 속에서 핵심만 남길 때 우아함이 완성된다. 슈퍼맨 컬렉션 역시 같은 방식으로 접근했다. 캐릭터 전체를 덜어내고, 슈퍼맨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블루 컬러 그라데이션과 S 로고만 남겼다.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오히려 최소한의 요소만 남겼기에 컬렉션 전체가 더욱 강렬하게 기억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미국의 악기 제조사 ‘펜더(Fender)’와의 협업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일본의 킨츠기 기법을 활용해 직접 기타까지 제작한 점도 흥미로웠는데, 이 프로젝트에는 음악에 대한 개인적인 열정 역시 반영된 것인지 궁금하다.
물론. (웃음) 첫 번째 협업은 9년 전 진행됐고, 펜과 라이터에 기타 특유의 선버스트 컬러를 적용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협업에서는 같은 접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일본에서 영감을 찾던 중, 저녁 식사 자리에서 검은 래커 위에 금가루가 더해진 킨츠기 스타일의 사케 컵을 보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었다. 검은 래커와 금빛 선으로 킨츠기의 미감을 담았고, 일본 펜더 커스텀 숍과 함께 한정판 스트라토캐스터까지 제작했다. 자석식 픽 가드를 열면 내부에 듀퐁 라이터가 숨겨진 구조로 완성했다. 출시 행사에서는 일본의 유명 기타리스트인 라르크 앙 시엘(L’Arc en Ciel)의 Ken과 함께 무대에 올라 직접 기타를 연주했고, 기타를 열어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이는 퍼포먼스도 선보였다. 긴 설명이 됐지만, 분명 개인적인 열정이 꽤 반영된 프로젝트였다.

이 에피소드는 예술적인 측면과 비즈니스적인 측면이 어떻게 상호작용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동감한다. 무엇보다 처음으로 듀퐁과 일본 펜더의 장인들이 직접 함께 작업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펜더의 커스텀 기타 메이커 역시 듀퐁 라이터의 애호가였기에 프로젝트에 큰 열정을 보였고. 서로 아이디어를 주고받으며 몇 시간이나 재미있게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다.

CEO로서 보기에, 가장 역동적이고 매력적인 시장은 어디인가?

CEO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가장 역동적이고 매력적인 시장은 한국이라고 생각한다. 이 자리에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한국을 높이 평가해 왔다. 1950~60년대 프랑스가 예술과 엔터테인먼트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나는 그 시절 프랑스의 에너지를 지금의 한국에서 느낀다. K드라마와 K팝은 물론, 패션과 예술 전반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다. 한국은 깊은 역사와 전통을 지니면서도 그것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새로운 감각으로 확장하는 힘이 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사람들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그런 긍정적인 에너지야말로 지금 한국을 가장 매력적인 시장으로 만드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듀퐁 라이터를 선물 받았던 기억이 있다는 이야기를 봤다. 지금 만드는 듀퐁의 제품들도 50년 뒤엔 누군가의 보물이 될 텐데, 미래의 컬렉터들에게 이 시대의 듀퐁이 어떤 가치를 지닌 ‘빈티지’로 남길 바라는가?
어릴 적 아버지에게 선물받은 듀퐁 라이터는 지금도 내 곁에 있다. 아버지가 사용하시던 라이터 역시 간직하고 있다. 한 세대를 넘어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럭셔리의 가치다. 좋은 물건은 단순히 오래 남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아름답고 의미 있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만드는 듀퐁의 제품들도 50년 뒤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길 바란다. 시간이 흘러도 품질과 아름다움이 유지되고, 10년, 20년, 30년이 지나도 여전히 자부심을 주는 물건 말이다. 그리고 다음 세대가 자연스럽게 물려받아 새로운 기억과 이야기를 더할 수 있는 오브제로 남았으면 한다. 빈티지란 단순히 오래된 물건이 아니다. 시간을 견디며 더 깊은 가치를 얻게 된 물건이다. 미래의 컬렉터들에게 지금의 듀퐁 역시 그런 존재로 기억되길 바란다.